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부담을 줄 수도 있었으나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서든지 우리가 사람들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었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다정하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혼까지도 너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소중하였기 때문이라.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해산의 고통을 너희가 기억하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며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였노라. (살전2:6~9)
우리는 가끔 교회 내에서 전도 행사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한 자들에게는 커다란 상품을 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전도하고, 어떤 사람은 행사 기간 동안 수백 명을 데려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전도가 즐겁다고 말하며,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의 전도 방법들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전하는 사람의 탁월함도 있겠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는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사귈 수 있고, 사업이나, 사회생활, 복지 등 다양한 방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전도자들의 모습들을 생각했을 때 그것이 과연 권장할 만한 방법일까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러한 모습들은 전도자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시대와 문화가 다르다고 해서 전도의 방법이 달라지고, 불신자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전도자의 태도가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전도의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치욕”(살전2:2) “수고와 해산의 고통”(살전2:9) “복음의 고난”(딤후1:8)과 같은 말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복음을 전하는데 고난을 당한 것입니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당시의 상황이 복음에 대하여 핍박을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바울의 복음은 핍박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복음의 순수함을 고집했고,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은 저마다 세상과의 적당한 타협을 통해 자신의 길로 갔지만 복음 전도자들은 죽을 때까지 오직 복음을 고집했던 자였습니다. 그것이 핍박을 당했던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미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세상과의 타협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미 복음과 상관없는 많은 것들이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제는 오히려 복음이 아닌 것들이 바른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가지고 바른 복음을 제시하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교묘하게 고난과 핍박을 피하게 만들어 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성도들을 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언제든지 도망한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꾸준하게 있어왔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고후13:5)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곧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믿음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전도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사역에 대하여 스스로 입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에 대하여 경고하기를 “모든 일에 깨어 있어 고난을 견디며 복음 전도자의 일을 행하며 네 사역을 온전히 입증하라”(딤후4:5)고 말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복음전도자가 반드시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은 고난을 견디어 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전도자의 일에는 반드시 고난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받고 있지 않다면 자신이 가진 복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변질되었거나 거짓 복음에 속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바른 복음을 찾아 낼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비록 자신의 몸은 죄인 취급을 받고 매인 몸이 되어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딤후2:9). 변하지 않고 활동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비록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말씀은 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고난을 받게 되는 순간 복음의 활동도 멈추게 될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활동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복음은 더욱 능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야고보나 스데반이 핍박으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지만 복음은 오히려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상 많은 이들이 복음을 핍박한다는 이유로 정부나 권세들에게 대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하고 있으며, 고난을 받는 것은 오히려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13:1,딛3:1).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고난은 매우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나 기독교 단체들이 사회적인 약자들을 대변한다는 이유로 정부가 교회나 사회에 대하여 불리한 정책을 내놓을 때마가 항의를 하고, 때로는 협박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모습들은 결코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정부나 권세를 가진 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호의적이면 감사한 일이겠지만 비록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을 지라도 그들에 대하여 복종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들의 핍박에 대해서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감수하는 것입니까? 그것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보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고전9:17-18). 그래서 고난이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보상이 없다면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장차 주님으로부터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하는 이에게 고난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보상은 반드시 손해를 입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에 대하여 충분히 누리고, 즐기고 있다면 그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수고하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수많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다가 올 세상을 꿈꾸며, 비록 힘겨운 삶이라 할지라도 장차 받게 될 상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을 믿고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너희 자신을 살필지니 이로써 우리가 이룬 그것들을 우리가 잃지 아니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으리라.(요이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