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를 제어하기

조회 수 229 추천 수 0 2024.10.26 08:10:55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18:21)

 

뱀의 혀는 두 개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는 이중적 성격, 혹은 이중적인 말, 즉 거짓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혀에 대하여 말하기를 배의 키, 불로 표현하면서 그의 인생이 혀에 의해서 좌우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3:1-8).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3:10)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만 하와는 만지지도 말라고 말함으로서 사탄의 접근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결국 작게 보이는 거짓말이 인류를 죄의 후손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거짓말의 가능성조차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중적 생활은 이미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과 밖에서의 생활은 현저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결국 사탄의 공격 목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뱀이 두 개의 혀를 가진 까닭에 사탄의 사역을 대신했듯이 이중적인 삶과 거짓을 일삼는 성도는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탄의 조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사두개인 등은 예수님 당시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준수한다는 자들이었지만, 간교한 헤롯의 정부에 아첨하고, 서민을 착복하며, 자신의 배만 채우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공모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중적인 삶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아주 위험합니다. 진리의 말씀 위에 삶을 온전히 가꾸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을 통해 혀의 이중성에 대하여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3:4-12). 야고보는 우리 가운데 있는 혀가 비록 작은 지체이지만 매우 중요하고도 강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혀가 배의 키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작은 불과 같은 존재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배의 키는 항로를 따라가도록 운전하는 것입니다. 만일 키가 없다면 배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제 멋대로 가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거친 풍랑을 만나도 배의 키를 잡고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따라 항해할 수 있습니다. 혀는 바로 우리의 인생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혀는 우리의 인생 항로를 따라 갈 수 있도록 인도하며, 아무리 거칠고 험한 인생 가운데서도 우리를 안전하게 이끌어 가는 지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혀는 작은 불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의 존재에 관하여는 많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발명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발명으로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불이 없다면 이 지구상에 사람들은 수많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지탱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불은 매우 작은 불 하나로 만들어 집니다. 우리의 혀는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입은 역사를 만들어 내며, 매우 놀라운 힘을 가지고 전 세계를 흔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불의 힘으로 평안과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세상의 역사도 혀의 힘으로 평화와 전쟁의 역사를 경험해 가고 있습니다. 혀는 우리 가운데 있는 가장 무서운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혀의 존재를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매우 심각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이들이 한 입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며, 한입으로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저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른 믿음의 삶을 사는 자들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샘이 같은 곳에서 단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낼 수 없듯이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없듯이, 짠물이 단물을 낼 수 없듯이 한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뒤로는 사람들을 저주하는 행위들은 결코 온전한 입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듯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존중하고, 친절하며,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났다는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인식을 하고 있습니까? 야고보는 그들을 대하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대하듯 말에 있어서도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형제를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면 그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원하는 자라면 당연히 모든 이들에 대하여 사랑의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언제나 말에 신중함을 더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말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과 행위를 외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 바로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의 말만으로 그들의 믿음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위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는 많은 속이는 자들이 말로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3:3)

 

말이라는 것은 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야고보는 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곧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인데 그것이 순종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적용이 된다면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순종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말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매우 의미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에서 일단 말을 하게 되면 최선을 다해 그것을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지켜야 하는 것이 그들의 자존심이나, 관념으로 볼 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생각의 제한을 가져다주게 될 것이며, 또한 합리적인 타협을 거부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의 이러한 현상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상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말을 자제 할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 있는 비결임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말없이 순종했던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충격적인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100세에 얻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황당한 명령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장작을 준비하고 아들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들을 죽이기 위해 칼을 집어 들었습니다. 결국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인정하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침묵은 결국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황이 불리해 질 때마다 수많은 변명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리고 많은 말들을 함으로서 스스로를 더욱 어려운 처지에 이르도록 만드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베드로일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수없이 장담을 하고 큰소리를 쳤던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에 대하여 말씀 하실 때도 같이 따라 죽겠다고 하는가 하면 배반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과 더불어 죽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이후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위대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서 낮아진 자아를 발견하고 겸손함으로 사도와 제자로서의 일을 잘 감당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말은 삶을 위대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또한 부끄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말은 그의 인생의 방향을 가늠할 만큼 중요하며,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권면을 통해서 우리의 말, 즉 혀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한번 인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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