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마8:23~27)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모습을 통하여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그분에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자연 만물을 친히 만드셨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드셨기 때문에 다스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창조의 일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사실들을 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교회에서 암송되어지고 있는 사도신경에서조차 하늘과 땅, 즉 천지를 만드신 분을 하나님 아버지로 제한하려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을 만드셨고, 그것을 친히 통치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던 것도 제자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의도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능력을 보이시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제자들에게 온전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놀라운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베드로나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어부 출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부로서 매우 노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파도가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겨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는 점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주무시고 계셨던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그들이 목수였던 예수님보다는 이 문제를 더욱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들에게 믿음이 적음과 무서워하는 것을 지적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자 고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을 바라보는 제자들은 놀랐고,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하여 서로 수근거립니다. 그들은 이미 이전에도 많은 기적들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기적들과 가르침들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수없이 증거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고 계시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심을 보이시고 계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믿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을 통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바다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바다가 잠잠할 때도 있지만 종종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모든 것들을 집어 삼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안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인생들에게 견디기 힘들만큼의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항해하는데 매우 노련한 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미숙한 경험들로 인해서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들은 결코 이 험한 세상을 스스로 이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보듯이 그들은 배를 타기 전에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많은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파도를 잔잔하게 만드시는 일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배에 함께 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자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세상을 항해하면서 이러한 사실들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다고 선언하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결코 적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믿음을 바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큰 믿음으로 칭찬받은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대표적으로 백부장의 믿음을 들 수 있습니다(눅7:1-9). 그는 자신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와 고쳐주실 것을 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시고자 하였지만 오직 말씀만으로도 고쳐주실 수 있다고 고백함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는 칭찬을 듣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큰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우리의 눈앞에 닥친 어려움들이 무슨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다면 어떠한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우리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며, 종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통해서 세상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욱 거대한 풍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문제 앞에서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모든 문제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목수였던 예수님보다는 어부였던 자신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더욱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어리석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보다는 자신의 지혜가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욱 적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로움보다는 거짓말이 문제를 더욱 쉽게 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보다는 현명한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욱 빠르고 정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칙보다는 세상의 보편적인 상식이 더욱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틀렸습니다. 모든 답은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분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에게 맡기는 순간 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 큰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더욱 빠르게 주님 앞으로 다가서야만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잔잔하게 만들어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