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한바,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보상이 있겠느냐? 세리들도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태복음5:43-48)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있다면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릴 수 없이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그것을 나누어야만 하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실천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형적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아직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성경 안에서 그 답을 찾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부분을 통하여 사랑의 범위를 정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을 용서해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일곱 번까지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할지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18:21,22). 이것은 결국 무한대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모아 놓고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말씀하심으로서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의 범위를 정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간혹 교회나 성도들의 갈등에 대한 상담을 요청받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서로 원수와 같은 상태에 있음을 봅니다. 더욱이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거나 가깝게 지낸 사이일수록 그 간격이 더욱 심각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지만 그들 안에 있는 감정들을 조절하지 못해서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화해하는 일을 포기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원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코 사람들과 화해하지 못하고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없습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마5:24)
우리는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들에게 하는 말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화해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믿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화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와도 원수를 맺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세상과 화해하셨기 때문이며(고후5:19),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마귀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하여 마음을 나누어서는 않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경계하고, 그들로부터 분리되라고 하는 것은 영적 존재인 마귀들의 활동 때문이지 주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대상들이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사람 누구와도 원수를 맺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사랑(요13:1-15)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이 단순히 겸손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가룟 유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그분께서 자기를 배반하여 넘길 자가 누구인지 아셨음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니라, 하시니라(요13:10,11)
예수님은 결국 원수의 발을 씻기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수들을 사랑할 것에 대한 교훈에 대하여는 듣고 있지만 그분께서 원수들을 사랑하는 장면을 찾아보지 못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권위 있는 모습으로 계셨고, 또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과의 변론의 통하여 보다 논리적인 분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누구보다도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가룟 유다에게 발을 씻기시는 장면을 통하여 비록 원수까지라도 섬기시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 {주}와 선생인 내가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내가 본을 보였음이니라(요13:14,15)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이며,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러한 본을 보이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 대상이 비록 원수일지라도 우리는 그의 발을 씻길 수 있는 마음, 즉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2. 다윗의 사랑(삼상24:4-8)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주]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겨주리니 네가 보기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오늘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라. 이에 다윗이 일어나서 몰래 사울의 겉옷자락을 베니라. 그 뒤에 다윗이 자기가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내밀어 내 주 곧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주]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이는 그가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종들을 금하여 일어나 사울을 대적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그 뒤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므로 다윗이 자기 얼굴을 땅으로 숙여 절하니라(삼상24:4-8)
구약 성경 안에서 원수를 사랑했던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다윗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자입니다. 그 까닭에 성전을 짓는 일을 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언제나 그를 뒤쫓았습니다. 다윗은 몇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만 했고, 광야의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사울을 죽이고 이스라엘 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했고, 결정적인 것은 그가 이미 사무엘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다윗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었던 자였기 때문에 그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판단이 매우 옳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그가 죽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오히려 사울을 존귀하게 대하는 다윗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애에도 끊임없이 괴롭히는 원수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계시며(요3:16), 그들이 모두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벧후3:9). 그렇다면 사랑의 범위는 다윗의 때와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이 함께 하고 있는 자들이므로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오히려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도 원수가 되어가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미워할 수 없습니다. 또한 원수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비록 상대방이 내게 죽음으로 위협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디 이 세대를 따르지 말고 오히려 사랑함으로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스데반의 사랑(사도행전7:54-60)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상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도시 밖으로 그를 내던지고 돌로 칠 때에 증인들이 자기 옷을 사울이라 하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하더라. 이 말을 하고 그가 잠드니라(사도행전7:54-60)
신약 시대의 성도를 대표하는 사랑의 실천자는 바로 스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베드로나 바울, 요한과 같이 놀라운 능력을 보이고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는 일에는 두드러지게 활동한 기록이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초대교회 성도들로부터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행6:3). 그는 비록 유명하지는 않지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그가 얼마나 성경을 해박하게 알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비록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를 향해 돌을 던지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가지는 세상에서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분노할만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의해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을 맞아가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매우 간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한 것입니다. 그는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고는 죽음을 맞습니다. 그는 끝까지 그들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원수의 모습으로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들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원수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도 증거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하는 자들에 대하여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에 의지하여 더욱 기도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딤전2:1-2). 그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집단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특히 교회가 그러한 일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면 때로는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인권문제에 교회가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는 한 교회 내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대상은 결코 특정한 사람들이어서는 않됩니다. 누구도 상처를 받아서는 않되며,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명령하셨고,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의 모습이 바로 그러한 진리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바울의 사랑
오직 누가만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라. 마가를 데리고 함께 오라. 이는 그가 나의 사역에 유익하기 때문이라(딤후4:11)
바울의 생애 가운데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나바와 격렬한 말다툼을 한 것입니다(행15:36-41). 바나바는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예수님을 만난 후 회심하여 예루살렘으로 올 때에 아무도 그를 반기는 자들이 없었지만 바나바가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또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복음을 선포한 일에 대하여 말함으로서 안심시켰던 장본인 입니다(행9:27). 그와의 인연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에 다소에 있는 사울(바울)을 불러다가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행11:25,26). 여기서부터 바울은 평범하지 않은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바울이 사역자가 되는데 있어서 바나바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마가라 하는 요한이 있었는데, 그는 1차전도 여행 때에 중도에 예루살렘으로 내려갔던 자였습니다(행13:13). 결국 이 마가라 하는 요한을 2차 전도여행에 데려가야 할지에 대한 이견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바나바와 바울이 격렬한 말다툼을 벌이고, 서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나바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마가는 그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감옥에서 바울은 마가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자신의 사역에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마가와 화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업무적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과거에 마가로 인하여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와 더불어 사역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전도자로 일컬어진 바울로부터 외면당한 마가의 심정은 바울보다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가를 부름으로서 마가의 이러한 마음을 녹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 둔 시점에서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슴 아프게 만들었던 지난 기억들을 모두 지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진정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으로 인하여 마음 아픈 사람을 찾아 그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아는 자였습니다. 이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의 생애에는 아픔을 준 사람들이 없습니까? 진정 사랑을 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을 찾아 위로하는 여유를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5. 결론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그 사랑의 범위는 무한한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의 목숨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 용서해도 저 사람만큼은 안 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오히려 그들을 위해 더욱 기도하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 나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사랑할 준비를 하십시오. 지금 나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그를 더욱 사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