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곳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때마다 항상 가슴 아픈 사실은 좋은 장소, 행사, 이미지 연출 등에 관하여 많은 자료와 아이디어를 공급하고 있지만 복음의 진정한 목적인 '영혼 구원'에 관한 것은 뒷전이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건물과 많은 회중이 운집해 있는 가운데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진리가 결여되어 있다면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 적인 교회는 언제나 장소를 초월합니다. 성공적인 사역은 한 영혼, 즉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데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많이 모이다 보면 그 중에 몇은 구원받을 자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들고 있는 삯군 목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진리에 비추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진리를 가진 자만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 얻을 자가 많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을 수 차례에 걸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찾는 이가 적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것을 추구하고, 힘의 논리로 자신들의 부패와 비 진리를 정당화시키려는 거짓 목자들을 분별해 낼 수 잇는 눈을 열어야 합니다. 부디 이 말씀을 통하여 큰 것을 사모하는 자들의 멸망과 작은 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얻는 복을 성경을 통해 발견함으로서 보다 성숙한 성도로써 결실을 맺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작은 것에 실패한 롯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 지방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갈대아 지방을 떠나지만 그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이 함께 동행함으로 그의 순종의 길에 막대한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기까지 머물러야 했고, 조카 롯으로 인해서 재산으로 인한 내분을 겪게 되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양보함으로서 가족 관계를 청산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은 롯이 거주하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로 하셨고, 이를 아브라함에게 알리시고, 협상을 벌여 10명의 의인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노라고 하셨지만, 결국 10명의 의인이 없어 심판 당하게 됩니다. 심판에 앞서서 두 천사는 롯을 방문하였고, 멸망의 사실을 알리면서 피할 것을 명하지만 사위들은 이를 농담으로 여겼고, 롯의 가족들조차도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서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 나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롯은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받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뒤에 그가 이르되 도피하여 네 생명을 보존하라 뒤를 돌아보거나 이 온 평야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네가 소멸될까 염려하노라 하니"(창 19:17)
뒤를 돌아보지 말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신앙은 곧 죄 사함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상태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난폭한 강도라 할지라도 현재 그가 그리스도인 된 삶을 살고 있다면 그의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과거의 시절을 회상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면 구원에 이르기 전에 멸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분명 천사들의 손에 이끌리어 멸망의 성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소돔과 고모라에 마음을 두고 있었고, 결국 뒤를 돌아본 결과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과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의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아니 달라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최상의 삶을 위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들에 머무르지 말라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착각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 한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서 넉넉하게 주실 수 있으신 분이지만 예수님과 제자들, 전도자들의 모습을 보아서는 부자로 넉넉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복(복을 비는)신앙을 추구함으로써 거짓 목자, 거짓 선생들에 의해 농락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배당에 앉아서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림으로 복을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생활의 대부분을 교회 생활에 봉사함으로써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자 베드로는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생활하자는 제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고 세상에 내려가 사역을 계속합니다.
어느 곳이든지 머무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나그네로서 살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절대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항상 길을 재촉하고 그의 최종의 목적지(천국)에 다다를 때까지 바쁘게 움직입니다. 머무른다고 하는 말은 게으름, 안일, 나태함으로 대표되는 말입니다.
롯의 가족에게 들에 머무르지 말라는 것은 심판을 피해 길을 재촉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머무르려 한다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함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여정에서 세상에서 마냥 머물고 있다면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천국 시민된 성도들은 부지런히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산으로 도망하라
성경에서 산은 언제나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시내산, 시온산, 갈멜산, 모리아산 등 대부분이 하나님이 임재하신 장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이 친히 쓰신 십계명 돌판을 얻어 왔고,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불이 내려오는 시험을 하다가 하나님의 기적과 음성을 들었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드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산이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 구별된 장소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산에 오르셔서 가르치셨습니다(마 5:1, 24:3)
그래서 산은 세상과 구별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며, 말씀이 있는 곳으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들에 의해 이 산이 잘못 오해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몇 해전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소동이 났을 때 일부 사람들이 가정을 버리고 산에 올라가 집단 생활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는 곳 ! 그곳이 바로 산이며 모든 성도들은 이 산으로 모여야 합니다. 이 산으로 오르는 자만이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소알성으로 간 롯
롯이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나와서 산으로 가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작은 성(소알)으로 가겠다고 간청합니다. 산으로 가면 죽을 것 같고 성에 가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롯의 말에 사실은 그 성조차 멸망시키기로 작정된 성이었지만 멸망시키지 않고 롯이 안전하게 가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고 롯은 안전하게 피한 듯 했지만 그곳에서 두 딸과 함께 동침함으로 아이를 낳아 모압과 암몬의 조상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소알성이 이미 멸망시키기로 작정되었다는 말은 곧 죄악이 만연했던 성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롯이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성이기 때문에 멸망을 면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간청했고, 멸망을 면할 수 있었지만 근친 상간의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고 -이는 소돔, 고모라성에 만연한 동성애보다 더욱 심한-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끊임없이 적대적 관계를 가진 민족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결국 작은 것을 소홀히 했던 롯은 더욱 큰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의 자식들을 낳고야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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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말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작은 죄들을 용납한다면 사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쓰러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죄에 대하여 까지 피흘리기까지 싸워 이기려는 자세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의 의지대로 하려는 롯과 같은 자세를 버리고 명령을 따라 산(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올라 풍성한 삶을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은 계속 강조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롯의 생애가 작은 것을 소홀히 해서 멸망의 길을 가게되었지만 또한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김으로 복을 받는 일도 성경에 무수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를 쪼개지 않은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하시면서 삼년된 암소와 암염소,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제사할 때 모든 것의 중간을 쪼갰으나 새를 쪼개지 않으므로 솔개가 시체 위를 날아들었고, 아브라함은 솔개를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나 새를 쪼개지 않은 이 작은 일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 이방의 객이 되어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창19:13).
어떤 죄의 모양이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물 되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큰 죄는 용서받고, 작은 죄는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죄의 모양이라도 드러내어서 씻음 받기를 원하십니다. 온전한 드림이 있을 때에 솔개(사탄)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곁에서 공격할 목표를 찾고 있음을 생각하십시오.
큰 가치를 지닌 보리떡과 물고기
예수님께서 모인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줄 것에 대하여 말하자 빌립은 이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 :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먹이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안드레는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가져와서 우리에게 가진 것이 이것뿐인데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느냐며 낙심 어린 눈으로 예수님과 도시락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보리떡과 물고기가 든 어린아이의 도시락으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를 남겨서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영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 말씀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사람들이 눈으로 볼 때 작은 가치를 지닌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지만 주님의 눈에는 큰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작은 것들을 통하여 크고 위대한 일들을 행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대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변화시킬 하나님의 사람을 유명한 정치인, 경제인, 종교 개혁자가 아니라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삶의 변화를 가져가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작아 보이는 성도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천국 비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천국에 대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 비유의 공통점은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에서는 기름 준비하는 것, 달란트의 비유(25:14-30)에서는 한 달란트를 관리하는 것, 양과 염소의 비유(25:31-46)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달란트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가진 자가 다른 종들보다 적게 가졌다고 해서 소홀히 관리되었다면 지옥 불에 들어갈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양과 염소에 대해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45)고 말씀하심으로 작은 자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작은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성경 곳곳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루하루 시간을 쪼개어서 말씀으로 심령을 채워 가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 같지만 주님 다시 오실 때 신부로서의 준비하는 첫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가진 달란트(재능, 은사)를 최대한 사용하여 많은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이는 하늘에서 우리의 상급을 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사랑으로 관심을 가지고 피차 나누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헌금과 눈에 보이는 엄청난 일들을 해 놓는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서 열매맺어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작은 일을 소홀히 하는 자가 결코 쓰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지극히 작은 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라는 표현을 써서 자신이 지극히 부족한 자임을 고백했습니다. 작은 것을 생각하는 이들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자는 교만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부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낮아진 자세로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