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마 13:47~50)
성경 안에서 바다는 세상과 비교되어 쓰여 지는 단어입니다. 바다 안에서 다양한 물고기들이 살아가듯이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일반적으로 어부들은 특정한 물고기를 목적으로 그물을 던지지만 그물에 걸려오는 것은 여러 종류의 것들입니다. 그 까닭에 어부들은 그물로 물고기를 잡은 후에는 다시 그물을 풀어 헤쳐 놓고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골라내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버리는 일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 끝이라는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대환난의 시점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각 사람의 인생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천년왕국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매우 혼돈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의도와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빠질 가능성 때문에 논쟁은 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물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시겠다는 경고를 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이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그물이 던져져서 많은 물고기들이 그 안에 담기게 된다는 것을 보면서 매우 의아한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시 그물로부터 풀어 헤쳐져서 사람들에 의해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구원의 안전 -한 번 구원된 자는 결코 지옥에 가지 않는다- 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사실에 대하여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듣고 깨닫는 것만으로 자신의 구원이 완전하다고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어 악인들은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시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 가운데 구원의 안전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이 말씀이 오늘날 교회시대를 의미하는 비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각각 의인과 악인으로 비유되고 있으며, 이를 가려내는 것은 천사들에 의해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듯이 천국에 속한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나쁜 것은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지듯이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전히 많은 논쟁이 되고 있는 천년왕국의 시점과 대환난의 시점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과연 천사들에 의해서 가려지게 되는 시점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끝이 성도들의 휴거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상황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 천년설의 입장에서 성도의 휴거가 있은 후 이 땅에서 7 년 동안 대환난이 있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재림이 있게 될 것이며,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 끝’이라는 시점을 대환난 이전이나, 천년왕국 이후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말씀은 매우 복잡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논쟁을 깊이 있게 다루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오랜 역사 동안 끊임없이 이 문제에 대하여 논쟁해 왔지만 여전히 그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 안에 비밀로 감추어 두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비유가 비록 세상 끝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교회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과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안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은 자라면 그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안에서 수차례에 걸쳐서 약속된 말씀입니다. 그 까닭에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듣고 복음 안에 있기는 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흔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복음을 듣고 깨달았지만 영접(receive)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과 제사장,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도 알았고, 메시야도 알았고, 누구보다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인 자들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결코 당시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위선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거룩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구원이 확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매우 헌신적인 모습들로 인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어지게 될 것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얼마나 의롭게 살았느냐는 것보다는 그가 진정으로 생명이 있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인지에 대한 심판이 됩니다.
세상 끝에 나쁜 물고기를 골라내 불 속에 태워버리듯이 하나님께서 취할 수 없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죄인입니다. 죄인은 예외 없이 누구나 지옥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단 한 사람도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성경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복음을 듣는 자들을 많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고기를 잡는 사람이 바다에 그물을 던지지만 잡힌 고기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영혼을 살릴 복음에 대하여 듣고 있다면 그것은 거의 행운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과연 그 복음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풀어헤친 그물에서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갈라내듯이 참 생명이 있는 자와 없는 자들을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교회에서 헌신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나는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인가?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 4:1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곁을 떠난 자들이 구원을 받은 자들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비록 주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제 아무리 바울의 곁에서 헌신적인 사역을 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가 아닌 단순한 종교인으로서 행했던 일이었다면 그는 결국 지옥불로 던져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실함입니다. 그가 아무리 행위에 있어서 완전함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 안에 생명이 없다면 그는 결국 위선자가 되어 지옥불로 향하게 됩니다. 먼저 참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힘써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분명하게 영접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