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창4:2)

조회 수 1894 추천 수 0 2010.06.06 21:55:13

가인과 아벨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받는 평가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결과는 매우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벨이라는 인물은 성경을 통하여 그의 인간적인 여러 가지 상황들을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이토록 성경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유는 그가 오늘날 참 그리스도인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어떠한 모습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을까요?

 

아벨의 직업

 

아벨은 양을 지키는 자였으나(창4:2)

 

그는 사실상 생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양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세상에서는 매우 무능한 인간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기를 먹지 않았으므로 그는 육신을 위해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러한 직업을 가진 이유는 바로 자신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죄 문제의 해결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짐승의 희생을 통해 입은 가죽옷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실제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으로 매우 무능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기준이 결코 육신의 만족을 채우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과 그가 섬기는 교회를 위해 자신들의 육신적인 만족과 기쁨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들입니다. 그 까닭에 그들은 세상에서 소외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며, 때로는 멸시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삶의 선택을 하고 살아가는 자들을 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얼마든지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자들이지만 오히려 포기하고 힘겨운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 온 자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바울과 같은 이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예와 지식과 재물을 포기하고 오히려 멸시당하고, 조롱당하며, 심지어 죽음의 자리까지 기꺼이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 삶이 육신적으로는 유익을 줄 수 없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자신의 본 직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벨이 선택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직업을 가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들이라면 결코 육신적인 직업들을 자신의 본업이라고 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벨이 드린 헌물

 

자기 양떼의 첫 새끼들과 그 기름(4)

 

그는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자였지만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실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믿음으로 양떼의 첫 새끼들과 그 기름으로 희생의 헌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가끔 전도를 하다보면 물질 때문에 교회를 나올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괜찮다고 설득을 해봐도 막부가내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돈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 아벨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물질적인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헌물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이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양 한 마리가 얼마나 비싼데요?" 그러나 그는 성경을 바로 읽은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양이 양식으로 쓰여 진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오직 채소와 과일, 그리고 곡식만이 사람의 양식으로 쓰여 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양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것은 양식도 아니며 그렇다고 애완용으로 기를만한 짐승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양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헌물을 위해 아벨이 따로 준비해 두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에 대하여 증언하시느니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느니라.(히11:4)

 

하나님의 반응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으나(4)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많은 물질과 풍성한 헌물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그러한 예물을 드렸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관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각에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아벨의 헌물이 하나님의 관심을 끌 수 있었습니다. 오직 죄 사함을 위한 헌물이야 말고 하나님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많은 헌금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정성을 다해 드려진 것들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정답이 아닙니다. 주님의 관심은 물질과 정성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관심은 오직 무엇을 가지고 나왔느냐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 혹은 하나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돈으로 주님의 능력을 사겠다던 시몬도 책망을 받고 망할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모든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고넬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구원과 상관없는 존재로 남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믿는 자라도 물질로 자신의 신앙을 보이고자 했던 아나니야와 삽비라 부부는 심지어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으로 주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주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허공에 돈을 갖다가 뿌리는 행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나갈 때에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실 것이며,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헌신과 봉사야말로 하나님 왕국에서 상으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부디 헛된 일들을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벨의 육신의 결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치려고 일어나 그를 죽이니라.(8)

 

아벨은 온전한 헌물을 드린 결과로 형인 가인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회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른 믿음, 바른 신앙을 고수해 오던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많은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 왔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형통하리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생각과는 달리 수많은 인내와 헌신이 요구되는 믿음을 경주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멸망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도 과연 그것이 언제나 보장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벨을 통해 보듯이 교회사를 보면 수천만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사자들의 밥이 되기도 했으며, 기름 가마에 던져지기도 했고, 나무에 달려 화형을 당하기도 했으며,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믿는 이들은 끊임없이 핍박을 당할 것이며, 육신은 지속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아벨이 그의 형 가인에 의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데 실패를 했지만 그는 모든 정성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방신들을 섬기는 이들에 의해 핍박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 왔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무리들은 결코 이방신을 섬기거나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며, 그들의 율법을 가지고 잣대를 삼아 허울 좋은 종교재판을 하여 정죄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자들입니다. 이일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아벨 대신 셋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를 알매 그녀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하나님께서 내게 다른 씨를 정해 주셨다, 하였기 때문이더라.(25)

 

과연 그리스도인의 역사는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순탄한 과정을 겪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시간동안 핍박을 받아왔고, 심지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는 음모 속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당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역사는 계속되어 잉태되어왔고, 결국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의 후손들은 세상이 멸망시키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교회가 어떻게 지금까지 순수하게 보존되어 왔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의 정체성에 관하여 질문을 합니다. 즉 칼빈이냐, 웨슬레냐, 아니면 알미니우스냐 하고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장로교 인이라면 칼빈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감리교 인이라면 웨슬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결교회나 순복음(기하성)에 속한 교인이라면 알미니우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주님의 교회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의 교회는 계속해서 존재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그들이 제 아무리 허울 좋은 교단의 간판을 걸고 있더라도 그것만으로 주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교회는 어떻게 보존되어 왔을까요? 그 대답은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다는 사실에 그 비밀이 숨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친히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사탄은 주님의 교회를 계속해서 파괴시켜 왔습니다. 그들은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임을 당하거나 핍박을 통하여 무너졌고, 세상에서 그들의 존재는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주님의 교회는 또 다른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사탄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무너져 갔습니다. 주님의 순수한 교회는 이러한 방법으로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의 교회가 멸망할 것 같은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성경을 변개시키고 또한 성도들에게 공개하지 않음으로서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지만 바른 성경을 가졌던 많은 이들에 의하여 주님의 교회는 또 다시 세워졌고, 사탄은 또 다른 방법으로 주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주님의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일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이미 넘어진 교회들이 무수히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바른 성경을 가지고 있는 한 주님의 교회는 계속해서 세워질 것입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그의 믿음은 주님의 의하여 계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교회는 끊임없이 핍박을 당하고 육신적인 죽음을 맞이했지만 지금까지 주님의 손에 의하여 세워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주님의 손에 의해 세워졌음을 인식하고 더욱 귀하게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삶이 바른 믿음 위에서 바르게 성장해 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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