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교회의 조건

조회 수 560 추천 수 0 2022.10.06 06:56:40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1]

 

 

교회의 진정한 주인

 

 

 

누구나 성경적인 교회를 목회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르고 때로는 교회 안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하기도 합니다. 비록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 대다수의 교회들도 막상 성경을 가지고 철저한 검증의 절차를 거치게 된다면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서 하나님의 교회가 완전한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지역교회(Local church)는 결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나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서 보듯이 그들은 교회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많은 책망을 받아야 할 정도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1.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목회자나 성도들이 가끔 혼돈을 일으키는 것 중에 하나는 교회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재산을 두고 분쟁하기도 하며, 주인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교회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 직접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가리켜 "내 교회"(16:18)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부분의 외형적인 교회들은 목회자나 헌신적인 성도의 물질을 기초로 해서 세워집니다. 그 까닭에 교회가 그들의 소유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들의 헌신이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건물 중심의 교회는 세워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가정 교회 형태의 소그룹 중심의 교회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어찌되었든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교회는 외형적으로 규모 있는 성장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예수께서는 교회의 주인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교회를 물질로 농락하거나 오염시키는 일들을 단호하게 차단하셨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상당한 부자 중에 하나인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물질을 드렸지만 재산의 일부를 숨겨 둠으로서 교회를 농락한 결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소유주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소유 안에서 누리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실제 소유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안에 사는 자들에게 규칙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규칙에 따라 살도록 하셨습니다. 어느 국가에서나 규칙에 따라 살 때 상을 주고, 규칙을 어기며 살아갈 때 벌하듯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 사는 자들이 규칙(말씀)대로 사는 자에게는 심판 후에 상을 주시고, 또한 규칙(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 된 자리를 결코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아무리 시대와 환경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소유가 주님이신데 아직도 교회 재산을 놓고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상대방의 교회를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가 주님의 교회에 대하여 이처럼 무례한 행동을 계속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간 큰 사람입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귀하게 여기고 존중해 주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분명히 주님이 주인으로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20:28)

 

2.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사탄의 공격목표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현재 세상은 사탄의 권세 아래 놓여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다가 올 세상에서 그들의 존재는 굴복 당하게 될 것이며, 마지막으로 불 호수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재 사탄은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주님의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되어져 온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문화에 노출이 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공격해 옴으로서 쓰러뜨리고 곤경에 빠뜨립니다. 그 까닭에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깨어있으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벧전5:8). 우리가 육신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 보고, 말하고, 생각하는 활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곧 죄와 관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상과의 분리를 분명하게 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수많은 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요일5:4).

 

우리가 분리함에 있어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거짓 진리와 가르침"들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주님의 교회를 위협하는데 가장 중요한 도구로 이용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수많은 부분에 걸쳐 성경과 다른 것들이 가르쳐지고 행해지는 것들을 봅니다. 그들은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아무런 가책도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언제나 교회의 변질을 가져왔습니다. 그것들은 사탄이 가장 즐겨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본래부터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이러한 것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의식과 절기, 행사 등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성경과는 관계없는 것들을 교회 안으로 들이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습니다. 과연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의식과 절기들, 그리고 행사들은 성경과 일치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성경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대부분 사탄이 교회 안에 심어 놓은 작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교제하는 교회들은 어떠한 교회들입니까? 과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라면 모두가 교제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또한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다면 인정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이단이나(3:10), 진리에서 벗어나거나 불법을 행하는 자(딤후2:19-22)들로부터 떠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분명합니다. 먼저는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살펴보고(고후13:5), 그 후에는 우리의 주변과 교회들이 바른 믿음 위에 있는지를 살펴본 후 교제를 해야 합니다.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분리되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이들은 교회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도록 요구합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신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오히려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교회 안에 속한 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복음 안에서 살며, 전하는 자들에 대하여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고전1:18). 그러나 비록 어리석다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가 흠이 없이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3:13)

 

3.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한 때 한국의 어느 유명한 목사가 주장한 "무리의 법칙"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교회가 그 개성에 맞는 성도들끼리 모인다는 것을 염두해 두고 한 말입니다. 가령 기도하는 교회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모이고, 성경공부를 즐겨하는 교회는 성경을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모이게 되고, 구제와 봉사를 좋아하는 교회는 구제와 봉사를 필요로 하는 자들과 몸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이 모이고, 전도를 즐겨하는 교회는 자연히 전도하기를 즐기는 성도들이 모이게 될 것이고,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교회는 병자들과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들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교회가 가지는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온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모든 몸의 기능을 손과 같이 하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그를 향해 미쳤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몸의 기능은 각 지체마다 다른 역할을 하도록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몸인 교회는 각 지체(성도)마다 다른 역할을 담당하도록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고전12:14-21). 만일 성도들로 하여금 동일한 역할을 하도록 요구한다면 그는 아마도 문제가 있는 지도자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몸에 약하게 보이는 것일수록 더욱 요긴한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고전12:22). 여러분은 눈이나 입, 귀와 같은 것들이 강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러한 것들은 조그마한 상처에도 치명적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몸을 형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체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교회 안에 속한 성도들 가운데 누구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온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몸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한 마디로 생각에 따라 몸이 움직여 주는 것입니다. 만일 생각 따로 몸 따로 움직인다면 이는 분명히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하고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의 전통과 풍습을 따라 간다면 이는 분명히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오직 주님의 명령을 따라 힘 있게 운동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 지금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만일 주님의 교회의 지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반드시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결론

 

성경 어디에도 건물을 가리켜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교회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모인 성도들입니다. 비록 건물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가진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주님의 교회에 속한 자들이며, 또한 각 지체(member)입니다.

 

오늘날 현란한 교회 건물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오늘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제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 속에서 많은 회중들과 함께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듣고 경배를 한다고 할지라도 오늘 내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또한 그 안에 속하지 않았다면 그는 주님의 교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교회의 지체(member)가 되어서 살아가십시오. 이제부터 여러분은 결코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구경꾼이 된다면 우리의 교회는 불구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내가 있는 위치와 소명을 알고 최선을 다하여 건강한 믿음의 삶을 경험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 그리고 성경적인 교회를 이루어 가는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2]

 

 

 

성도의 자세

 

 

 

 

성경적인 교회의 기준을 설정함에 있어서 매우 혼란스러워 하는 이유는 성경 안에 나타난 다양한 교회의 모습들 때문입니다. 특히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들은 매우 질서가 없는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에 오늘날 다양한 모습의 교회를 형성하는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형성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신약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의 서신을 기초로 세워진 교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 자신도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며, 문제점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특히 주님은 이 일에 대하여 교회가 더욱 질서가 있기를 위해 바울을 통하여 각 교회마다 서신을 보내도록 했으며, 이 서신들이 모아져서 완벽한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 서신들을 제외한 다른 성경들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전혀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 졌던 마태복음이나 히브리서, 그리고 과도기의 상황에 있었던 교회의 역사를 담은 사도행전과 같은 서신들이 오늘날 교회에 여과 없이 적용되어진다면 많은 문제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을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8:12-17,19:1-6). 또 어떤 이들은 타언어(방언)를 말해야 구원을 얻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2:4,10:4619:6). 실제로 성경 안에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후 타언어(방언)를 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세례(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세례(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침례)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22:16). 그러나 사도행전 안에는 세례(침례)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주장할만한 구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침례)를 받고 네 죄들을 씻어 버리라”(22:16)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만으로 볼 때 세례(침례)는 죄 사함의 조건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교리에 적용하고, 주님의 교회를 형성하는 기초로 만들고자 한다면 자칫 교회는 혼란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올바른 진리 위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불러내어진 자들이 모여 있는 교회

 

성경에 교회로 일컬어진 최초의 무리들은 바로 이집트로부터 탈출해 광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7:38). 물론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모두 주님의 교회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교회라고 불렀던 사실은 상징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으로 상징되어지는 애굽(이집트)로부터 불러냄을 받아 광야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가나안으로 들어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최종 목적지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의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 누구도 스스로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주장해서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4:19,1:17,5:10). 요한이 그물 깁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4:21,1:19). 또한 마태가 세금을 걷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9:9).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있는 그를 보시고 그를 만나주셨습니다(1:45-51). 다른 제자들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누구도 주님 앞에 스스로 제가가 되겠다고 나선 제자는 없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 있다면 바로 바울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9:1-9).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다메섹)로 향했습니다. 그는 도착하기 전에 예수님을 만났고, 그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누가 먼저 다가온 것입니까? 바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십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후에 가장 위대한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부르심이 먼저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르심이 있어야 응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와 복음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먼저 다가가는 것은 언제나 종교입니다. 복음은 먼저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은혜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1:1,6-7,8:28,11:29,고전1:1-2,24,26,7,18,20-22,24,5:13,1:18,4:1,4,3:14-15,살후1:11,딤전6:12,딤후1:9,3:1,5:4,7:11,9:15,11:8,벧전2:21,3:9,17:14). 이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져 있습니다(2:8-9). 만일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 죄 사함을 얻고, 또한 주님의 교회의 지체(member)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종교를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바로 주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불림을 받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특별하고도 신비(mystery)스러운 몸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회중의 모임에 참여했다고 그가 주님의 교회에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속한 자들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몸에 연합되어야 합니다.

 

2. 오직 성경만을 기초로 하는 교회

 

많은 사람들은 참 된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토록 많은 핍박과 죽음을 당해야했는지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신실한 자들이었고, 죽음을 피하지도 않았으며, 전혀 정부에 대하여도 저항하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정부에 대하여 순종하는 자세를 가진 자들이며, 권세나 명예에 대하여 전혀 욕심을 가지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기초였으며, 무수한 핍박을 통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주님의 교회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지금까지도 교회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교회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나라들이 세워졌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단 한 번도 정치세력화를 시도하지도 않았고, 국가교회를 표방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영원히 보존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교회가 수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탄은 성경을 없애는 일을 포기하고 변질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일은 사실상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일이기도 합니다. 바로 뱀이 하와에게 교묘하게 접근하여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발견하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결국 하와가 범죄 하게 되는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3:1-6). 그것은 인류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기도 하지만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끝없이 변질 시킬 것이라는 암시가 담겨져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많은 부분에서 성경의 변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어 놓고, 진짜는 가짜로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권위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는 성경 자체를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로마서 11: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라디아서 3:22)

 

그렇습니다! 성경이 직접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말을 합니다. 그것은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 안에는 그의 인격과 생각들, 그리고 삶의 모든 모양과 방법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처럼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것입니다. 그곳에는 그분의 모든 생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이를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9:17,10:11,3:8,4:30). 어떻게 성경이 볼 수 있으며, 가두고 쫓아내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친히 말 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서서 성경을 대하는 자세는 곧 하나님의 대하는 자세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도 틀릴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과 같습니다. 비록 성경이 종이나 가죽으로 되어있지만 그 안에 담겨진 말씀들은 곧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것은 참 된 주님의 교회에 속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신앙이었습니다.

 

3. 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소망을 두는 교회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전부라면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할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전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간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전혀 행복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돌에 맞아 죽고(7:54-60), 칼에 맞아 죽고(12:2), 수많은 핍박을 당하며(고후11:23-27)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일을 멈추지 않은 것입니까? 만일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은 매우 우둔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또한 이 땅에서 극심한 핍박을 당하는 것을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22:12)

 

만일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서 뿐이라면 그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 땅에 소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분 앞에 서게 될 날을 고대하고, 그분으로부터 얻게 될 보상을 생각합니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보상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5:12,46,6:1,2,5,16.10:41,42,9:41,6:23,35,고전3:8,14,15,9:17,18,2:18,3:24,10:35,11:6,11:26,요이1:8,11:18). 보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떠한 손해를 입은 자들에게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결코 자신들이 입게 될 피해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장차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3-18)

 

오늘날 거대하게 지어져 가는 예배당 건물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해지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복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자신들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다는 자세로 예배당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를 잘 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장차 다가 올 세상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소망을 키우고 장차 주님으로부터 얻게 될 상을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만일 여전히 이 땅의 일들만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만일 이 땅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언제나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또 다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있습니까? 과연 주님으로부터 불러 모아진 무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까? 혹시 내가 필요해서, 마치 사교단체 정도쯤으로 생각하고 주님의 교회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십시오. 주님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불러 모아진 , 즉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한 몸을 이룬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나의 성경에 대한 자세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만 합니다. 여전히 성경보다 목사의 말이나 교회의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성경의 권위 앞에 자신을 내려놓으십시오. 그것은 참 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고, 거짓 진리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전히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장차 불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다가 올 세상에 소망을 두십시오.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을 고대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하루하루를 그리스도인으로서 후회 없이 살아가기에 힘쓰십시오. 이것은 성경적인 교회가 되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3]

 

 

사랑

 

 

 

그런즉 이제 믿음(faith) 소망(hope) 사랑(love)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13:13)

 

오늘날 교회관을 세워 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에 관한 것들과 소망에 대한 것들을 말할 것입니다. 믿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교회가 불러내어진 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자들이 모인 곳이므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언제나 세상으로부터 핍박의 대상이므로 소망이 없이 주님의 교회를 지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까닭에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장차 올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더불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이지 않고 주님의 교회의 지체로서 충성스러운 생애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로부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온 것이지만 사탄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아 온 것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이념과 철학으로 발전시키면서 수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으며, 오늘날에는 오히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분열상을 보이면서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1. 사랑으로 시작된 교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4-47)

 

초대교회는 물질에 대한 소유개념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였고,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했으며, 자기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대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날마다 모이며,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떡을 나누면서 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이를 사상, 철학, 이데올로기로화 시키는 이론을 만들었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들이대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들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들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가장 중요한 자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보겠다고 했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가 이토록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요? 그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이었고, 또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자신의 물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한 형제와 자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후에는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사랑(love)과 형제사랑(charity)

 

오늘날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성경에는 사랑을 love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KJV 성경은 사랑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love)과 형제사랑(charity)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형제사랑(charity)은 거듭난 성도들안에서 활동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고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혼란을 겪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해석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모든 것들을 형제 사랑으로만 해석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해석하려는 이들 가운데는 신비주의자들이 많고, 형제사랑으로만 해석하는 이들은 자유주의, 해방신학자들이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백하게 이 두 가지의 사랑에 대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요구되고 있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형제사랑(Charity)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이 형제, 혹은 자매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어야 할 사랑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에 대하여 표현하면서 얼마나 형제들과의 사랑이 중요한지에 대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13:1-3)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달콤한 말로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려 하고, 매우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을 하며, 심지어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헌신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아무 유익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없다면 그들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아무런 보상도, 가치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 아무리 많은 일들과 주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능력이 있다고 말하면서 연약한 성도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믿음이 있고, 헌신하는 사람처럼 행동을 하면서도 다른 이들에 대하여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는 사람들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을 말할 때 대부분은 하나님의 사랑(love)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심지어 사랑(love)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 있기도 하지만 그것도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사랑(charity)은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들은 이 사랑을 반드시 실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우리는 형제사랑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에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제사랑을 잘 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부분들을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형제사랑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하나님께서 사랑할 마음을 주셨는데 우리가 오래 참을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후에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바울은 이 말씀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위해서 많은 부분에서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구원과 관련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사랑을 실천 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love)하는 일에는 성령께서 도우시고, 지속적으로 그러한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형제사랑(charity)을 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부분에서 참고 희생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두 가지의 사랑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데 있어서 이 두 가지의 사랑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사랑(love)은 성령께서 도우심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성숙해 가는 것이지만 두 번째 사랑(charity)은 우리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담배를 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교회를 잘 출석하면 주님께서 끊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담배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끊도록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후에 자신의 행동이 덕스럽지 못하다고 판단이 되어 스스로 끊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러한 행동까지 일일이 간섭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형제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은 극히 실천적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내하고 참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으로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그의 행동으로는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너무 가식적인 것은 아닙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금 그가 사랑하는 것은 그의 죄 된 몸이 아니라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지금 이러한 사랑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4.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뿐만이 아니라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8-10)

 

주님의 교회는 장차 다가 올 천국의 또 다른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는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백성들을 훈련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차 주님의 나라 안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듯이 주님의 나라 안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달라질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하지만 그곳에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직접 대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고전13:12).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은 다양한 언어로 민족마다 국가마다 다른 언어로 인하여 교제할 수 없어서 통역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이 세상의 교회들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장차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완전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필요한 것은 있습니다.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사랑하도록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이 땅에서처럼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으며, 또한 돈을 벌기 위해 힘을 쓰거나,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다만 하나의 목표가 있다면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형제를 사랑할 줄 아는 자이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속한 교회 안에서 훈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무엇이 제일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막연한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은사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은사는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각 지체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사랑을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지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점검해 보십시오. 혹시 우리는 사랑할 만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예 관심도 없는 것은 아닙니까? 이제 우리의 눈을 형제들에게 돌려야만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제 아무리 많은 일들과 헌신, 그리고 능력 있게 보인다 할지라도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제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자,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너희의 모든 일을 사랑(charity)으로 행하라(고전16: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charity)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3:14)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charity)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4]

 

 

모임의 구성원

 

 

 

성경적인 교회를 형성해 감에 있어서 현대인들은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기초로 믿음의 삶을 살기 보다는 지나치게 목회자를 의존하고, 또한 전통을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실제로 주님의 교회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성경 안에서 그 답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에서만이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2)

 

주님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성경 안에서 이미 많은 곳들로부터 명령되어진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 자신을 낮추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무엇을 하도록 말씀하시고 계실까요? 성경 안에는 많은 명령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명령들을 찾아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나아간다면 주님은 분명히 우리의 삶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더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순종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주님 앞에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1. 회개한 성도들의 모임

 

회개(Repentance)라는 것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서 180°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후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회개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방향을 전환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회개한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일을 뒤로하고 열심히 교회의 일에 헌신한다고 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들은 모두 정답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사람들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따랐던 자들입니다(2:2). 그들은 늘 하나님과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결국 그들이 맞이하게 되는 종착지는 영존하는 파멸의 형벌입니다(살후1:8,9). 그들이 길을 돌이키지 않는 한 그들은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행하고 많은 이들을 구제하고,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 권세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지옥이라는 종착점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17:30)

 

우리가 서울에서 부산행 열차를 타고 간다면 결국 부산에 도착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그 안에서 아무리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사람들을 회유하고 인심을 베풀며, 심지어 기관사까지 유혹을 해서 서울로 가겠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가 서울로 올라가는 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열차를 갈아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3:9)

 

주님께서 점점 멀어져 가는 죄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이제 주님께로 돌이키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으로 인하여 기뻐하실 것입니다(15:7).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을 향한 가장 중요한 명령이며, 주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회개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주님의 교회의 지체(Member)가 되었어도 그의 삶이 전과 동일하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뜻과는 다른 길로 가고 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뜻이자 명령입니다.

 

2. 믿는 성도들의 모임

 

세상 사람들은 구원에 대하여 많이 착각을 합니다. 가장 많은 부분에서 오해가 되는 것은 그들의 열심히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들의 환경이 그들을 구원으로 안전하게 인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생각들은 모두 잘 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위험한 환경 속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목사의 가정이라고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참 교회, 선한 목회자, 훌륭한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눈다 할지라도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많은 성경 지식과 헌신, 구제를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구원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주님의 은혜(선물)가 크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두 사람이 들에서 같이 일하다가 한 사람은 붙잡혀 가고 한 사람은 들에 남는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두 여자가 방앗간에서 맷돌을 갈 때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는 말씀에 대하여는 어떻습니까?(24:40,41) 이 두 남자와 두 여자는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같았지만 한 사람은 주님의 손에 의해 들려 올라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그대로 남아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똑 같이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 사람은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모셔 들였고, 또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속이는 자들은 구원이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심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행동하다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는 물질을 드리다 보면 믿음이 자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떤 경우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모셔 들인 적이 없는 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혹시 부모님의 신앙이 훌륭하다고 구원받을 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혹은 아내나 남편이 넘치도록 주님을 위해 헌신을 하니 나도 더불어 천국으로 인도 받을 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내가 모태로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구원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닊? 이 모든 것들은 오히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면 구원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16:31)

 

주님의 교회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구원과 상관없는 자들이 모여 있다면 그곳은 진정한 주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속한 지체(Member)들이 주님을 믿고 있는지 검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주님의 교회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매우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의 모임

 

이 말은 단순히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받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약속되어진 것입니다(2:38).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거듭나서 세례(침례)를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실제로 주님의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자이며, 주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육신의 일을 생각할 것이 분명하고, 또한 왜곡된 신앙을 교회에 심으려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3:1). 성령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능력 있는 삶을 살도록 도울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권능으로 당신의 삶을 더욱 소망스럽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15:13).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야말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전했고, 매일 모여서 기도했으며, 자신의 소유를 팔라 구제하는 일을 했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상대방을 향해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자신들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었으며,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조차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을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해진 그들은 이제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같이 주님과 같이 죽기로 결심을 하다가도 위기가 닥치면 그분을 저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도마와 같이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물질에 마음이 빼앗겨 예수님을 팔게 될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열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마귀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성령이 함께 하지 않았던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해져야만 합니다. 그 일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전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능력 있는 사역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늘에 더욱 많은 상을 쌓도록 도와줄 것이며,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오히려 악한 영들을 몰아내고 더욱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는 일들을 하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다면 결코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5:18)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순종함으로 성령을 억누르거나(살전5:19), 슬프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만 합니다(4:30). 주님의 교회에 속한 자들은 당연히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4:3). 만일 성도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가게 된다면 모래알과 같이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성경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된다면 온전한 한 몸을 이루게 될 것이며, 주님의 교회는 건강한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4.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의 모임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만일 어떤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여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다고 해서 남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를 출석한다고 해서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거듭나야 할 뿐만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12:26)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만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주님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명령에 대하여 언제나 순종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살고, 또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걷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입으로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을 하고, 그의 삶은 전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로서 주님의 교회에 결국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다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과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주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9:23)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편안한 삶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시험이 왔을 때 견디지 못하고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바른 자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타협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 후에 다가오는 사탄의 유혹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이 사역을 완수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교묘한 사탄은 처음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였듯이 예수님조차도 넘어뜨리기 위해 접근했습니다. 그것도 말씀으로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가 주겠다는 모든 권세를 버리고 그를 물러가게 한 후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길을 가신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과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고,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일을 즐거워하고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결론

 

우리의 인생을 주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셨습니까? 그것은 진정한 회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의 일들을 위해 살고 있다면 이제 인생의 방향을 바꾸십시오. 그리고 내 믿음이 바른 것인지 입증하도록 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바른 믿음 위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이 충만한 생애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사실들은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적인 신약교회를 세워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신이 위의 조건에 합당한지를 살펴보십시오. 만일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지 않았거나 혹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다시 채워야만 합니다. 부디 바른 교회 위에 바른 믿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5]

 

 

기도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사도행전1:13-14)

 

주님의 교회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조건은 바로 기도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교회의 형성과정을 지켜보면 그것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다시 승천하실 때에 당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성령이었지만 더욱 큰 의미에서는 바로 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져 있습니다. 결국 성령이 그들 가운데 함께 함으로서 예루살렘 교회는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기 전 10일 동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했던 것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무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1.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하라.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분명히 수천 명의 군중이었지만 실상 그 말씀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120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약속하신 것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15:7)

 

우리는 단순히 기도가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형식적인 것입니다. 물론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세가 바르다고 바른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세보다는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답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적당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성경을 잘 알고 지식이 있는 자들은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기도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성경을 아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영지주의나 신비주의 적인 신앙생활을 따라 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에 바탕을 두지 않는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말씀을 잘 알고 있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행해야 하며, 그 안에서 교회는 균형 있는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교회의 필요에 대한 응답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과 여자들을 포함한 120명의 사람들이 기도했던 모습들은 우리가 합심기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와 간구를 계속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기도했던 방법들이 아마도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기도했거나 순차적으로 기도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다 거기 있어"(13)라고 말하고 있고,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4)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 방법이 과연 일부 보수주의자로 자칭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조용하게 거룩한 분위기 속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요? KJV 성경에서는 “prayer and supplication” 즉 기도와 간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초대교회 성도들이 조용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면 성경은 “supplication” "간구"라는 말을 삭제해야 옳을 것입니다(사실 대부분의 성경에는 이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시작은 이처럼 주님의 성령에 대한 필요를 온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함으로 출발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공동의 문제를 두고 기도해 왔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를 당한 후 베드로 역시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기도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일은 결코 베드로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까닭에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사도행전12:5)

 

교회가 기도를 했다고 하는 사실은 단순히 제자들에 의해서 기도할 것을 요청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모여서 기도를 계속했고 이 기도를 통하여 천사를 통하여 베드로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사도행전12:12)

 

그들의 기도 제목은 분명했습니다. 핍박이 있었던 당시에 모여서 기도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했던 이유는 그들의 기도가 속히 응답이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을수록 더욱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순교가 거듭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들이 주님을 향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합심해서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교회가 모여서 기도하는 일을 주저한다면 그들은 교회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어떠한 응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 까닭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파괴하려 들 것입니다. 때로는 핍박으로, 때로는 거짓 진리로 교회는 이러한 위험이 닥쳐 올 때마다 더욱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수한 교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3.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

 

이 말은 결코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혼자 기도할지라도 그 간절함과 필요에 따라서 주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든지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가 오히려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 사람이 합심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18:19-20)

 

한 사람의 기도는 때때로 응답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한 사람이 기도하면 자기중심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기도하게 된다면 자신의 입장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편에서 기도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두 사람이 합심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일, 즉 가정, 자녀, 사업, 물질 등의 문제를 위해 기도를 요청하지만 믿음의 성도들이 기도할 때에는 더욱 주님의 편에서 옳은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 두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주님이 그 한가운데 계셔서 보실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바른 결정과 결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성도들이 서로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한 것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의 기도에 대하여 분명히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적극적인 제안을 드린다면 믿음의 성도들이 만날 때마다 서로 기도할 내용들을 나누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4. 주님도 합심해서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결코 혼자서 하는 기도의 방식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심에 있어서도 우리(~us)라는 말을 사용하심으로 오히려 합심해서 기도할 때의 형태로 기도를 가르치시기도 했습니다(6:9-13).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송, 즉 같은 기도를 되풀이하는 것은 이교도들이 하는 것으로 주님께서 하지 말도록 하신 것이므로 해서는 안되겠지만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방식에는 합심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기도를 혼자서 하라는 의미로서 행동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셨고, 그들에게 기도하기를 요청하시기도 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마태복음26:36-46). 오히려 기도하지 않고 피곤해 하는 그들에게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40)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합심해서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욱 모여서 기도하는 일에 힘쓰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세상에서 더욱 견고하게 성장해 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5. 더 큰 사역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로새서4:2-4)

 

바울은 교회들에게 쓴 편지에서 언제나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1:19, 살후3:1, 고후1:11) 특히 감옥에서 쓴 바울의 편지는 더욱 간절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몸인 매인 상태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감옥에서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물질 등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교회 또한 그에게 이러한 삶에 필요한 도구들을 공급하는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바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도 힘든 사역을 하고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물질이나 삶에 필요한 도구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다른 대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복이나 양식, 그리고 물질이 아니라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바른 진리 위에 서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에게는 굶주림이나 헐벗음, 그리고 가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방치해 두거나 육신의 연약함, 혹은 세상이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막음으로부터 오는 힘겨운 싸움이 그들에게는 커다란 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기도 외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외형적으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주님은 교회가 힘겨운 사역자(목회자나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역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다 목회자나 선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합심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더욱 많은 결실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드리는 기도는 더 큰 사역의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1:11)

 

우리는 때때로 편견이나 관습으로 인하여 믿음에 중대한 차질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합심기도에 대한 부분은 지금까지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혼자서 기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숙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합심기도를 하는 일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합심기도는 개인적인 것이기보다는 교회가 사역을 하는 차원에서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믿음이 성장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 역시 자라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지체들은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주님의 일을 하는 많은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일을 계속할 때 성장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6]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성경적인 주님의 교회를 세워감에 있어서 성도들의 고민이 있다면 바로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순수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또한 주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교회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의 어떠함을 결정하듯이(23:7), 교회가 어떠한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그 교회의 현재 모습과 미래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교회가 세상과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그것은 당연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들을 성경을 통해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또한 우리의 현재 위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세상에서 교회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1.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야 합니다.

 

먼저 교회 안에 모여 있는 성도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끝없이 여행하는 자입니다. 그는 결코 한 곳에 안주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재물을 축적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최종 목적지를 향해 최선을 다해 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만일 나그네가 어느 한 장소에 머물러 안주하려고 한다면 그는 이미 나그네가 되기를 포기한 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위하여 주님을 위한 삶의 여정을 소홀히 하고, 또한 더 이상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는 삶을 포기했다면 그는 이미 나그네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포기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그네가 어느 한 장소에서 머물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머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세상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I pray not for the world),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17:9)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 가운데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상에 대하여 미련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시며, 또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합니다. 이 세상을 멸망할 것이고, 또한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믿는 성도가 세상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요한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실상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보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4-18)

 

바울의 권면은 완전한 분리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멍에를 함께 메지 말 것을 말씀하면서 의와 불의, 그리스도와 벨리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등이 서로 어울릴 수 없음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신자들이나 혹은 종교와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그들과 분리되어야 하며, 혹시 그들과 함께 있다면 분리되어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리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교회의 존재를 세상에 어떻게 세우시고 게신지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8:22)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9:4)

 

우리는 이집트 땅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머물고 있는 땅이었던 고센을 분리하셔서 멸망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센은 바로 오늘날과 같이 세상 속에 있는 교회와 같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집트 안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것과 같이 오늘날의 교회는 비록 세상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존재하고 있습니다.

 

2. 교회는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나라의 백성입니까? 물론 우리는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존재합니다. 만일 우리가 내 나라가 싫다고 다른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다민족 국가가 많은 세상에서는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히 본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물어 올 것이며, 그들이 만일 한국에서 이민을 간 가정이라면 한국 사람으로 분류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과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소속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5-6)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순간부터 주님은 우리를 하늘의 처소에 앉히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기준이 아닌 하늘의 기준으로 생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는 이중국적을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에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민족정신도 없고,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국적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둘을 가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데도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하늘과 세상에 동시에 속해 있다면 그들은 둘을 가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디에도 속한 자라고 말할 수 없으며, 속해 있더라도 그는 세상과 주님으로부터 모두 외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할지라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교훈의 결론은 세상과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이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유혹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울리지 말도록 말씀하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4:4)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만일 세대를 본받고 그들과 친구가 된다면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구원과 관련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을 받지 못한 자가 세상과 친구가 되어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친구가 되어 어울리고 다닌다면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들이 옳지 못한 자들과 어울리거나, 사악한 장소에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3. 교회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세상과 격리되어 그들을 만나지도 말고 어울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머물고 사는 동안 결코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만나야만 하며, 또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어떻게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2:17)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후8:21)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정직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직하게 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하여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정직함으로 인해 손해를 입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함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장 훌륭한 무기이며, 주님은 그 일로 인하여 기뻐하실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2:18)

 

또 하나 중요한 가르침은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전쟁의 원인은 대부분이 종교적인 분쟁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단 한 번도 전쟁을 일으킨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숫자가 많고, 왕을 몰아낼만한 능력이 있어도 결코 그러한 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순종했으며, 죽음 앞에서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먼저 모든 이들과 화평하기 위해서 힘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4:17-18)

 

우리가 힘써야 할 또 하나의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입니다. 만일 성도로서 전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랑스럽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하고 화평하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더욱 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야말로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이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시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가 머물 처소가 아닙니다. 지금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며, 장차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 땅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는 불행한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것이며, 또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은 다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현장일 뿐입니다(1:8,28:18-20). 그것은 우리에게 더욱 많은 보상을 얻게 만들어 줄 것이며, 또한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풍성한 미래를 보장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나그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만일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여 재물을 모으고, 명예나 권세를 위하여 밤낮으로 다니며, 세상의 지식을 위하여 자신의 생활을 소비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최종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교회를 보십시오. 화려한 건물을 지어 놓고 영웅이 되려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곧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주님의 교회는 세상의 기준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세상과 분리되어 오직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장차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과연 이러한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 모여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7]

 

 

세례(침례)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대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사도행전8:37-38)

 

성경적인 교회 안에는 오직 두 가지의 규례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중에 하나는 만찬이며, 또 하나는 세례(침례)입니다. 이 세례(침례)에 관하여는 오늘날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며,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세례(침례)는 초대교회로부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 온 것이며, 카톨릭을 비롯한 핍박자들에 의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던 규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교회를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라고 말할 수 있으며, 성도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그들의 믿음을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규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교회 안에서 세례(침례)로 믿음의 간증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의심을 품게 만들고 있으며, 세례(침례)의 규례 안에 숨어 있는 진리들을 감추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침례)가 주는 성경적 진리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을 통한 완전하고도 영원한 구원에 관한 진리를 감추고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침례)의 의미를 바로 알고 보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1. 믿는 자의 세례(침례)란 무엇인가?

 

믿는 자의 세례(침례)란 무엇입니까? 또한 구원이 "믿음을 통한 은혜"(2:8,9)라고 한다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과연 세례(침례)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세례(침례)는 분명히 누군가 구원받은 순간 믿는 자의 중심에 이미 일어났던 무엇인가에 대하여 간증으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벧전3:21). 즉 세례(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그리고 부활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우리는 세례(침례)를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물에 떠 있는 수직상태), "매장되고"(물 속에 잠기는 것) "생명이 부활"(물에서 올라가는 것)한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3-5)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세례(침례)는 영적세례(침례)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의 내면에 있는 믿음에 대한 외적 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순간 구원됩니다. 세례(침례)는 그 믿음에 대한 가시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더욱 많은 곳으로부터 세례(침례)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경적인 세례(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믿는 자의 죽음, 묻히심, 부활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만일 이 복음의 기초가 되는 진리로부터 어느 것 한 가지라도 빠지게 된다면 그는 구원을 얻은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세례(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2:12)

 

둘째로 성경적인 세례(침례)는 죄의 지배아래 있는 우리의 지난 인생이 죽고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는 우리의 부활을 말합니다. 죽음이 있다면 곧 부활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죽은 사실만 있고,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세례(洗禮)는 몸은 그대로 두고 죄의 문제만을 씻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완전한 구원으로 이끌 수 없으며, 또한 그에게는 다시 태어남도 없습니다. 완전하게 죽었을 때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규례를 만족시키는 것은 세례가 아니라 죄를 씻는 것이 아닌 완전히 죽는 세례(침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4)

 

셋째로 성경적인 세례(침례)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구원받은 유대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며, 이방인들에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식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례(침례)는 중요한 교리를 뒷받침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28:19)

 

네 째로 성경적인 세례(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옷은 몸을 가리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몸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침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몸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로 더불어 죄가 가려지고, 의인됨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3:26,27)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세례(침례)가 결코 죄 사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요일1:7, 1:14). 세례(침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간증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결코 죄사 함을 받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2. 어떤 자가 세례(침례)를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간혹 믿음의 고백 없이 세례(침례)나 혹은 세례를 주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의 믿음을 검증하기도 전에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세례(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함으로서 세례(침례)는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누구나 교회에 등록하기만 하면 세례(침례)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믿음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자세에 대하여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세례(침례)가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2:41)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8:12)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대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8:36-38)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10:47-48)

 

우리는 세례(침례)를 받았던 자들이 다양한 환경에서 행해졌지만 동일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더욱 적극적인 표현을 쓴다면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례(침례)가 구원받은 간증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속이는 자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세례(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빌립보 간수가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들이 대답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0-34) 바울은 구원을 받기 위해 세례(침례)를 받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세례(침례)는 믿고 난 후에 행해졌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침례)를 베풀어야 하는가?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 개인의 구원자로 믿어 온 사람입니다. 세례(침례)는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은 자로서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언제 어떻게 세례(침례)를 어떻게 베풀 것인가?

 

언제 믿는 자의 세례(침례)를 베풀어야 하는가? 성경은 세례(침례)가 영적 세례(침례)(새로 태어남) 직후에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9:18), 고넬료(10:43-48), 빌립보 간수는 구원을 얻은 즉시 세례(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과 더불어 영적 세례(침례)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3:26-27). 그리고 사도행전 8:38, 10:47, 16:33에 따르면 우리는 물속에 잠기는 순간 영적 세례(침례)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의 세례(침례)는 어떻게 베풀 것인가? 물속에 잠기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유일한 세례(침례)의 방법입니다(3:13-16, 1:9-10) 우리는 요한이 세례(침례)를 주기 위해 요단강에서 세례(침례)를 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행8:38-39에서 물에 잠기는 세례(침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롬6:3-6에서 세례(침례)는 세 가지 모형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죽으심, 묻히심과 부활 그것은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모습들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세례(침례)의 방법이 믿는 자가 물 속에 잠기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더욱이 "많은 물"(3:23) "둘 다 물 속으로 내려가"(8:38)와 같은 성경의 표현들은 세례(침례)가 물에 잠기는 것이라고 하는 매우 결정적인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왜 우리는 세례(침례)를 베풀어야 하는가?

 

영적 세례(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2:12). 이것이 우리가 세례(침례)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6:3-5에서는 문자 그대로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히고, 부활하는 것의 모형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 받은 후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첫 번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다양하게 우리가 세례(침례)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경적인 세례(침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예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셨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기뻐하노라"(3:17)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갈 때 우리는 아버지를 확실히 기쁘시게 합니다. 그것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국한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것을 그대로 따라서 행하고 있습니다. 이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세례(침례)는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10:32) 우리의 세례(침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에 대한 공개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세례(침례)가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해주는 의식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규례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례(침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세례(침례)는 완전한 구원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중심에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눈에 보이는 간증입니다.

 

세례(침례)는 성경적인 교회를 이루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침례)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를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세례(침례)에 대하여 타협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온전한 교회의 모습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례(침례)는 복음의 가장 기초를 이루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이 믿음이 교회 안에서 바로 잡히지 못한다면 그들은 마귀들로부터 수많은 교리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성경을 버리고 일반 종교와 같아지거나 세상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세례(침례)는 신약교회의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 사수해 왔던 진리입니다. 그들은 신앙고백이 없는 세례를 거부하고 믿음의 고백 위에 세례(침례)를 받는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하거나, 짐승의 밥이 되거나 수많은 고문을 통하여 처참하게 죽어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따라 세례(침례)신앙을 기초로 하여 바르게 믿음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8]

 

 

주님의 만찬

 

 

일반적으로 주님의 만찬을 말할 때는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하나의 규례쯤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만찬은 세례(침례)와 더불어 주님의 교회가 행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규례를 행하게 하는 데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만찬의 행위는 주님의 몸을 나누는 것이며, 교회는 바로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 만찬이 다만 교회 안에 정해진 하나의 규례정도로 생각하고 실행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만찬이 실행되고 있지만 많은 갈등과 분열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르게 알고 가르치는 것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만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면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위해 전 성도가 함께 협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찬을 실행함에 있어서 그에 관한 논란은 조용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카톨릭과 같이 화체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떡과 피가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가 된다고 주장을 함으로서 지나치게 만찬을 신성시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반대로 어떤 이들은 만찬의 의미를 축소함으로서 거의 행하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일년에 몇 번의 만찬을 실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는 명확하게 성경을 통해 제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자주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데도 대부분 이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또한 논쟁거리 중에 하나는 바로 누가 참여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세례(침례)를 받은 이들만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역교회에 속한 자들만이 만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교회를 인도해 가는 목회자의 견해에 따라서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주님에 의해 시작된 만찬

 

주님의 만찬이 처음 시작된 것은 배반당하시던 날 밤, 예수께서 기념잔치(Remembrance Feast)로 제자들과 함께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26:26-30; 14:22-26; 22:14-20). 이 주님의 만찬은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후에 교회 안에서 실행되었으며(2:42; 2:46; 20:7), 바울에 의해 교회 안에서 실행해야 할 규례로 가르쳐졌습니다(고전 11:20-34).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규례를 제정하실 때, 만찬을 몹시 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22:15). 첫 번째 주님의 만찬은 유월절 밤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월절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5:7).

 

만찬은 신약교회들에게 있어서 세례(침례)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규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진리를 담고 있으며, 결코 습관적으로 해서도 않됩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에 의해 제정된 규례이며, 신약교회에 있어서 그들의 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간증의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만찬은 한 몸의 지체로서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을 상징한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 안에서 만찬을 실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교회의 회원이 된 자들만이 행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물론 누가 교회의 회원인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함에 있어서 다소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구원받은 사실이 분명하고, 그 간증으로 세례(침례)를 행한 자에게만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도록 허락합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 안에 살과 피가 있듯이 만찬에는 예수님의 살과 피가 있으며, 성도들은 그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만찬이 단순하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간증하는 예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 두 가지의 규례를 행합니다. 그 중 하나는 세례(침례)인데, 그것은 그의 믿음을 보이는 간증으로서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만찬은 바로 자신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간증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가 주님의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 까닭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세례(침례)를 받으며, 교회의 회원(지체)된 자들이 만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관의 차이에 따라서 각 지역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만이 만찬에 참여하게 하느냐 하는 것과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침례)로 믿음을 입증한 사람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몸의 지체가 된 자들이 만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한 인격이 만찬에 참여함으로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자신을 살핀 후 만찬에 참여하여야 한다.

 

어느 교회에서 만찬이 있던 날 갑자기 의식을 중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 성도들의 상태가 만찬을 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은 당황하였고, 어떤 성도들은 주님의 만찬을 어떻게 중단시킬 수 있느냐며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찬을 거부하는 것이 결코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잘 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지도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거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만찬을 행하는 자가 자신의 양심을 따라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 11:25-28)

 

그리스도인은 성경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인이 한 몸으로,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구별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떡과 잔은 반드시 합당한 방법으로 취해져야만 합니다. 합당하지 않게, 곧 자신을 살피지 않고 참여한 자는 모두 주님에 의해 심판을 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에 만찬을 진행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심각한 상황을 맞게 될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만찬에 대한 의미를 퇴색시킬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살펴야만 합니다. 만일 만찬에 참여하는 자가 아무 생각 없이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마신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전혀 의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이 되므로 그는 이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찬은 그리스도인의 고백을 담은 의식입니다. 우리는 무성의한 자세로 아무 생각 없이 이 만찬에 참여한다면 주님으로부터 반드시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4. 만찬은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예식이다.

 

오늘날 만찬에 대한 자세는 크게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는 반면에 어떤 교회는 지나치게 의식화 시킨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지는 또 다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절기 때를 제외하고는 만찬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화체설을 주장하며, 매주 만찬을 실행하는 카톨릭 교회에 대한 거부감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카톨릭의 만찬에 대한 자세에 대하여 그토록 흥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어디에도 만찬을 정기적으로 몇 번씩 하라는 명령이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주의 첫날 행해졌다는 사실과(20:7), 초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만찬을 행했던 사실에 근거하여(2:46) 자주 행하는 것이 성경적일 것이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물론 일부 교회에서는 매주 만찬을 행하면서 매주 행하지 않는 다른 교회들에 대하여 정죄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무리한 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만찬은 단 한 번도 정기적으로 행하도록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교회가 이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여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this do in remembrance of me), 하시고(고전11:24)

 

만찬은 주님을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모든 경배 모임에서 반드시 주님을 기억하는 예식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예식이 성도들로 하여금 습관에 빠지게 함으로서 오히려 만찬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형식적인 자세를 갖는다면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찬은 말 그대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만찬의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거나 또한 거룩하게 만드는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그것이 비록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또한 주님의 교회에 대한 지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경배모임에서 어떤 형식들을 가지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모임에서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보다 짜임새 있게 경배를 하는 것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형식주의로 기울고 그 안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찾는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만찬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형식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찬은 결코 형식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5. 떡과 포도주의 의미

 

일반적으로 만찬에 쓰이는 떡은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 이스트를 넣거나, 맛을 더하기 위해서 설탕을 넣지 않습니다. 오직 순수한 곡식 가루로만 만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방법으로 재료를 구우면 딱딱한 상태가 되며,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떡이나 떡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과자와 같은 모습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기 위해서는 부셔뜨려야 하며 성도들은 그것은 나누어 먹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에 대하여 부서진 몸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고전11:24). 실제로 예수님의 몸은 찢기시고, 찔리고, 모욕을 당하셨지만 이처럼 부서졌다는 표현을 쓴 것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부서진 몸인 떡 조각을 먹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의 일부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 함으로서 자신이 바로 예수님의 몸의 일부 곧 지체가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일 만찬을 행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만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절반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만찬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몸의 일부, 즉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자 간증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잔, 즉 포도주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도 같은 이치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한 죄 사함이 없다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교회의 지체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믿음이자 간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찬에서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을 병행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교회가 이러한 신앙고백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주와 떡 안에는 주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우리 자신이 주님의 몸의 일부라는 점을 고백하는 신앙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마땅히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고백을 가지고 임해야 하며, 떡과 잔을 나눌 때 보다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만 할 것입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9)

 

 

교제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1-47)

 

어느 세대에나 교회는 믿음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만들어 주신 공간이며, 영적인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향하여 등을 지기 시작했으며, 교회 밖의 공간을 통하여 그들의 영적 양식을 공급받으려 합니다. 이미 TV, 인터넷, 그리고 각종 방송이나 언론 매체를 통하여 그들은 성경 지식을 얻으며, 일부의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교회라는 공간은 단순히 성경을 알고,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곳은 주님의 신비가 가득한 곳이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소속되어 영광을 드려야만 하는 공간입니다.

 

교제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미 우리는 문화적으로 모임을 통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교제할 수 있는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교제의 수단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가기 원한다면 교회 안에서 바른 교제를 이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1. 복음 안에서의 교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많이 변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마치 사회 복지 시설과 같은 형태로 변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강사들을 초청해서 세미나를 열기도 하며, 각종 사회 현안들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사회 참여를 강요하기도 하고, 각종 계몽운동에 앞장서면서 교회가 마치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매우 훌륭한 목회 방법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실은 이미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마치 교회가 사회적으로 매우 선한 일을 하는 단체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교회 구성원의 성격이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죄인들에게 의인인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동안 이러한 요구가 매우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 대하여 노력하는 동안 우리는 더욱 깊은 좌절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의로워질 수 있는 본성을 가진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교회 안에서 어떠한 교제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에 대하여 매우 명쾌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립보서 1:5)

 

한 마디로 교회는 복음으로 인하여 모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 복음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 모인 성도들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결코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마치 친교 단체쯤으로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공간 정도로 여기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의 본질을 크게 잘 못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피로 값을 치르고 세워진 공간입니다. 이 말은 곧 복음의 가장 본질적인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성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공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비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교회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 안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의 교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면 그는 영적 신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의 교제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2. 섬기는 자로서의 교제

 

그렇다면 주님의 교회 안에서 교제하는 성도들이 서로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교제를 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행을 하기도 하고, 각종 세미나를 열어서 지식을 더하기도 하며,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하여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참여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교제의 의미를 더욱 활성화 시켜줄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임이 추구하는 목적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린도후서 8:4)

 

한 마디로 모임의 목적은 성도들을 섬기는데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섬김은 교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돌아보십시오. 이미 교회는 니골라당의 침투로 인하여 마치 계급 사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섬기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군림하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마치 아래 사람들을 다루듯이 명령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교회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섬기는 본을 보임으로서 가장 아름다워질 수 있는 곳입니다. 더욱 명심해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경험이 많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지만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일수록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섬겨야만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약하게 보이는 몸의 그 지체들이 더욱 더 필요한 존재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고전12:22). 그들은 언제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들이며, 성숙한 성도들은 그들을 섬김으로서 안전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합니다.

 

교회가 섬김의 도리를 버리고 세상과 같은 조직적이고 안정적인 모임을 추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섬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주님께서도 섬기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희생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복음 안에서 바르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섬김의 도리를 가지고 주님의 교회 안에서 온전한 교제를 하게 될 것입니다.

 

3. 교제 아래 사는 자의 삶

 

우리가 교제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일차적인 대상이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마귀와 교제하는 자들이 많습니다(고전10:20).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마귀와 교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대단히 영적인 삶, 즉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온전한 교제하는 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6-7)

 

어떤 사람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죄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맞는 답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방종을 불러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온갖 사악한 일들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며, 마귀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즐깁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의 교회 안에서 이들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하고 도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성도들로 하여금 도덕주의자, 혹은 율법주의자를 만들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교회 안에서 득이 되기보다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향한 교회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으며, 이후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양육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성도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교회에 와서 젖을 달라고 조를 뿐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특히 자신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을 듣기 원합니다. 물론 교회는 그들에게 단단한 식물을 먹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린 성도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다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역할을 여기에서 멈춰버립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 안에서는 젖을 달라고 졸라대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납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성장을 멈춰버린 기형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서 빛으로서, 또는 소금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야만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세상에 대하여 지나치게 폐쇄적인 경우를 봅니다.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켜가는 것이 믿음의 삶을 성공하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을 때 베드로가 그곳에 초막을 짓고 살자는 제안을 뿌리치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하여 바르게 대처하며 살아가는 방법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 간에 온전한 교제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온전한 교제를 통해서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교회 안에서 더욱 풍성한 삶을 위한 교제가 지속되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10)

 

 

전도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

 

복음 선포, 즉 전도는 엄밀히 말한다면 그리스도인 된 성도들 개개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라는 것이 의욕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전하는 것만으로 끝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교회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효과적인 전도를 위한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하며, 또한 복음을 듣고 믿음의 삶을 시작한 성도들이 정착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훈련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린도전서 4:15)

 

우리는 이 전도가 지식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전도할 대상자들에게 자신이 아는 지식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히 전도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식을 낳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복음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개입으로 순간적으로 놀라운 결실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복음 전도는 많은 수고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전도를 위해서 어떠한 수고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전도는 명령이다.

 

어떤 사람은 전도를 하는데 특별한 재능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매우 명백하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6:15).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며,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욱 열심히 전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성경은 보다 적극적으로 전도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만 안전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일차적인 목적은 개인 혼의 구원에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거기에서 머무를 수 없습니다. 주님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그분 자신을 드러내기를 소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전도가 명령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 가운데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활동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매우 무지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주님과 더불어 그분의 일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위해서 수고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성도들이 이러한 영적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2. 무엇을 전할 것인가?

 

무엇을 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복음입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고전15:1-5,17:18). 이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복음을 변개하고 세상의 철학과 과학으로 속이려 하지만 이 복음의 내용은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지켜져 왔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사도행전 11:14)

 

전도를 함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이 필요한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공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개인적인 성경 공부를 통하여 말씀을 터득해 가기도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가장 바르고 건전한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생활을 통하여 증거하도록 도와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하는 것이 결국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말씀으로 무장되었을 때 훌륭한 전도자로서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벗어난 어떠한 가르침이나 증거도 능력을 드러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것이 사람들에게 크게 호감이 가는 형태로 드러날 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증거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15-16)

 

우리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할 수 있는 대로즉 각자의 분수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전혀 인식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방을 향하여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들만 떠들어댄다면 자칫 복음을 수치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가령 복음을 전하는 자가 도덕적으로 사람들로부터 불완전한 자로 인식이 되어있는 사람이 매우 건전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상대방은 들으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온전해지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먼저 자신을 말씀으로 채우고, 실제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린도전서 1:21)

 

그렇다고 우리의 도덕성이나 지식적인 수준이나 삶의 질이 세상 사람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명백하게 그 반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와 명예를 기반으로 복음을 전하여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복음에 대하여 크게 오해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되고 병이 나으며, 매사에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 선포는 어리석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의 부와 명예, 권세를 뒤로 하고 가난한 삶을 택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전해야 되는 복음의 내용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데살로니가전서 2:9)

 

이 복음은 많은 수고와 고통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가 가볍게 세상을 향해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이렇게 전하는 자들이 모여 함께 위로를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성도들의 위로가 함께 하지 못한다면 그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위해서 함께 수고하고, 위로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3. 어떻게 전할 것인가?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담당하는 우리 몸의 기관은 입입니다. 우리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들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머리에만 많은 지식을 쌓아두고 그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을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쓰레기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사도행전 15:27)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시편 71:15)

 

우리가 입으로 전하는 일들도 사실상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많은 성경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매우 적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아주 효과적으로 복음 안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삶의 경륜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회에서 효과적인 교육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가진 재능을 무시하거나 계발하겠다는 의도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하고자 하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전해야 되는 내용들을 상대방에게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도록 입술의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로마서 10:15-16)

 

우리의 입술로 전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발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위해서 많은 수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지역교회들은 이 일들을 위해 더욱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역을 복음화 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하며, 또한 또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함으로서 또 다른 지역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위해서도 수고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사도행전 8:25)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명령(1:8)을 따라 예루살렘 지역을 복음화 시키는 일들을 위해서 수고하면서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마리아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위해 수고 했습니다. 결국은 그들의 수고가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위해서 더욱 수고하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지역마다 그분의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 일들을 위해서 교회는 더욱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전도하는 일들을 위해서 더욱 힘쓰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11)

 

 

진리의 파수꾼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에베소서6:11-17)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를 가지려 한다면 그것은 매우 착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땅에서 단순히 그분의 교회 안에서 그분의 자녀들을 모아두는 일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통하여 그분 자신을 더욱 드러내기를 원하시며, 더 중요한 사실은 그분의 진리가 보존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는 이 땅에서 진리의 파수꾼으로 존재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크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일들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전쟁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에 있으며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온전히 보존되도록 가르치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에 관하여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기 때문에 참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성경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킨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의 삶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왜 보존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전시용으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역사적인 물건들을 박물관에 모셔두고 구경하고는 돌아서서 잃어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어떤 이들은 성경을 단순히 전시용으로 집안에 모셔 두고 먼지만 쌓아두고 생활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바른 성경을 보존한답시고 투쟁하며 다른 이들을 비방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며 많은 원수들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왜 우리가 바른 성경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아가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질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바른 성경을 손에 쥐어주어야 하며, 그들로 하여금 그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가르치고 그들에게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지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파수꾼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방어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가 삶 속에서 묻어나며, 세상에 나가 빛으로서, 소금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에 연루되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지도자라는 이들 조차도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교회는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지키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훈련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2. 화평함으로 하나 되는 일을 지키라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서 가장 서글픈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교회와 성도들 간에 서로 많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교회들은 자신들만의 교리를 따라서 교단을 만들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교리와 신념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서로가 화평하고 하나가 되는 일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원칙 없이 서로가 화평하고 하나가 되기를 힘쓰고자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타협이 될 것이며, 마귀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하여 사탄의 회를 만들고자 할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3)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은 모든 지역들마다 그분의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지어져 가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이가 점차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듯이 하나의 건강한 몸으로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과 신념,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따라 주님의 교회를 선택하고 심지어 지역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 성도들조차 현혹하여 자신의 교회로 인도하려는 행동을 보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가 평안 가운데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이러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마귀는 성도들 간에 서로 불화하도록 힘쓸 것이며, 교회 간에 서로 분열이 일어나도록 모든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는 스스로 지켜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다행스러운 사실은 성령님께서 이일들을 위해서 힘쓰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산다면 그들은 서로 화평함 삶을 살게 될 것이며, 하나 되기를 힘쓰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일들을 행하는 것은 성도들 개개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만 교회는 그들로 하여금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도록 그들을 지켜주고 바르게 인도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3. 마음을 지키라

 

마음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개인에게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마음을 지킬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신념이나 목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전통과 신념들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지켜야 하는 첫 번째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죄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딤전 5:22,6:14).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죄의 기준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매우 당연한 말이지만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성경 지식을 더해가야 하는 이유도 바로 죄를 알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 (잠언 4:23)

 

이 마음을 지키는 일들은 결코 쉽고 단순한 일은 아닙니다. 마음 그 자체가 매우 복잡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루에서 수십 번씩 변하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마음의 상태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변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유혹하는 죄와 마귀의 존재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신을 일깨우고, 근신하며, 언제나 경건한 삶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쓰는 것도 마음을 지키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딤후1:14). 주님의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러한 삶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해야만 합니다.

 

4. 세상으로부터 지키라

 

교회의 역할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역할 하나를 든다면 세상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입니다. 세상은 주님의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지속해서 무너뜨리기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을 대부분의 교회들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잘 넘어가고 타협하는 모습들을 보여 왔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 안에서도 제시된 바 있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린도후서 11:4)

 

교회의 파괴는 결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것들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 파괴의 주범은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붕괴가 교회 파괴의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안에 모인 자들이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서 구원 얻은 자들이 없다면 그곳은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교회라는 간판을 내 걸고, 일반적인 교회와 같이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거나 듣고 있을지라도 결코 교회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친목단체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이러한 것들이 침투하지 않도록 경계해야만 합니다. 지금도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이 교회 안에서 침투하여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선포하는 자들은 반드시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1:6-9).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가르침을 경계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를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바른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굳건하게 세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디모데전서 6:20)

 

주님의 교회는 세상에서 지혜롭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순간적으로 그들에게 교회를 맡기는 경우가 발생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왜곡하고 각종 우화나 신화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헛된 과학을 가지고 성경을 반박하기를 좋아합니다. 교회는 철저히 세상과 분리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복음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하여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교회가 다른 복음들로 인하여 혼란스러워질 때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교회를 떠나 다른 지역교회로 옮겨가는 그러한 비겁한 모습이 아니라 보다 더 기도하고 바른 진리로 성도들을 훈련하고 권면할 수 있는 파수꾼으로서의 자세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12)

 

 

선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28:18-20)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에 대하여 말하면서 선교라는 주제를 가장 마지막에 둔 것은 교회가 가지는 최종의 목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지역교회들은 선교하기를 열망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일들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설령 선교를 한다고 하지만 효과적인 선교를 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선교의 방법이라는 것은 선교비를 보내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변에 돈은 있지만 선교의 일을 감당할 만한 일꾼이 많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선교할 만한 일꾼을 양성해내는 일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학교들이 있고, 사역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전문 사역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진정으로 헌신된, 특히 선교의 일들을 위해 수고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1. 세상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지식을 더해 가면 살기 좋고 편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범죄의 현상들을 보십시오. 모든 사악한 종류의 범죄들은 대부분 선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부유한 국가들에서 이루어지며, 그 범죄의 질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한일서 5:19)

 

우리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사악함 가운데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 속한 우리들에 대하여 언제든지 핍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일들을 위해 수고하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토록 많은 죽음을 알고도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의 일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을 사악함 가운데서 건져내야만 한다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일서 2:2)

 

예수께서는 스스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의를 지닌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 악해서 타락한 천사들을 위해 준비되었던 지옥에 보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친히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 여김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혼이기도 합니다. 바로 거듭난 우리는 아직도 죄 가운데서 지옥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세상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그들과의 분리만을 생각하고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격리된 삶을 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뜻을 잘 못 이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2.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선교의 일들은 결코 특정한 사람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선교의 일들을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조건은 부르심을 받은 자의 열정이겠고, 다음은 보내는 자들의 지속적인 기도와 후원이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보내질 지역에 적절한 선교방법을 가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로마서 1:5)

 

우리는 첫 번째 열정과 두 번째 후원에 관한 준비는 매우 잘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세 번째 보내질 지역에 대한 정보나 구체적인 사역의 내용이 없이 사역을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실패하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실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그에 따르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선교가 단순한 열정만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많은 준비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자신 안에 있는 편견과 신념을 버리는 자세는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선교사는 타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한국의 문화를 전하려고 합니다. 물론 많은 미국인 선교사들조차도 미국의 문화를 한국 안에 심으려는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어 복음의 효과를 얻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후에 많은 문제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마가복음 13:10)

 

대부분의 민족들은 자신들만의 생활 방식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복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의 문화를 바꾸고 심지어 민족성마저 버리도록 요구하게 된다면 그것은 커다란 문제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지 신념과 문화를 바꾸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복음을 전함에 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행동하고 그들의 방식들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오직 모든 민족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3. 선교는 재림의 신앙과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재림의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더 이상 선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복음이 확장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순간 이 세상은 끝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태복음 24:14)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든 민족,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위해 모든 수고를 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주님이 오시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복음의 확산은 시대별로 볼 때 재림의 신앙이 강조되었을 때 주로 일어났습니다. 특히 환난과 핍박이 극심했던 시기에 복음은 더욱 확산되어 갔습니다. 그 때에는 그들의 삶의 유일한 희망이 바로 주님의 재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와 같이 핍박을 대신한 다른 복음이 성행하는 시기에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믿음과 교회를 지키는 것조차 힘겨워합니다. 그 까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선교를 통하여 다른 민족을 구원하는 일들을 행하는 일들을 흔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어려운 현실 속에서 선교의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 하나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주님은 오늘날과 같은 미지근하면서도 지식으로만 가득한 시대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이야말로 재림의 신앙이 강조되어야 하는 시대이며, 또한 선교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할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문화를 변화시켜 오늘날 너무도 쉬운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인터넷, TV, 통신, 스포츠등 다양한 것들을 통하여 이미 세계는 이미 모든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오늘날 세계를 복음화 시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문화들과 타협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 마귀로부터 오는 많은 문화들로부터 분리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될 만한 문화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민족들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교회가 한 마음으로 이 시대의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기 위해 힘써야만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조건(13)

 

 

하나님의 동역자들

 

 

 

오늘날 지구상에 수많은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실상 그들은 하나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마다 정통과 보수를 주장하며 다른 교회나 교파를 이단화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들이 하나가 되겠다고 '애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복음과는 관계없이 하나의 정치 세력화를 강화하려는 집단으로 커져 가는 것을 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 됨의 원칙은 이러한 인간적인 노력과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미 동일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 됨을 선포할만한 이유도 명분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만일 한 가정의 자녀들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다'라고 떠들고 다닌다면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저들은 가족이 아니었나보다', '부모 중에 누군가 서로 다른가보다'하고 의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양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나타나는 재능과 은사, 그리고 능력의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결코 '이것이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등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것을 좋아 하신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할은 하나 되게 하는 데 그 사역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1-6)

 

우리 스스로가 제 아무리 다르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미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자신과 조금 다른 신학과 배경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결코 경솔해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교단과 교회를 이단시하는 경향이 빈번함을 보면서 매우 가슴 아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고립을 자초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당 짓는 자

 

어째서 오늘날 이토록 많은 교단과 교파가 존재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결국 자신들이 가진 신학과 신앙만이 옳은 것이며, 상대방은 모두 잘못 되었다는 그릇된 생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상 기독교 교파의 탄생을 루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칼빈, 알미니안, 웨슬레 등 많은 신학자들과 전도자들에 의해 교단이 형성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시작이 순수한 복음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에서라기보다는 카톨릭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회(루터이후)는 교리만을 바꾸고 나머지 의식과 절기, 예식등은 모두 카톨릭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오늘날과 같이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성경이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보급되지도 않은 상태였고, 그들의 손에 들려진 성경은 라틴말로 번역된 성경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온전한 복음 신앙을 외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에는 다소 역부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약 1300년 가량을 카톨릭의 세력 앞에 말없이 충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루터나 칼빈을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 완벽하거나 우수해서가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복음의 핵심을 일깨워 주었고, 이 복음을 목숨을 걸고 주장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덮어두고 이들의 신학적인 교리에 매여 복음의 바른 교훈을 점차 벗어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성경이 각 가정마다 보급되고 있는 시대에 아직도 16-18세기의 지식을 가지고 서로 변론하고 있는 현실이 다소 우습게까지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제 성경이 우리 손안에 있다면 성경 안에서 진리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할 수 없을까요?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말이지만 초대 교회로부터 끊임없이 기승을 부렸던 '당 짓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1:18,19)

 

어떤 이들은 수많은 교단의 탄생이 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괘변을 늘어놓습니다. 물론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데 공헌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대치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방법을 거부해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왜 수많은 교리와 교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얼굴을 붉히며 하나 되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날 교회가 '당 짓는 자'들의 계략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오늘날의 교회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 바울, 아볼로 그리고 그리스도 파를 만들어 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 '육신에 속한 자'라고 책망하면서 그들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음을 책망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내 가정, 내 교회만을 고집하고 모든 것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요, 영적 어린아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 짓는 자'들은 우리가 언제나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장하면 우리 곁을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자녀들이 언제나 어린아이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성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는 더욱 더 어린 아이로 만들어 놓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진리의 넓은 세계를 포기하고 울타리 안에서 가르치려고 합니다. 진리의 세계는 결코 좁지 않습니다.

 

2. 진리 안에서 하나 됨

 

바울은 오늘날 사역자들의 처세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세웠던 교회입니다. 그리고 고생 끝에 많은 성도들이 운집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뒤 사람들은 바울을 잊었고 성도들은 베드로나 아볼로, 아니면 오직 그리스도만 따르겠다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어찌 보면 바울에게는 매우 섭섭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볼로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그들은 교회에 꼭 필요한 존재이며 누가 중요하고, 큰가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어떤 모양이든 사람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 신앙은 기초부터 매우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교회와 사역자의 소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오늘날 법원에 교회 재산권 소송으로 인해 서류가 쌓여가고 있다는 부끄러운 소식을 듣고 있지만, 그들은 아마도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 자들일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실수하기 쉬운 것은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사역자들을 흔히 ''이라고 부릅니다. ''은 누군가 그를 소유하고 있고 그에게 일을 시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선생들이 나와서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면 결코 자신이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종은 결코 자신의 공과를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역자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바르게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역자가 섬김의 위치에 있어 본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사역자를 추종하고 사역자는 이를 당연시 여깁니다. 성도들은 사역자가 어디에 가든지 따라가고, 사역자는 성도가 이탈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이제 일반화된 현상입니다. 그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역자가 능력의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이며, 교회 또한 규모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결코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복음이라는 범위 안에서만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생각하기에 온전치 못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고 벗어나야 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18:4)

 

우리는 피차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3. 일하는 대로 받을 상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통하여 크게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의 종류가 각각이며, 또 하나는 일하는 대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사역을 경계하는 모습을 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주로 하는 교회는 표적과 능력이 많이 나타나는 기도 중심의 교회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도를 중심하는 교회가 말씀 중심의 교회를 보면 답답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으며,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교회만이 온전하다고 주장한다면 기형적인 교회가 되거나 복음적인 교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장해 갈수록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비록 사역자가 가지지 못한 은사를 가진 성도가 있다 하더라도 내쫓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은사를 더욱 계발시켜주고, 피차 격려하며 부족함을 채워나가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역시 자신이 가진 은사가 사역자에게 없다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얕잡아보지 말고 자신의 가진 은사로 봉사의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는 결코 자랑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협력하여 일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자신의 일들을 감당해 간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보상이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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