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힘겨운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이 일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지만 넘어지고 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적으로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며, 이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멈출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내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이 일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답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심이 가깝기 때문입니다(8).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들은 대부분 이 문제에 대하여 억지로 성경을 풀다가 발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 유일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일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희망이 없습니다. 아마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 것인가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대환난이 있기 전에 오실 것인가?(전천년설) 아니면 대환난이 끝난 뒤에 오실 것인가?(후천년설)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심지어는 상대방에 대하여 비방을 일삼는 경우를 목격하기도 합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함으로서 성경 자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자체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인내로서 기다리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오심을 생각하면서 인내하고,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대환난이 있기 전에 오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여전히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수많은 유혹과 핍박으로부터 인내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후전넌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교회와 성도가 힘겨운 대환난의 시기를 거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욱 혹독한 시련으로부터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주어질지에 대하여 사람들의 주장은 각각 다르겠지만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은 결코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들 모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인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서로 불평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9). 왜 사람들에 대한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실망과 또한 인격을 존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르면 모두 틀렸다는 생각들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 분쟁을 만들어 낼 것이며, 그것은 불평으로 이어질 것이고, 결국 인내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 것입니다.
야고보는 인내를 위해 선지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10). 그 가운데 욥의 인내는 가장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11). 그는 참기 힘든 가정의 몰락과 사람들의 모욕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주님을 신뢰함으로 주님의 음성과 약속을 받았고, 결국 주님의 긍휼을 입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오직 주를 향해 눈을 고정하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바라보는 삶을 산다면 그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