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제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자살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은 적이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살의 문제를 구원의 문제와 연관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디에도 자살의 문제를 구원의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이 자살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살을 하면 지옥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거나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성경을 펼쳐서 자살과 관련된 구절을 보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자살의 문제를 특별하게 다룬 기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규정지어 설명하는 구절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안에서 보는 자살
먼저 구약 성경 안에서 자살을 택한 경우를 살펴보면 한 여인의 맷돌 한 짝에 두개골이 깨진 아비멜렉이 자신의 병기 드는 청년을 불러 여인에 의해 죽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나머지 그 청년의 칼에 의해 죽는 것을 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삿9:53-54). 그는 비록 악한 자였지만 자신이 명예롭게 죽는 것을 택한 자입니다. 이와 비슷한 죽음을 선택했던 자들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은 채 죽어가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 죽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자기 칼에 엎드려 죽었던 사울 왕과(삼상31:1-6), 다윗을 대적하여 일어났던 압살롬의 고문으로 자신의 계략을 인정하지 않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던 아히도벨(삼하17:23), 그리고 자신의 군대가 자신보다 군대장관 오므리의 말을 따르고 도시가 함락되자 궁궐에 불을 놓고 죽었던 시므리 왕(왕상16:15-20)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에 비하여 삼손의 이야기는 자살의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었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간 이후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눈이 뽑히고, 놋 족쇄로 결박당하고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머리털이 밀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머리털이 자라고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신전의 두 기둥을 붙잡고 무너뜨리자 삼손과 그곳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삿16:15-31). 삼손은 자살하면서 결국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았을까요? 예! 그는 성경이 믿음의 사람으로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히11:32). 그는 자살이 반드시 지옥으로 갈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리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자살은 하지 않았지만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을 하기 원했던 욥의 경우도 구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자살의 유형으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욥7:15-16). 사람이 극단의 상황에 처하면 자살에 대한 충동을 느끼는 것은 욥과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욥1:1)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 안에서도 자살을 하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넘겨줄 자이며(마26:16,46막14:10), 마귀가 그의 마음을 움직여 이 일을 시행하도록 했다는 점(요13:2)을 들어 그의 자살조차도 마귀에 의해 조정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그가 자살하는 장면을 보면 결코 이 일이 마귀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결박당하여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결박당하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은 서른 개를 수(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가져다 주며 자신의 입으로 “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하여 넘기고 범죄하였다”고 고백하고는 은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마27:1-5). 그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결과로 자살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 안에서 자살의 또 다른 유형을 찾아 본다면 빌립보 감옥에서의 일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와 찬양을 할 때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며 즉시 문이 다 열리고 사람의 결박이 풀리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때 잠에서 깬 간수가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가 도망한 줄로 생각하여 칼을 빼어 자살하려고 했을 때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몸을 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행16:25-28). 그는 죄수들이 탈옥을 하게 되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을 택한 것입니다. 그의 자살은 바울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오늘날 이러한 자살의 형태는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경 안에서 자살에 대한 부정적 대답을 얻고자 하는 시도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자살에 대하여 인정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자살을 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 자살을 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구약의 율법 가운데 “살인하지 말라”(출20:13)는 명령을 듣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가 타인에 대하여 살인을 행하는 것만을 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한 살인도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통하여 엄격히 제한된 것입니다.
신약 성경 안에서는 자살을 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 안에서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수없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형제를 미워하는 것조차도 살인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요일3:15). 그러나 이러한 규정을 가지고 단순히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도덕적인 관점에서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안에서 자살을 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들의 신분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다”(고전6:20,7:23)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통하여 교회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교회”(행20:28)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이 자살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소유에 대한 입장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서신을 통하여 “너희는 택함받은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개역. 소유된 백성 a peculiar people)이니”(벧전2:9)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a peculiar people”의 의미는 재산적 가치로서 특별한 소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특별히 소유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은 우리의 몸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6:19). 그런데 만일 우리의 몸을 스스로 해치고 심지어 살인을 하게 된다면 이는 명백한 하나님의 소유를 훼손시키고, 결국 그분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경우를 통하여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닭 우는 소리와 함께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울면서 회개하고(마26:69-75), 결국에는 주님을 위한 그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비록 자신의 잘못을 알고 깨달아 돌이키고자 했지만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말았습니다(마27:1-5). 우리는 인생에서 힘겨운 순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대응 자세에 따라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부디 매 순간마다 지혜로운 결단이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