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배에 오르신 예수님은 무리를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3). 이는 예수님 사역의 기본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일보다 가르침을 우선합니다. 충분한 깨달음과 아는 지식을 통하여 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도록 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한 거듭남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스마엘이고, 또 하나는 이삭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종이었던 하갈의 아들이었고, 이삭은 본처였던 사라의 아이였습니다. 바울은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3)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육체를 따라 난자는 유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육체로부터 난자는 구원과 관계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육신의 안위와 부요함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가고, 그 일들을 위해 희생을 하고 있는 교인들은 결국 스스로 지옥 자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가 은혜를 힘입어 이삭을 낳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거듭나고 자녀 된 삶을 산다면 그는 약속의 유업을 보장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라와 하갈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라는 약속을 받았고 하갈은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워야만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말씀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물을 깊은데 던질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5). 그리고 그 말씀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말씀을 듣는 일보다 우선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은 거짓선생들이 교회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다보면 믿음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심방, 의식 등을 먼저 배웁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가지 않아 실족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약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과연 나는 구원을 얻은 자인가? 내가 오늘 죽는다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결국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약속을 받아야만 합니다. 내 죄가 사해졌는가? 나는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가? 나는 과연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자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말씀을 들음으로 분명한 믿음(약속)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믿음으로부터 즉 약속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지는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심방이야말로 의미가 있고, 보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간 배는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어부들은 좌절과 허탈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보장받지 못한 새로운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부들의 사이에 예수께서 찾아오셨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믿음 있는 새로운 항해를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실패와 좌절과 낙심 중에서 예수님을 만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한 번도 마음이 곤고해 본 적이 없는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마19:24). 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무들은 밤새 수고했고 예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하실 때 순종할 수 있는 낮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낮아진 자를 찾아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