이제 에서 곧 에돔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에서가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또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이요, 아나의 딸인 아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취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바스맛을 취하였더니 아다는 에서에게 엘리바스를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으며 아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아들딸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 가축과 모든 짐승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자기 동생 야곱의 얼굴로부터 떨어진 지역으로 갔더니 이는 그들의 재물이 풍부하여 그들이 함께 거할 수 없었음이더라. 또한 그들이 나그네로 거하던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수용할 수 없었더라. 에서가 이와 같이 세일 산에 거하니 에서는 에돔이니라.(1-8)
영적으로 사는 것과 육신으로 산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야곱과 에서는 이 두 가지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분명히 에서와 야곱은 능력 있고 건장한 남자와 약하고 교활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들을 보는 눈이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실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주가 말하노라"(사55:8)
무엇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고 있습니까? 에서는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에 있어서 매우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무엇일까요? 창세기 36장에서 에서의 세대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오늘날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야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러 명의 아내
그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2-5). 그것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족속 가운데 아내를 취하라는 명령을 버리고 오히려 여러 족속의 아내들을 얻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아다, 히위 족속의 아홀리바마, 이스마엘의 딸 바스맛을 그들의 딸로 얻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중대한 사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범죄는 결국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일부일처의 원리를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분을 걸쳐서 결혼에 관하여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구약의 인물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둔 것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지만 일부다처의 원리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행했던 사람들이 행했던 관습이었고, 이일의 주동자는 당연히 사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창6:2)
위의 두 구절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변질이 되어 갔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우리는 이것이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믿는다)이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본래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늘로부터 쫓겨난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세상에 일부다처라는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 앞서서 가인의 후손이었던 라멕이 아다와 실라라는 두 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당시에 모든 사람에게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에 특별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천사들의 행동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정당화시켜 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후에 사람들은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고 노아의 심판 이후에도 이러한 관습은 계속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에서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역시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며,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은 힘과 권력의 상징으로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를 얻은 모습은 다소 정치적인 상황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주변 국가의 딸들을 취함으로서 다른 부족과의 관계를 친분 있게 함으로서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여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묘한 결혼으로 인하여 매우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 일부일처이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초기 명령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율법적인 생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비밀을 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엡5:31,32).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유일한 신부입니다. 만일 일부다처를 수용하는 자세를 갖게 된다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아닌 다른 곳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소위 에큐메니칼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감독과 집사를 세움에 있어서 일부일처의 원리를 지키도록 권고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있음을 간증으로 보일 수 있는 자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도록 권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결코 이 원리를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육적인 사람이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물이 풍부하여
그는 가축이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7). 그는 부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이보다 더 복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그는 한 번도 풍요로움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장인이었던 라반의 집에서도 그는 종의 생활을 해야 했고, 그 대가로 재산을 가져오는데도 매우 힘든 과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더욱이 그의 말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이집트로 양식을 얻으러 가야하는 딱한 신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에서는 그의 풍요로움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고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곳에는 바로 이러한 일에 대하여 원망스러움과 감사가 함께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까요? 반면에 주 안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어찌 그리 어렵고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결론적으로 언급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을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 상속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당연히 물질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물질마저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세상을 살 가치를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돈을 얻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육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결코 세상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비주의나 오순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 물질을 얻을 수 있다고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를 믿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을 얼마나 보셨습니까? 저는 오히려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 가난해진 사람들을 더욱 많이 보았습니다. 왜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매우 간단한 원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 우리의 가진 것들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가만 놔두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소유가 없음을 주장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에게 많은 것들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으므로 부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고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이 공급하신 것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주를 위해 쓰는 일에 인색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기억해야만 합니다. 진정한 부자는 이 세상에 재물을 쌓아 두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늘에 쌓아 두는 자가 진정한 부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며 거기서는 도둑이 뚫고 훔치느니라.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마6:19-21)
에서는 물질적으로 부요함을 얻은 자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세상에서 성공한 자였습니다.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이루지 못한 물질적인 풍요를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재산이 넘쳐 도저히 자신의 처소에 머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능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그 이름이 지워졌고, 이미 하나님의 관심 밖의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세상에 없고, 누구도 그의 인생을 따라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난해도 부족해도 야곱의 인생을 따라 살겠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이 땅에 재산을 쌓아두지 않습니다.
많은 족장들 그리고 왕들
에서의 세대들을 소개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아들들 가운데 많은 족장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15-43). 우리는 여기서 그의 후손들이 매우 큰 민족으로 커갔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히 육신적으로 보았을 때 큰 복을 얻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모든 민족들의 왕이 되시기를 원하셨던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누구도 사람들의 왕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거대한 민족들을 이끌고 이집트 땅을 빠져 나왔던 모세조차도 왕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통치해 주실 것을 원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시대에 백성들은 왕을 요구했고, 사무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왕을 요구했습니다(삼상8:5-20).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었고, 오직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사무엘의 목소리에 순종하기를 거부하여 이르되, 하니로소이다. 우리에게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리니"(삼상8:19)
에서의 족속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민족들을 형성했고, 왕들을 세워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육신적인 삶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정부가 있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정부를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정부가 그들을 안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정부가 그들의 행복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까? 대부분 민족들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백성들을 착취하고, 이용하여, 오히려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도구로 권력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러나 부정이 드러나면 백성들은 분개를 하고 그를 축출하여 새로운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만한 통치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에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계시지만 언제나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그들을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천사들을 동원하시고, 또한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셔서 안전한 길로 가도록 돕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람의 연약함을 이미 아시고, 오히려 그들을 섬기시기 위해 모든 관심을 그들에게 두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누가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으며, 또한 그분의 자녀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결론
우리는 에서의 세대를 통하여 그가 여러 명의 아내들과, 부요함과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살만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결코 칭찬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만족에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사시겠습니까? 현명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