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영적으로도 많은 해석을 낳았던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여러 가지 시각에서 많은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마14:15-21 막6:35-44 눅9:12-17). 이 기적은 저녁에 있었는데,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하면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저녁 즈음은 오후 3시부터 해당되는 시간입니다. 이 기적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내시고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가 저녁이 되었을 때 거기 홀로 계시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는 일몰 이후의 시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마14:23).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외딴 곳으로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도시로부터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많은 시간을 걷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목격하고 있었으며, 많은 시간을 보내고 배가 고파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는 동안 이제 그들은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시고 계신 일들을 멈출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안을 하십니다. 이 제안은 곧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기적을 행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들을 먹이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빌립은 “그들이 각각 조금씩 받을지라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그들에게 충분치 아니하리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빌립은 수학적인 판단으로 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저히 먹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계산상으로는 도저히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없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대답했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이유도 모든 일을 계산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실에게 가능한 사실에 대하여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믿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탄생하는 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가 사해진 사실,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일,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과 같은 것들은 우리의 논리나 지식에 근거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앞세울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안드레는 “여기 한 소년이 있는데 그가 보리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지만 그도 역시 해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많은 기적들을 보이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많은 무리들에게 양식을 먹이실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여전히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가 소년의 보리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이 작은 것이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미 주님의 교회 안에서,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보이셨던 주님의 능력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에서는 이 일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연약한 인간에게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것은 그들에게 없는 양식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양식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최소한의 것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이시지 제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없는 것까지 요구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에이지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잠재적 능력까지 동원하도록 요구합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이들이 속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예수님께 오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인 무리들을 앉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앉게 하심에 있어서 백 명 혹은 오십 명씩 무리를 지어 앉게 하십니다(막6:40).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은 모든 일에 대하여 매우 질서 있게 행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14:40).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모든 세대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과정까지 단 한 번도 주님은 무질서하게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는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가 언제나 진지한 모습으로 공급받을 말씀을 기다림으로서 겸손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사30:15, 시23:1,2). 성인 남자만 오천 명, 전체로 따지면 약 만 오천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질서 없이 행동한다면 매우 혼란해 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굶주림만 생각하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혼란은 더욱 심각한 상태를 맞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각종, 지진이나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재앙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인하여 극도의 혼란에 빠져 약탈과 강도를 일삼는 경우들을 목격합니다. 그들에게 질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광야에 있었던 사람들은 비록 배고픈 상태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리를 지어 질서 있게 앉게 하시고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을 부르셔서 나누어 주실 수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아니면 먹을 자들에게 스스로 와서 먹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양식을 공급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떡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갖다 먹으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와서 먹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종들을 통하여 공급하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세대에 걸쳐서 주님의 종들은 활동했습니다. 어느 세대에도 종들이 없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의 종들을 그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떡과 물고기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양식의 부족을 걱정해서 그들에게 제한적으로 공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풍족함을 드러내 주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풍족하여 우리가 아무리 먹고 먹어도 넘칩니다.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광주리가 여전히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먹어도 결코 소비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은 조각들을 거두어 광주리에 담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잃어버리지 말도록 하십니다. 여기서는 검소하신 모습과 더불어 풍성하게 거두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주워 담아서 다시 공급하도록 하신 것은 비록 부스러기일지라도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지에 대하여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검소함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엄청난 기적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선지자로만 기억합니다. 그들은 선지자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메시야로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행하신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후에도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하지만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기적을 행하시고, 자신들의 왕이 되어 주실 것만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고정 관념들을 깨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은 착각에 빠져 있음을 봅니다. 그들도 주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능력은 보면서도 그분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원하시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속에서 모든 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적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고 신실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