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에서 한 개인의 일생이 가장 평탄하고 행복했던 삶을 살았던 사람을 말하라고 한다면 이삭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유능하지도 않았고, 지도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의 인생에 특이한 경력을 내세울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호칭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일생을 살았던 자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였습니다. 그의 인생을 통해 행복한 인생에 대한 비결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가 되던 해에 아들을 낳고 붙여진 이름입니다(창21:1-5). 이 이름은 사라가 자신의 몸에서 설마 아들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으로 인하여 처음 발생이 된 것이기도 하지만(창18:9-15),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그의 아들을 이삭이라고 지음으로 그의 인생에 대한 기대와 예언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삭은 그의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었고, 또한 그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이 땅에서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그의 행적들을 통해서 그가 어떠한 인생을 살았는지를 살펴봅시다.
그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은 부친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결박하고 제단에 올려놓아 제사하려고 할 때까지 어떠한 저항도 없이 그대로 따르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창22:2-13). 많은 사람들은 그의 나이가 철부지 어린 아이였을 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최소한 16-25세 사이로 스스로 판단하고, 또한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성숙한 상태였으므로 그의 행동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매우 순종적이며, 온유하고 겸손한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보리 언덕에 오르시는 순간까지 어떠한 저항이나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인류를 위한 제물이 되시기 위해 스스로 어린 양이 되셔서 말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이삭의 모습은 바로 갈보리 산위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성품은 곧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40세가 되었을 때에 리브가와 결혼을 하였습니다(창24:67). 매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리브가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어머니 사라가 죽은 이후로 계속해서 슬픔 속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얼마나 심약한 성품을 지니고 잇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결혼이 스스로의 결정이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의 종이 명령에 의하여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그의 아내가 될 여자를 찾아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매우 무능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삭이 현대인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결코 주목받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당대에 거부로 지냈던 자였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까? 그는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능을 알고 있었고, 분수에 맞게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능력 이상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 드러났을 때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될 것이며, 마귀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각 사람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롬12:3).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부족하면 부족함을 주님께 고백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삭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무능함을 보였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은혜를 더하셨습니다.
그의 무능함을 대표할 수 있는 사건은 그랄 지방에 거하는 중에 그가 부자가 된 것을 시기하는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우물을 메우는 사건입니다. 그는 세 차례나 우물을 파고 그곳에 정착하려 했지만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랄의 목자들에게 우물을 양보하고 다시 다른 곳에 우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인내심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얼마나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피하면서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에게 더욱 많은 것을 더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의 행동은 무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약함은 결국 더욱 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고, 주님은 이러한 이삭의 모습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겸손함으로 자신의 약함을 나타내는 자입니다.
이삭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낸 두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흉년을 피하여 그랄지방에 거하는 중에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이는 장면(창26:1)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이가 많아서 아들에게 축복을 해 줄 때에 장자였던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축복을 했던 것입니다(창27:1-28:4). 그러나 이 두 가지 사건을 보면서 왜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을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완벽하게 수습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아비멜렉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했으며,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아비멜렉이 아무도 리브가를 탐내지 못하도록 조치를 했으며, 에서가 축복을 빼앗기고 야곱을 죽이려 할 때 야곱을 불러 다시 축복하고 그에게 이르기를 밧단 아람에 가서 외삼촌 라반의 딸에게 장가들라 하며 보냈습니다(창27:28:1-4). 그는 무책임하게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수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180세까지 살다가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창35:28-29). 그의 인생은 무색무취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인생이 보통 사람들보다 나은 것도, 부족한 것도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렸던 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도 없었으며,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며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겸손과 온유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주어진 삶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이러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