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율법에 대하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신학자들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율법이 폐지되었느냐? 아니면 존속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서부터 심지어는 복음의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아예 구약 성경 전체를 볼 필요조차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말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은 복음적인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곧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5:39). 그러므로 율법을 이해하고 특성을 알아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교리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마치 악한 것처럼 인식이 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리(doctrin)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교회는 바로 건건한 교리 위에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율법과 건전한 교리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살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1. 율법의 선생들
초대교회는 주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나 요한 바울 등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복음 전도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그만큼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 전도자로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을 쓰셨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볼 때 당연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딛1:10)
그들은 유대인의 생각으로 율법을 지키도록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할례를 행하도록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었지만 이방인들에게도 행하도록 가르침으로서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할례가 이방인들에게 해당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속여 자신의 생각대로 성경을 가르치며 헛된 말을 했습니다. 이 일은 비단 그 당시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골2:18)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딤전6:4)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이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보다는 각종 철학과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앞세워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의 특징은 논쟁과 말다툼을 좋아하고, 시기와 다툼과 욕설과 악한 추측을 함으로서 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을 낳게도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학문으로 무장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일보다는 논쟁거리에 관심을 두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즐겨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고, 사람들을 지식으로서 종교인들을 만드는 작업을 쉴새없이 지속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우상과 같이 취급받기도 하지만 실상은 복음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생은 언제나 겸손할 줄 알며, 생각과 논리보다는 주님의 말씀으로 먼저 본을 보이며, 사랑으로 권면할 줄 아는 자입니다. 이 시대에서 올바르게 지도해 줄 선생을 찾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율법의 존재 이유
어떤 이들은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사실만으로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에 대하여 결코 악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율법 그 자체는 매우 선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편 19:7,8)
다윗이 증거하듯이 율법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율법의 이러한 본성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상실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더 이상 온전하지 않으며,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 신령하기까지 하다고 말합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로마서 7:12-14)
율법 자체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습니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환경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율법은 주인 노릇을 했지만, 오신 후로는 다시 종의 신분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종(하갈)의 아들이었지만 약속된 아들 이삭이 나기 전까지는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나온 이후로 그의 신분은 다시 종으로 되돌아갔습니다(갈 4:21-31)
이와 같이 율법도 약속된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주인 노릇을 했지만,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그의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결코 악하지 않으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종의 신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율법이 하는 일
율법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율법과 우리와의 관계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직도 율법은 우리와 관계가 있으며 매사에 삶의 기준이 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위치를 가르쳐 주는 유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죄인 됨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로마서7:7)"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알게 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영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율법은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므로 우리가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데 더욱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 4:15)"
율법은 그 자체가 의로운 까닭에 죄인 된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까닭에 율법과 우리와의 관계는 언제나 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로새서2:14)"
우리가 율법을 두려워하듯 율법 또한 그의 의를 증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우리의 죄들을 고소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도록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한복음 5:45)"
율법은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의 의로움과는 관계없이 죄인 된 우리들과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도 어떤 이에게는 악법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얼마 전 미국에서 담배를 마약으로 규정하고, 피해자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이 만들어졌을 때 대다수의 국민들은 좋은 법이라고 찬성하지만 실상 담배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주는 악법이 된 것입니다. 율법도 분명히 선하고 의로운 것이지만 죄인 된 삶을 사는 우리들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2) 율법이 하지 못하는 일
율법은 우리를 정죄 함으로 심판에 이르게 하지만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2:16하)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3:11)"
심판을 받게 하되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율법의 변명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로마서8:3상)"
율법은 죄 앞에서 강한 자와 같지만 실상은 구원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에 법이 있습니다. 그들의 법이 보다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해 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실상은 더욱 많은 죄를 생산해냅니다. 심지어 미국이 인간과 인격존중, 곧 인권보호라는 명목으로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남자와 부모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법으로까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실상 이러한 법들이 본래의 목적과 취지에서 벗어나 가정파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과반수 이상의 부부가 이혼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미덕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은 이미 무차별로 외국의 문화를 수입해 오고 있는 한국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법은 오히려 더욱 많은 죄를 양산해 낸다는 사실은 오늘의 현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며,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본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고 심지어 믿는 이들까지 잡아들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법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법은 교묘하게 더욱 많은 죄를 짓도록 유도합니다. 또한 죄에 대하여 합리화시키려는데 혈안이 되기도 합니다. 율법에 대한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강조해서 설명하자면 결코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 율법은 마쳤다
우리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계속하고 있는 율법, 우리를 심판의 길로 안내하지만 정작 구원에 대하여 아무런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율법, 이 연약하고 무익한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살리는 법을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종지부를 찍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4)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율법이 곧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시면서 죽으심과 함께 율법 또한 죽게 된 것입니다. 정죄만 있는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구원할 수 없는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구원할 수 없는 율법을 더 이상 이 땅에 두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브리서7:18-19)"
율법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지금도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더욱이 율법의 목적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것에 대한 준비였으므로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율법은 그 의무를 다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실 수 있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은 그의 역할을 모두 끝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새언약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일부 사람들의 오해를 푸시기 위해 결코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 5:17)"
율법이 마쳐지게 되면서 새 언약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그 자체에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율법은 영원한 미완성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율법은 완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율법의 역할은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언약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브리서8:13)"
옛것(율법)이 없어져 가면서 새 언약은 만들어져 갑니다. 새 언약은 그 동기부터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옛 언약(율법)은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새 언약은 구원을 얻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옛 언약(율법)은 끊임없이 제물을 요구하지만 새 언약은 오직 은혜로 구원 얻음을 원칙으로 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2:5)"
율법은 끊임없는 행위가 요구되어지지만 새 언약(복음)은 구원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2:8) "
새 언약(복음)의 선물의 범위는 무한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들을 몰아내고 성령으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합니다(갈 5:22-24). 율법이 연약하여 육신이 죄에 빠지는 것을 지켜 볼 수밖에 없지만 새 언약(복음)은 그곳에서 나오도록 권면할 뿐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나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복음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행복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완성해 놓으시고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분 안에서 누리기만 하면 되는 삶을 보장받았습니다. 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으며, 더 이상 죄로 인해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오직 주 예수님만 바라보는 복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건전한 교리
건전한 교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바울에게 맡긴 복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딤전1:11). 그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다른 교리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 그리고 느낌만을 가지고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건전한 교리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4:6)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딤후1:13)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1:9)
바울은 디모데가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기준은 당연히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역자가 열심을 낸다 할지라도 바른 교리를 가지지 않은 자라면 그는 결코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으며,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들로 인하여 부패될 것이며, 결국 분열되는 참혹한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님의 일을 능력 있게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수많은 유혹이 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의 교리를 흔들기 위해 사탄은 끊임없이 그를 공격할 것입니다. 사역자는 건전한 말씀의 틀, 즉 바르고 선한 교리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흔들리게 된다면 그는 곧 무너지게 될 것이며, 그의 목양하는 교회도 더 이상 주님의 교회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모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4:3)
사람들은 건전한 교리들에 대하여 매우 힘들어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속성이 죄를 좋아하기 때문에 건전한 교리를 통하여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면 그들은 자연히 거부하려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신을 만족하게 만들어 줄 선생들을 찾아 나설 것이며, 바른 교리를 가르치려 하는 사역자들에게 적당한 타협을 시도할 것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4:13).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딛2:1-2)
사역자들의 가장 큰 임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맑은 정신을 가지게 할 것이며, 매사에 신중하게 처신할 것이고, 절제할 줄 알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서 건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반대로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지 못한다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훈련을 하고, 훌륭한 교육을 한다 할지라도 결코 온전한 믿음의 생애를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역자들은 건전한 교리를 통하여 바르게 양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3-5)
바울은 심지어 바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을 더 이상 가르치려 하지 말고 떠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강력하고 권고하고 있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리 좋은 지식을 가르친다 할지라도 결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구조가 철저하게 목회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목회자가 떠나라는 것이 이해가 되는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당시 에베소 교회가 각 가정을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떠나라는 말이 더 이상 이상한 명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역자는 바른 교리, 즉 성경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과 깊이 교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거짓 진리, 혹은 거짓 교리를 가르치려 할 것이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에는 핍박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맞설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복음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로부터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거짓 교리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오직 성경만을 기초하여 바른 교리로 경건한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