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악을 이기라 3(롬12:14-17)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우리를 핍박, 즉 박해하는 자들에 대해서 축복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들에 대해서 축복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참고 견디는 인격적 변화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이일을 행하고자 한다면 시선을 바꾸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해는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 땅에서 얻어질 이익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박해는 당하는 자는 그들과는 달리 시선을 하늘에 고정해야만 합니다. 비록 누군가가 엄청난 고통을 가져줄지라도 이 당에서 잠시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시선을 하늘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떠올리십시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가 박해를 받았을 때 취할 수 있는 말과 행동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공동체 생활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취향이 존중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이 상대방을 위한 배려와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매우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에 대하여 익숙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교회는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모든 성도는 한 가족이면서도 그분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한 몸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형제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는 주님이 교회에 한 몸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주님의 몸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행함에 있어서 그들과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기에 힘써야만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이 현대인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음에 대해서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열어놓고 상대방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하기 위해 힘써야만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으로 섬기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면 그는 결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그가 어떠한 자리에 있든지 섬기려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오늘날ㄹ 이미 많은 교회나 단체들이 계급을 정해두고 운영하는 경우들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가 섬기는 자세를 유지하도록 권면하고 있고, 또한 사람들 앞에서 낮아진 자세에서 지혜 있는 체 하지도 말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상대가 불신자라 할지라도 그들에 대해서 보복을 하거나 부정한 일을 한다면 그는 이미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수가 많아지면 그것을 권력으로 이용하려 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많아져서 그것을 권력으로 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더욱 낮아질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 세상을 향해서 더욱 선한 일에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