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온유하사 나귀 위에 앉으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하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21:5)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한 곳으로서 기드온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곳입니다. 그 중 벳바게라는 동네에서 예수님으로 입성할 채비를 갖추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야말로 제자들에게 있어서 터무니없거나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대언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대로 행하시는 일 중에 하나였습니다. 마태복음 21장의 내용에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의미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 데 이를 재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을로 내려가서 나귀 새끼를 나귀와 함께 끌고 오라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명령은 너무도 터무니가 없으리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절도범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치며 따랐습니다.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폈고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를 따르는 무리는 소리를 지으며 예수님의 뒤를 좇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입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진리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심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함께 끌고 오라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인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주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져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이 가져오고자 한데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깨닫게 하기 위한 데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가 쓰시겠다 하라"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 주권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주권은 창조주로서 실제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예수님 자신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데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주님이 주인이라기 보다는 내가 주인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 집, 내 생명, 내 재산, 내 모든 것 등이 모두가 내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나귀를 가져오라 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그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것은 우리 인간들의 손에 의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니지만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 되심으로 옮겨 다닌다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진정한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만 의지하고 그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왕임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사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이집트 왕 파라오에 의하여 군림 당하고 착취 당하여 그 백성은 억울함과 슬픔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그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사람이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매우 힘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왕은 통치 기간이 별로 길지 못함을 감안할 때 더욱 더 그러합니다. 주님은 자신이 왕 됨을 나타내시는 방법으로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 가 있습니다. 주님의 왕 되심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되어질 수 있겠지만 먼저 평화의 왕 그리고 공평 다정의 왕 또한 겸손의 왕임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의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왕은 군림과 착취로 억압하지만 예수님은 행복과 기쁨을 주시는 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 됨은 오히려 그 백성을 위하여 희생하는 데에 그 가치와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왕이 되시며 섬기시려고 하는 모습은 우리가 다시 한 번 예수님을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그 모습이 매우 초라하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하여 발이 질질 끌리고 마치 오늘의 거지 대장과 같은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만은 존경과 경배를 드렸고 그 무리들도 최고의 경배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은 결코 외적 권위에 있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은 범사에 예수님에 관하여 생각할 때에 체험과 그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최고의 왕이심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백성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외적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다면 아무도 예수님의 뒤를 따를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속에 함께 하실 때에 외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다만 주님은 우리에게 내적인 믿음 속에서 순종하고 따름으로 진정한 왕 되심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의 모습을 가지고서 그 뒤를 좇는 성도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