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가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떠나가시니 보라, 어떤 가나안 여자가 바로 그 지방에서 나와 그분께 소리 질러 이르되, 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내 딸이 마귀에게 몹시 시달리나이다, 하나 그분께서는 그 여자에게 한 말씀도 응답하지 아니하시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와서 그분께 간청하여 이르되, 그녀가 우리를 따라오며 소리를 지르오니 그녀를 보내소서, 하거늘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어지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라. 그때에 그녀가 와서 그분께 경배하며 이르되, [주]여, 나를 도우소서, 하나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매 그녀가 이르되, [주]여, 참으로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질지어다, 하신즉 바로 그 시각부터 그녀의 딸이 온전하게 되니라. (마15:21~28)

 

예수님께서 발길을 향하고 있었던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방은 죄악이 성행했던 곳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방에 대하여 종종 멸망당할 도시로 비교하셨기 때문입니다(마11:21, 눅10:13-14). 그 도시에서 만난 가나안 여인은 어찌 보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여인은 예수님께 다가왔고,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딸은 마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간청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여인을 개취급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전혀 예수님답지 않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누구보다 어려운 이웃들에 대하여 사랑하시는 모습들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전에도 이방인들을 포함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자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떤 교훈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 어떠한 자세로 다가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처지를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참으로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스스로를 개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이 마귀에 들려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딸을 살리기 위한 어머니로서의 간절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주었던 행동은 매우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처지를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정직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 이방인들에게 대하여 개와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들과 결혼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것조차 수치스러워 했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이 여인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말씀을 들어야 하고, 영접해야 하며, 후에는 간증과 침례를 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어 만찬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있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하여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백이 있기 전에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긍휼을 구했던 여인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간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딸을 위해서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간구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고, 고통스러울 만큼 힘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조롱하였을 것이며, 심지어 예수님을 포함한 유대인 제자들조차도 그녀를 귀찮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자신의 딸을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세였습니다. 결국 그녀의 기도는 예수님에 의해 응답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니 어떠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낮추고, 내 안에 담긴 모든 욕심들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모든 것들을 버리고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들은 물질을 구하고, 세상에서의 영광을 구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들도 믿음 안에서 신실한 자녀가 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출세를 위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또한 좋은 곳에 취직이 되기를 바라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은 정직하게 표현한다면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기도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셨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결국에는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차적인 기도의 대상은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오히려 돌을 던지는 자들을 보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합니다.

 

대부분의 기도하는 자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기복신앙인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가장 위험한 기도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을 종교로 둔갑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기복신앙에 근거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고, 종교가 자신들에게 형통한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속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종교를 이용하여 처음에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지만 마지막에는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최종 목적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 땅이 결국 멸망당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날들을 위해서 수고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결국 여인의 요구가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에게서 진정성을 보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간절했고,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한 여인의 마음은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질지어다”라는 대답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응답이 없음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때때로 좌절하게 만들며, 영적으로 침체되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요구는 그들로 하여금 진정성을 보시기 위한 것입니다. 진실로, 또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선다면 그의 기도는 응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어도,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즉 한 번 찔러나 보다는 심보로 기도한다면 그러한 기도가 응답될리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오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때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진심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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