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증표 할례(창17:27)

조회 수 1725 추천 수 0 2010.06.06 22:14:18

그의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타국인에게서 돈을 주고 산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창17:27)

 

아브라함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은 지 약 13년 만에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은 그 중간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에 나타나셔서 다시 대화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중요한 약속 또 한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할례였습니다. 이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받은 증거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 하나님은 대화를 중단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매우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줄곧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발생이 될 때마다 대화를 중단하시곤 했습니다. 가령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그의 아버지를 데려가자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대화를 중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성인이 되는 13세가 될 때까지 침묵하고 계시다가 이제 나타나셔서 대화를 시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13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히브리 사람들은 13의 수를 고난과 시련의 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13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비록 아내의 몸종을 통해 아들을 낳았지만 결코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하갈이 사라를 멸시했던 상황으로 미루어서(16:4-6) 결코 건강한 가정이 아니었음이 분명하게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시 대화를 시작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마엘을 통하여 기쁨을 얻었어야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지 못한 채 고통 속에 13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서도 이러한 모습들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침묵의 원인이 불순종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갈과 더불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침묵하셨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기를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침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께로 향해 있을 때에 반드시 침묵을 깨뜨리고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했을 때 주님은 더욱 풍성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계속 강조되고 있는 언약

 

침묵을 깨뜨리고 나타나신 하나님은 앞서 맺은 언약을 더욱 분명하게 하십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이라면 아브라함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동일한 약속의 말씀을 반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부르실 때(창12:1-3), 롯과의 이별(창13:14-18),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고자 했을 때(창15:1-5), 그리고 이스마엘을 낳은 지 13년이 되던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동일한 약속을 반복하여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주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과도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들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열심히 제사를 드릴 것을 요구하실까요? 아니면 열심히 일을 해서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전쟁을 통하여 그의 영토를 넓히고 권세를 갖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을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날 때마다 약속을 기억하도록 동일한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헌금을 하고 구제와 봉사의 일을 하며, 웅장한 교회당을 건축하고, 많은 회중들을 모아 예배하도록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관심은 오직 약속의 말씀들을 믿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한 것이지만 반드시 기억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매주 무슨 설교를 듣고 계십니까? 만일 당신이 바른 목양자에 의해 설교를 듣고 있다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에 대하여 듣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새 생명을 얻게 해 주도록 하는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은 장차 다가올 세상에서 받게 될 상속과 보상에 대하여 듣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믿음을 위한 것들입니다.

 

당신은 혹시 설교를 듣다가 육신의 복과 위로와 평안에 관한 내용만을 골라서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의 영혼을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를 배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반복되어지고 있는 약속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을 더욱 안전한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새로운 명령 할례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명령을 하십니다. 그로 하여금 할례를 받도록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에 맺어지는 언약의 증표였습니다(10).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통하여 자신들이 특별한 백성임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는 어떤 의미인가요? 예수님도 할례를 받으셨습니다(눅2:21). 바울도 할례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빌3:5). 디모데도 할례를 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행16:3). 이러한 증거들을 보아서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할례를 받았거나 받도록 권면하고 있는 대상들을 모두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성경은 이방인이었던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지 말도록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갈2:3).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할례가 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그가 할례의 표적 곧 아직 할례 받지 않은 때에 그가 소유한 믿음의 의를 봉인한 표적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는 아니하였으나 믿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어 의가 그들에게도 인정되게 하려 함이요,(롬4:11)

 

할례는 외적으로는 남자 성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할례가 믿음의 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seal)을 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소유와 매우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일 저에게 세상에 어느 것이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할 수는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영원한 것이 있고 사라질 것들이 있습니다. 즉 상속자가 있고, 영원한 형벌에 던져질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한 소유가 된 자들은 바로 전자에 속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할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할례를 받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 할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마음에 하도록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롬2:29). 그것은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의 할례(골2:11)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명령이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신약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 시대에도 마음의 할례를 받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신10:16;30:6, 렘9:25-26). 이 말은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통하여 믿음의 백성들이 자신의 특별한 소유임을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할례라는 말씀의 표현을 쓰면서 입술의 할례(출6:12,30), 귀의 할례(렘6:10)에 대하여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곧 할례가 단순히 남자의 성기 포피를 자르는 의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가 아무것도 아닙니다(갈6:15). 그러나 그 의미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 까닭에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손들도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증명해 보였던 유명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요구하셨을 때 그는 머뭇거림 없이 즉시 모리아 산으로 가서 그를 향해 칼을 들이댔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행동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주님께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자신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소유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결코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사는 동안 잠시 관리하는 청지기의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로 그 믿음을 인침 받은 참 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바울의 서신들을 통해 보면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도 없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것들을 대신하는 것으로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갈5:6),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갈6:15),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고전 7:19)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 말은 곧 외적인 할례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오직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은 인(도장)을 받은 것입니까? 그것이야말로 당신을 안전한 구원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주어짐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뀌어 진 그들의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버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을 전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를 보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아브람의 이름이 하나님에 의하여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신분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분명히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소망을 두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히11:8-19). 이전에 아브라함은 이러한 꿈을 가지고 갈대아 우르로부터 나왔었지만 지금까지의 행동은 전혀 하나님의 백성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속해서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했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오랜 시간동안을 괴로워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분에 걸맞은 열매들을 맺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비록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일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시민권을 버리고 하늘의 속한 자들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활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빌3:20). 이 자격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세상에 속해서 각종 죄들과 싸워가야만 하지만 우리의 신분은 여전히 하늘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열매들을 맺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런 상속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받을 상속마저도 빼앗으려고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소망을 버리고 오직 하늘에 소망을 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아브라함은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순종함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가 순종했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은 주님의 것이며, 또한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겠다는 믿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도 또한 그의 생각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순종은 결국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려 지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믿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은 이처럼 순종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의 자아를 모두 벗어버리고 온전히 주님께 나를 맡기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직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겠노라고 다짐을 하셨습니까? 인생의 설계도가 주님의 손에 들려져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내 손에 들려져 있는 것입니까? 만일 아직도 우리의 손에 들려져 있다면 주님께 돌려드리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마음껏 설계변경을 하시도록 해서 우리의 인생이 그분의 작품이 되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순종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받은 상속과 보상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당신을 더욱 영광스러운 위치에 올려다 놓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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