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권 다윗의 시(시107-150편)

조회 수 2412 추천 수 0 2012.04.27 11:28:04


시편의 마지막 부분인 제5권은 모세오경 가운데 신명기의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확하게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명기가 율법을 재조명하고,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그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곳에서는 다윗의 시와 더불어 바벨론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상황(137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요 주제로 다룸으로서 말씀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1. 주를 신뢰하라(시107-118편)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는 대상은 그들 자신이 만든 우상들이며, 때로는 그들 스스로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115:8). 세상의 어떤 신도 이 세상이 자신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죽음에 내어준 적도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다가가기 전에 먼저 오셔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너는 {주}를 신뢰하라. 그분은 그들의 도움이시요, 그들의 방패시로다”(115:9)라는 고백과 함께 오직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 곧 하늘들은 {주}의 것이로되 그분께서 땅은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주셨도다”(115:16)라고 말씀하시면서 “죽은 자들은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적막한 곳으로 내려가는 자도 다 그러하도다”(115:17)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이 찬양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찬양은 살아 있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즉 이 땅에서 거듭난, 즉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핑계로도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의 찬양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찬양을 멈추게 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1) 나의 힘과 노래시요

 

찬양을 하다보면 계속해서 같은 가사를 반복함으로 더 깊은 은혜를 경험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시편이 찬양을 위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을 신뢰할 것을 강조하면서 “오 이스라엘아, 너는 {주}를 신뢰하라. 그분은 그들의 도움이시요, 그들의 방패시로다. 오 아론의 집아, {주}를 신뢰하라. 그분은 그들의 도움이시요, 그들의 방패시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아, 너희는 {주}를 신뢰하라. 그분은 그들의 도움이시요, 그들의 방패시로다”(115:9~11)라고 노래합니다. 시편 가운데 가장 짧은 내용을 담은 시인 117편은 “오 모든 민족들아,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모든 백성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우리에게 베푸시는바 긍휼이 풍성하신 그분의 친절이 크고 {주}의 진리가 영원히 지속되는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117:1~2)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찬양에는 이처럼 다양성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 반복되기도 하며, 때로는 긴 내용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찬양의 대상은 분명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는 나의 힘과 노래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118:14)라고 고백합니다. 그분만이 우리가 찬양할 대상이며, 또한 유일한 구원자이시기도 합니다. 구원자와 관련하여 시편은 중요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118:22)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 모퉁이 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행4:11,벧전2:7).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두려워하는데서 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명령들을 행하게 될 것이며, 그 속에서 명철을 얻게 될 것이고, 더불어 찬양을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111:10). 시편에서 “주를 신뢰하라”는 내용과 더불어 반복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할지어다.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할지어다. 이제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할지어다”(118:2~4)라는 내용으로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곧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은 멸망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3:16).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께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긍휼은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조차도 주님의 긍휼하심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긍휼을 알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긍휼하심을 찬양하십시오.

 

2. 하나님의 말씀(시119-140편)

 

성경의 가장 긴 구절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중요한 모든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각 문단의 첫 구절들은 매우 주의 깊게 생각하고 묵상해야 할 말씀들이기도 합니다. 여러 구절들이 있지만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정착되었사오며”(119:89)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19:105) 같은 내용들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많은 이들에게 인용되어지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또한 여기에서는 솔로몬의 시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가 전도서에서 강조한 것과 같은 내용의 시를 노래합니다. 그는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것을 세우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도시를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127:1)라는 고백을 통하여 인생이 주님에 의해 완성되었을 때 완전해 질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그분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분의 말씀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재물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까닭에 시편 기자는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의 금은보다 좋으니이다”(119:72)라고 고백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맛으로 비교하여 “주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19:103)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결코 이 세상이 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게 될 것이며, 이 땅에 사는 동안 모든 믿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어 줄 것입니다.

 

이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히4:12)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까지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세상의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돕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면 그의 삶은 반드시 형통할 것입니다.

 

2) 네가 행복하고 형통하리로다

 

믿는 자들이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도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밤의 경점들보다 앞서 가나이다”(119:148)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형통한 삶을 위해서 “네 손이 수고한 것을 네가 먹으리라. 네가 행복하고 형통하리로다”(128:2)라고 소개함으로서 이 땅에서 수고하는 삶을 말하고 있고, 또한 “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133:1)라고 말함으로서 형제들과의 교제가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형통한 삶은 이 세상을 사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삶입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조차도 이러한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며, 그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통해서 행복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종교들이 일방적으로 신의 도움을 요구하는 것과는 달리 믿는 자들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살후3:8), 그 속에서 행복하며 형통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행복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형제들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고 형통한 삶을 꿈꾸십시오.

 

3. 주를 찬양하라(141-150편)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것에 관하여 분석하고 나누려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들은 매우 큰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찬양에 관하여 지식적으로 접근하고 가르치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일 뿐입니다. 그 노래는 아침에 부르기도 할 것이며(143:8), 밤마다 부르기도 할 것입니다(92:1). 또한 인종과 신분에 관계가 없으며, 모든 장소에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 만물이 부를 수 있는 것이며, 모든 방법으로 그분을 향해 소리 내어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찬양이 공부를 통하여 도움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찬양은 마음으로부터 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1) 내 혼아, 주를 찬양하라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찬양은 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오 내 혼아, {주}를 찬양하라”(146:1)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찬양을 하는데 영과 혼과 몸이 모두 찬양을 해야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앞서야 하는 것은 바로 혼입니다. 이 혼은 곧 우리의 마음을 말합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자들은 온 마음을 다해서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아무리 영으로 노래한다 할지라도 그는 자신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몸으로 노래를 해도 그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찬양을 하는 자는 온 마음을 다해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영으로 노래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때때로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기도 하며, 찬양을 함에 있어서도 빠르게 노래함으로 노래 안에 담긴 시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노래합니다. 그러한 찬양은 결코 그들 자신에게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또한 몸으로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춤을 추기도 하며, 때로는 뛰기도 하면서 열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그들 자신에게 유익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이 반응을 하기 전에 먼저 혼을 일깨우고, 그 안에서 찬양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는 찬양은 영적인 찬양이 될 수가 있고, 또한 몸도 그에 따라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찬양이 마음으로부터 나왔을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2) 찬양의 도구들

 

찬양을 지식적으로 접근하고, 또한 분석하려는 이들은 악기 사용에 대하여 제한하려 합니다. 그들은 교호 안에서 피아노나 현악기의 일부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아예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아니면 무시하려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나팔 소리로 그분을 찬양하며 비파와 하프로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작은북을 치고 춤을 추어 그분을 찬양하며 현악기와 오르간들로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심벌즈에 맞추어 그분을 찬양하며 높은 소리를 내는 심벌즈에 맞추어 그분을 찬양할지어다”(150:3~5)라고 다양한 악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악기들을 동원하여 찬양하도록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춤을 추는 행위에 대해서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찬양은 규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오지 않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목적으로 부른다면 그것은 위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헤비메탈과 같은 부류의 록음악이나 힙합, 혹은 랩 음악과 같은 음악들을 경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음악이 사악해서가 아니고, 찬양의 본질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위해서 어떠한 것도 제한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악기와 모든 종류의 음악을 가지고 노래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노래하고 오직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십시오.

 

4. 결론

 

주님은 마지막으로 명령하십니다.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이 {주}를 찬양할지어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150:6) 찬양도 호흡으로 하는 것입니다. 호흡은 살아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살아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찬양해야만 합니다. 이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찬양의 입을 막으려는 자들은 찬양을 분석하고 나누며 제한하려 합니다. 그러나 노래는 노래일 뿐입니다. 그것은 결코 지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의 선율이 미개한 자들의 것 일수도 있고, 매우 고급스러운 악기로 화려한 연주력을 가진 자들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같은 음이 반복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웅장한 곳일 수도 있습니다. 음악이 단순하다고 결코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며,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된다고 해서 그것이 고급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찬양은 부르는 자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부르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 노래함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한 자신도 감사함으로 찬양함으로서 행복하고 형통한 삶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아름다운 찬양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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