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 질문은 결코 한 개인의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구원받을 자가 많고 적음에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 말을 요약하여 설명하면 결국 구원받을 자가 매우 적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받을 자가 많고 적음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떠해야 하며, 또한 그곳에 도달했을 때에 사람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 집 주인으로 소개된 자가 누구인지에 관하여 많은 추측을 할 수 있으나 마태복음을 통해 주인은 곧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마7:22-23).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닫으시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좁은 문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힘쓰라”는 의미는 단순히 노력하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투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거나 경주하는 자가 모든 힘을 다하여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그것이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장차 얻을 상을 바라보고 모든 힘을 기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문을 두드리는 자들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고 외면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예수님께 하게 될 말들을 소개합니다.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그리고 그들은 결국 밖에 쫓겨나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그들 스스로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지옥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에 대하여는 먼저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분을 아는 모든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그분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장차 다가 올 세상에 관하여 소개합니다. 그곳은 결코 유대인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소개되고 있는 동서남북으로부터 오게 되는 사람들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 즉 모든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질 현상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먼저 된 자는 유대인이며, 나중 된 자는 이방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집단으로 묶어서 해석을 하게 된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자칫 유대인들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극히 개인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일부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못하게 되고, 또한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영접하여 구원을 받게 된 상황을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로 예를 들었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집단에서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현상들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서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