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경을 대하는 자세는 곧 신앙의 척도를 가늠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성경의 말씀을 무시한 채 환상과 계시에 의존하기도 하고, 이와는 반대로 어떤 이는 성경을 난도질하여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전자는 주로 신비주의자나 기복신앙 인들이며, 후자는 신학자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며,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신비주의적 목회자와 성경 그 자체보다는 칼빈, 알미니안, 웨슬레 등의 이름을 더 높게 평가하는 신학자들에 의해 빛을 바랜지 오래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대하는 자세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정상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배우고도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면 그것보다 허망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더욱 억울한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구원받지 못했다면 더욱 땅을 치고 원통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현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자기 육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묘하게도 경건의 모양(종교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그들은 어리석은 여자(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접근하여 죄를 짓게 하고 항상 배우지만 진리에 이르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해서는 버리운 자라고 말합니다(딤후3:8). 사도 바울은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 위해서 단 한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아닌 것으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기복 신앙과 헛된 철학이 성행하는 이 시대에 진리가 아닌 것을 구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경건의 모양(종교의 형식)을 가지고 거짓 진리를 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그들을 우리의 눈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힘의 논리로 약한 자를 마구 정죄하고 그 일을 정당화 할 때는 어느덧 우리도 그 무리 속에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구별할 수 없지만 성경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데 지혜를 가져다 주어 참과 거짓을 구별하고 거짓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 네가 어린아이 때부터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디모데후서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