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적

조회 수 839 추천 수 0 2022.10.06 06:53:17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2:1-11)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기적은 예수님의 사역 셋째 날에 있었던 공식적으로는 가장 처음에 행해졌던 기적입니다. 사역이 시작된 지 삼일 째 되던 날 행해졌던 기적이라는 점과 예수께서 죽으시고 삼일 째 되던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국 이 기적을 단순하게 이해하기 보다는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이 초대를 받은 것으로 보면 매우 가까운 친척관계이거나 혹은 이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고, 그 즉시로 예수님의 어머니, 즉 마리아는 이 사실을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당연히 예수님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원했던 것은 그가 천사들을 통해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라는 말로서 기적을 행할 의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 대하여 여자여(Woman)”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찌 보면 매우 무례한 말투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동양인의 관습에 따라 오히려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가르침을 통하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15:4, 19:19, 7:10, 10:19, 18:20)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예수께서 어머니였던 마리아를 한 여자로 대하신 것으로 가르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넘어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어머니를 충분히 공경하였고, 그것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제자였던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모습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19:27). 예수님은 결코 무례하고 냉정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또 한 가지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것은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의 제안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마리아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때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을 보면서 그것이 기적을 행하실 때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아직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완성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혼인잔치를 통하여 예수님의 본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관이 없음을 말씀하셨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이후에도 예수께서 36개월 동안의 사역을 하시는 동안 사람들은 많은 기적을 보았고, 메시아로서 분명한 증거들을 보았지만 어떻게 완성하게 될 것인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들은 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는 마음을 닫아 놓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예수께서 기적 행하는 것에 대하여 부담스러워 하셨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거짓 전도자들은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만을 기억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는 이 안에 더 큰 의미를 두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담스러워 함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확신을 가지고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고 말함으로서 마리아는 여전히 처음에 가졌던 메시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가 마리아를 숭배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녀의 믿음이 과소평가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녀가 처녀의 몸을 입고 있었을 때에 천사의 방문을 받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심했으며, 사역의 과정에서도 여전히 메시아로서 확신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를 세워가는 모든 과정에서도 여전히 섬기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녀는 비록 가톨릭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분명한 사실은 믿음의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물 항아리를 채우는데 있어서 종들에게 명령하였고, 예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도록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후에도 포도주를 나르는 모든 과정에도 종들이 이 모든 일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방법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그분의 사역을 그분의 종들을 통하여 행하실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이끌어 가신다고 말하면서 환상을 보고, 기적을 체험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종들을 친히 부르셔서 그들에게 사역을 맡기십니다.

 

여기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은 단순히 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주님께서 행하실 일들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물과 포도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는 세례(침례), 포도주는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해 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맡은 종들이 초대받은 자들에게 나누어 주듯이 오늘날 주님의 종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보이셨지만 거기에서 멈추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을 보기 원하셨고, 또한 이후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요구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단순히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 완성될 주님의 사역을 보여주고 계셨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천 명을 먹이심(6:5~14)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영적으로도 많은 해석을 낳았던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여러 가지 시각에서 많은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14:15-21 6:35-44 9:12-17). 이 기적은 저녁에 있었는데,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하면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저녁 즈음은 오후 3시부터 해당되는 시간입니다. 이 기적 이후에 예수께서는 무리를 보내시고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가 저녁이 되었을 때 거기 홀로 계시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는 일몰 이후의 시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14:23).

 

모인 무리들은 예수께서 외딴 곳으로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도시로부터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많은 시간을 걷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목격하고 있었으며, 많은 시간을 보내고 배가 고파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는 동안 이제 그들은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지금 하시고 계신 일들을 멈출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안을 하십니다. 이 제안은 곧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이 기적을 행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고 말씀하십니다.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라고 대답합니다. 빌립은 수학적인 판단으로 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저히 먹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계산상으로는 도저히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없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대답했지만 예수께서 원하시는 대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이유도 모든 일을 계산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실에서 가능한 사실에 대하여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믿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탄생하는 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가 사해진 사실, 예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일,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과 같은 것들은 우리의 논리나 지식에 근거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앞세울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안드레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지만 그도 역시 해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많은 기적들을 보이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많은 무리들에게 양식을 먹이실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여전히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가 소년의 보리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이 작은 것이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미 주님의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보이셨던 주님의 능력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에서는 이 일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연약한 인간에게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라셨던 것은 그들에게 없는 양식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양식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최소한의 것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이시지 제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없는 것까지 요구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에이지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잠재적 능력까지 동원하도록 요구합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이들이 속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예수님께 오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모인 무리들을 앉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앉게 하심에 있어서 백 명 혹은 오십 명씩 무리를 지어 앉게 하십니다(6:40).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은 모든 일에 대하여 매우 질서 있게 행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14:40).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모든 세대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과정까지 단 한 번도 주님은 무질서하게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는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가 언제나 진지한 모습으로 공급받을 말씀을 기다림으로서 겸손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30:15, 23:1,2). 성인 남자만 오천 명, 전체로 따지면 약 만 오천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질서 없이 행동한다면 매우 혼란해 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굶주림만 생각하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혼란은 더욱 심각한 상태를 맞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각종, 지진이나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재앙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인하여 극도의 혼란에 빠져 약탈과 강도를 일삼는 경우들을 목격합니다. 그들에게 질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광야에 있었던 사람들은 비록 배고픈 상태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리를 지어 질서 있게 앉게 하시고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부르셔서 나누어 주실 수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아니면 먹을 자들에게 스스로 와서 먹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양식을 공급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떡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갖다 먹으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와서 먹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종들을 통하여 공급하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세대에 걸쳐서 주님의 종들은 활동했습니다. 어느 세대에도 종들이 없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의 종들은 그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떡과 물고기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양식의 부족을 걱정해서 그들에게 제한적으로 공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풍족함을 드러내 주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풍족하여 우리가 아무리 먹고 먹어도 넘칩니다.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광주리가 여전히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먹어도 결코 소비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남은 조각들을 거두어 광주리에 담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잃어버리지 말도록 하십니다. 여기서는 검소하신 모습과 더불어 풍성하게 거두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주워 담아서 다시 공급하도록 하신 것은 비록 부스러기일지라도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지에 대하여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검소함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예수께서 가르치신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엄청난 기적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선지자로만 기억합니다. 그들은 선지자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메시야로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기적을 행하신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후에도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하지만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기적을 행하시고, 자신들의 왕이 되어 주실 것만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고정 관념들을 깨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은 착각에 빠져 있음을 봅니다. 그들도 주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능력은 보면서도 그분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원하시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속에서 모든 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적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고 신실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사천 명을 먹이심(15:32~39)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예수께서는 이 기적에 앞서서 이미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셨던 장면에서는 제자들을 시험하시기 위한 의도로 무리들에게 어떻게 먹일 것인지를 물었지만 이제는 무리들이 길에서 쓰러질 것을 염려하셔서 제자들에게 떡이 얼마나 있는지를 묻습니다. 무리들은 사흘 동안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니느라 매우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일방적으로 보내실 수도 있었지만 굶겨서 보내지 않으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무리들에게 있었습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은 예수님의 본성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사람들의 필요들을 채워주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병든 자에게는 치료를, 굶주린 자들에게는 떡을 주심으로서 사람들의 연약함을 채워주십니다. 이것은 종교와 복음의 차이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들에게 무엇인가를 드림으로서 만족합니다. 그들의 신들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에 근거합니다. 종교가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한다면 복음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돌아가심으로서 죄를 사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종교가 의에 대한 댓가로서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라면 복음은 오직 은혜로만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면 복음은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무리들은 자신들의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보기 위해서 모여 있고, 스스로 먹을 음식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으며, 먹을 양식을 필요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으며,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기 위해서 다시 양식을 준비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기 위해서 준비하시는 모습을 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들은 즉시로 떡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다는 사실을 고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전에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제자들은 계산을 하고 먹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들의 가진 것을 가지고 와서 아무 말 없이 예수께서 행하실 기적을 목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기적을 통하여 무리들을 먹이실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결코 의심하지 않을 만큼 성장해 있었습니다.

 

한 번의 체험은 제자들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습니다. 시행착오가 그들을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실수를 하게 되면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하고나면 깊은 좌절과 침체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은 결코 완전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을 얻게 되는 순간 자신이 완전해졌을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들은 결코 완전한 상태가 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바로 말하고 걷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서 시행착오의 과정 없이 거룩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실패를 통한 시련이 왔을 때, 그는 자신을 더욱 주님께 의지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서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이 기적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예수님에게 가져왔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 제자들이 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고, 제자들은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가지고 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통한 기적을 보기 원한다면 그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그대로 가져 오면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 이상의 물질이나 재능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가진 그대로의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종교는 언제나 우리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정성과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동일하게 요구합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이는 주님이시지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있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기 원한다면 주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어 놓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시고는 또 다시 남은 것들을 거두어 일곱 광주리를 남기십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모두 먹이신 후에 무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셨다는 점입니다. 이미 사흘이나 그들과 같이 했지만 예수께서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리들은 여전히 기적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이 기적을 보이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보이실 기적은 병을 고치고, 떡을 먹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 외에는 보일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 기적을 기다리며,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강제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무리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 남자만 사천 명이나 되는 무리는 결코 적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전에 오천이었지만 사흘 동안 계속해서 따라다니면서 지금은 사천 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정치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기적들을 충분히 목격했고, 메시야로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이러한 상황들을 염려하셨습니다. 아직은 예수께서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목적은 분명히 보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들에게 보였던 기적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서 소문을 더욱 퍼져가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더욱 많아지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한 곳에 머물러 안주하는 것보다는 더욱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께는 자신의 사역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시기 위해서 그들을 흩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기적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는 긍휼이 많은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전히 제자들을 효과적으로 훈련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적은 우리 자신에게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스스로 온전해지려고 한다면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온전함 역시 주님의 도우심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편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심(8:23:27,4:35-41,8:22-25)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8:23~27)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모습을 통하여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그분에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온 자연 만물을 친히 만드셨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드셨기 때문에 다스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께서 창조의 일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사실들을 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교회에서 암송되어지고 있는 사도신경에서조차 하늘과 땅, 즉 천지를 만드신 분을 하나님 아버지로 제한하려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온 세상을 만드셨고, 그것을 친히 통치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던 것도 제자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의도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능력을 보이시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제자들에게 온전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놀라운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베드로나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어부 출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부로서 매우 노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파도가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겨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는 점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주무시고 계셨던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그들이 목수였던 예수님보다는 이 문제를 더욱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그들에게 믿음이 적음과 무서워하는 것을 지적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자 고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을 바라보는 제자들은 놀랐고,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하여 서로 수근거립니다. 그들은 이미 이전에도 많은 기적들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기적들과 가르침들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수없이 증거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고 계시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심을 보이시고 계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믿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을 통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바다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바다가 잠잠할 때도 있지만 종종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모든 것들을 집어 삼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안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인생들에게 견디기 힘들만큼의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항해하는데 매우 노련한 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미숙한 경험들로 인해서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들은 결코 이 험한 세상을 스스로 이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보듯이 그들은 배를 타기 전에도 예수께서 행하셨던 많은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파도를 잔잔하게 만드시는 일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그 배에 함께 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세상을 항해하면서 이러한 사실들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다고 선언하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하여 예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결코 적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믿음을 바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큰 믿음으로 칭찬받은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대표적으로 백부장의 믿음을 들 수 있습니다(7:1-9). 그는 자신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와 고쳐주실 것을 구합니다. 예수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시고자 하였지만 오직 말씀만으로도 고쳐주실 수 있다고 고백함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큰 믿음은 내가 결코 보지 못하였노라라는 칭찬을 듣게 됩니다. 큰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 한 마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께서 함께 계시는데 우리의 눈앞에 닥친 어려움들이 무슨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다면 어떠한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우리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며, 종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통해서 세상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욱 거대한 풍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문제 앞에서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모든 문제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목수였던 예수님보다는 어부였던 자신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더욱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어리석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보다는 자신의 지혜가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욱 적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로움보다는 거짓말이 문제를 더욱 쉽게 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보다는 현명한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욱 빠르고 정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칙보다는 세상의 보편적인 상식이 더욱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틀렸습니다. 모든 답은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분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에게 맡기는 순간 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 큰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더욱 빠르게 주님 앞으로 다가서야만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잔잔하게 만들어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다 위를 걸으심(14:22-33, 6:45-52, 6:16-21)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6:45~52)

 

예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제자들을 벳세다로 가게 하시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무리들을 돌려보내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홀로 기도하시기 위해서 산으로 오르십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사람들을 피하여 산을 오르신 경우들은 종종 목격이 되는데(1:35-39, 14:26-42), 그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다거나 혹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있었을 때 행했던 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세 가지의 모습과 동일한 자세로 예수님에게 접근합니다. 그것은 기적을 행하고, 떡을 공급하며, 십자가를 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주님의 일을 행하는 많은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유혹을 받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는 마귀와 사람들로부터 집요하게 받는 유혹들에 대하여 피하시기 위해서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그들의 왕이 되거나, 십자가 없는 사역의 완성을 결코 생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역에 방해를 받게 되는 순간 홀로 산에 으르셔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홀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바다 위를 항해하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을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고, 풍랑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과 싸우고 있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바다 위를 걸어 그들 앞으로 지나치십니다. 여기서 밤 사경쯤 되는 시간은 새벽 3-6시쯤 되는 시각으로 매우 피곤하고 지쳐있는 제자들의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앞을 지나치실 때에 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바다 위로 걸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그들로서는 자신들이 보는 것이 실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서 볼 수 있는 내용은 예수께서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성경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종종 지나쳐 가셨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33:19-22,왕상19:11,9:8,11). 왜 이처럼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시지 않고 지나쳐 가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당하는 문제 앞에 하나님 자신이 함께 하고 계심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람을 만나 풍랑으로 인하여 죽음의 위기에 있는 제자들 앞에 예수께서 그들과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이심으로서 그들을 안심시키고, 한편으로는 믿음을 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제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49,50)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문제 앞에서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배를 타기 전에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목격하고서도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이 문제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설마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고, 자신들에게 다가올 수 있을까? 하는 의심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발견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문제를 만났을 때에 예수께서 자신들의 곁에서 머물러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두려움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예수님께 맡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더욱 깊어질 뿐입니다. 사람들의 속성은 원래 악하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악한 결과만을 낳을 뿐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상황을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문제를 내려놓을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50)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그들을 안심시키셨습니다. 이러한 모습도 성경의 많은 곳들로부터 표현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115:9, 118:5, 41:4,13, 43:1, 44:2, 51:9). 문제를 만났을 때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제 해결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문제를 만난 자들이 당황하고, 의심한다면 그는 문제를 해결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평안은 그들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오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주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있던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다시 잔잔해집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모든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이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놀라며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여전히 앞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영적으로 어둠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생활 속에서 수많은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있지만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들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주님의 간섭에 대하여 경이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시며, 수많은 문제들 사이에서 친히 해결하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기억 속에 있는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들의 생각 이상의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자신들이 직접 능력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순간까지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나, 강할 때에도, 시험을 당할 때나 형통한 삶을 살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곁에서 머물러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눈은 언제나 우리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주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들까지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형통한 삶을 경험하고 싶다면 주님과 같이 우리의 눈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만 하겠습니다.

물고기 입에서 발견한 동전(17:24~27)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17:24~27)

 

당시의 로마는 그들의 식민지에서 자치적으로 거두는 어떠한 세금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에게만은 성전세를 거두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돈을 거두어 성전을 관리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드는 모든 경비들을 충당했습니다. 당시 20세에서 50세까지의 나이에 해당되는 모든 남자들은 이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그들은 일 년에 한 번 반 세겔의 성전세를 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 통용되고 있었던 화폐는 세 종류였는데, 공식적으로는 로마에서 발행한 데나리온이었고, 헬라의 화폐였던 드라크마와 유대인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세겔이 있었습니다. 돈의 가치는 데나리온과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액수였고, 세겔은 약 4배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세를 반 세겔을 드렸는데, 이는 곧 약 두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성전세를 드릴 때에 반드시 세겔로 드렸는데, 그 이유는 데나리온에는 가이사의 초상이, 드라크마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자신들이 로마의 지배아래 있지만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이 세금을 받는 자들이 와서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24)하고 묻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께서 공세, 즉 성전세를 내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즉시로 그들에게 내신다라고 대답을 하고는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대답은 실제로 예수께서 세금 내신 것을 보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다급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 대답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신중하지 못한 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25)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의 의도는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타인에게니이다”(26)라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26)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공세, 즉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에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은 그분을 따르는 자, 즉 믿고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한 그분의 통치를 받게 되며, 특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추측과 고정관념에 기대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공세, 즉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신분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핵심은 따로 있었습니다. 분명히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지만 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실족시킬까 염려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명분보다는 실족을 더욱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일들은 믿는 자들 사이에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유대인으로, 때로는 이방인으로, 때로는 부요하게, 때로는 가난하게 자신의 처지를 바꾸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정작 할례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앞에서는 할례를 받도록 가르쳤습니다. 또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말도록 요구합니다. 어찌보면 그의 행동은 우유부단하면서도 원칙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원칙은 법의 테두리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들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원칙보다 가장 중요한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27)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세금을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물고기를 잡고 그 입에서 동전을 꺼내도록 하는 기적을 보이십니다. 그 일로 인하여 제자들은 더 이상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하는 비난으로부터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오해받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권리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경우들을 목격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으면서도, 또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려 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투쟁하려 하고, 그들은 이 투쟁을 마치 순교와 연관 지어 사람들을 독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속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세상에 대항해 싸우도록 요구하고 있지 않으며,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보고 실족하지 않도록 그들의 권리를 충분히 이행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해받지 않기 위해 때로는 정당한 권리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면서도 친히 모범을 보이시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나 주장을 찾아서 그것을 충분히 누리는 자들에 대하여 지혜로운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원칙이 결코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미련하고, 연약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힘이며,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이 생명을 얻기도 하고, 또한 실족하여 멸망에 이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실족하게 만드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18:6, 17:2)고 말씀하십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 더욱 수고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신념과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기다릴 줄 알고, 꾸준히 기도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심 A(누가복음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어떤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환경이나 여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부르심은 다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제자 삼으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의 부르심의 과정을 통하여 그 의미를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실 때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무리를 가르치신 후 배를 띄울 것을 말씀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실 때 시몬은 밤새도록 수고해서 잡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을 때 잡힌 고기가 너무 많아 다른 배에 있는 사람들도 불러 두 배에 가들 채웠습니다. 모두가 놀랐고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네가 사람을 낚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부르심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주님께서 먼저 가까이 가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발견되어지는 예수님 사역의 특징이 여기서도 발견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도 시몬의 부르심을 통하여 장차 이루어갈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이 교회 역시 주님이 세우실 교회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교회를 만들어 가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올바른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은 배를 교회로 해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의해 지어진 교회(방주)만이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바다나 호수 등을 세상으로 비유하여 설명하신 모습과 연결하여 생각한다면(13;47-50), 호숫가에 있는 두 배는 세상 속에 있는 두 종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배에 예수께서 오르셨듯이 예수님이 있는 교회와 예수님이 없는 교회로 분리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주인이 되고, 교회의 머리가 되어 복음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교회는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교회는 사실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은 교회 내에서 많은 파당과 다툼을 일으키고 있고 물질과 성도수가 교회 평가의 기준이 된지 오래입니다. 값진 보석은 무척 귀합니다. 그래서 많은 가짜 보석들이 진열됩니다. 보통 사람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세상에는 복음 안에 있는 건전한(보석같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흉내만 낸(가짜 보석)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거짓 교회가 참 인 것처럼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가 증거하고 있는 주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축복, 병 고침, 만사형통, 적극적(긍정적)사고 등 오히려 복음이 금기시하고 있는 철학적 사고입니다(2:8). 이러한 것들을 영혼을 노략질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는 교리입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주인 삼는(우리의 자리를 내어주는) 교회야말로 참된 교회입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은 무리를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3). 이는 예수님 사역의 기본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일보다 가르침을 우선합니다. 충분한 깨달음과 아는 지식을 통하여 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도록 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한 거듭남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스마엘이고, 또 하나는 이삭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종이었던 하갈의 아들이었고, 이삭은 본처였던 사라의 아이였습니다. 바울은 이스마엘이 육체를 따라 났고, 이삭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다고 말합니다. 결국 육체를 따라 난자는 유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4:21-31)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4:23)" 육체로부터 난자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육신의 안위와 부요함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가고, 그 일들을 위해 뼈를 깎는 자기 희생을 하고 있는 교인들을 봅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상급 없는 지옥 자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가 은혜를 힘입어 이삭을 낳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거듭나고 자녀된 삶을 산다면 그는 약 속의 유업을 보장받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사라와 하갈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라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과 하갈은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슴을 가르치고 배워야만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시몬 베드로가 그물을 깊은데다 던질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5). 그리고 그 말씀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말씀을 듣는 일보다 우선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은 선생들이 교회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다보면 믿음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심방, 의식 등을 먼저 배웁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가지 않아 실족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약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과연 나는 구원을 얻은 자인가? 내가 오늘 죽는다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결국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자이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약속을 받아야만 합니다. 내 죄가 사해졌는가? 나는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가? 나는 과연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자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말씀을 들음으로 분명한 믿음(약속)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믿음으로부터 즉 약속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지는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심방이야말로 의미가 있고, 상급이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약속을 받고 세상을 향해 그물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찾아간 배는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는 배였습니다. 어부들은 좌절과 허탈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보장받지 못한 새로운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부들의 사이에 예수께서 찾아오셨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믿음 있는 새로운 항해를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실패와 좌절과 낙심 중에서 예수님을 만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한 번도 마음이 곤고해 본 적이 없는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무들은 밤새 수고했고 예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하실 때 순종할 수 있는 낮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낮아진 자를 찾아오십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 연못가에는 많은 병자, 맹인, 절뚝발이 ,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물이 동할 때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낫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병자는 38년 동안이나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동할 때에 아무도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육신의 질병도 고통이었겠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고독감과 소외감은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그는 지금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낫게 되었고,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5:2-8). 예수님은 지금도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 찾아가시는 대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즉 세상에서 소득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깊은 곳에서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는 그물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으로 가겠다는 베드로의 말은 곧 내 생각으로는 깊은 곳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순종하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고기가 잡힐 수 있는 얕은 곳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림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 깊은 곳은 바로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상대적으로 얕은 곳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잠재해 있는 육 적인 곳입니다.

 

주님의 생각과 명령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주님의 일에 우리의 생각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베드로는 세 번 부인을 했고,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해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바울도 자신의 의지와 생각으로 인해 실패를 경험했던 자들입니다. 이 시대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주님을 위한다고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깊은 곳으로 간 시몬 베드로와 동무들은 이미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포기하고 그물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깊은 곳으로 인도 받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생각이 포기된 채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깊은 곳에서는 육지로 헤엄쳐갈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세상으로 향하고자 하는 육신적인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진정 성령 안에서 사는 자라면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이며, 그의 자녀답게 살아갈 것입니다(요일 4:6). 하나님의 자녀가 풍성함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깊은 곳입니다. 제 아무리 수고를 하여도 얕은 곳(육적인 곳)에서는 결실 할 수 없습니다. 깊은 곳으로 항해를 계속하십시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배 위에 예수께서 반드시 승선하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제자가 될 것을 청했을 때 예수님은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대 교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바나바는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소유의 얼마를 감추었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적인 포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그들의 삶의 터전인 배와 그물 그리고 바다를 뒤에 두고 예수님을 따르므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자기 포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모든 요소들은 우리의 생각과 삶 속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삶의 터전 역시 바뀌어져야 합니다. 베드로와 동무들이 그들의 터전()을 버리고 떠났듯이 우리를 이 땅에서의 소망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희생이라도 감수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는 가난한 마음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좇는 참된 제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영혼에 찾아 오셨고 문제를 해결하시며,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따를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의 과제가 있다면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더 깊은 곳으로 항해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삶으로 인도 받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삶으로 인도 받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삶의 모양이 있어지길 바랍니다.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심 B(21:1~14)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21:1~14)

 

디베랴 바다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갈릴리로, 누가복음에서는 게네사렛로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곳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처음 만났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처음 만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약속을 하셨던 그 장소에서 또 다시 제자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밤새도록 고기를 잡기 위해 수고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될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이 있는지를 물었고, 없다고 대답하자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말씀대로 그물을 던지자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당길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힙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인생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진단해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에 절망적인 마음으로 또 다시 배에 오릅니다. 그리고 고기를 잡기 위해 애를 쓰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께서도 그들에게 가르치신 바 있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15:5)는 것이 그들이 반드시 명심하고 있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도 끝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도 절망적이었고, 삶마저 그들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들에게 다가 오셔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절망적인 인생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썩어질 것을 위해서 수고할 것이며, 그것조차도 그들의 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지식이 있다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꿈을 꾸면 그대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결코 그들의 바람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언가에 집착할수록 그는 더욱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셨다는 점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그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기 위해 수고했지만 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먹을 것이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그러한 질문을 하신 것은 제자들의 현재 모습을 일깨우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현실을 알고, 순종하도록 하게 하시기 위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고, 말씀을 바르게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회개하라고 수없이 강조해도 듣는 자들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인정하고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무언가를 듣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상태가 극히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의존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여전히 절망적인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은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 본 제자는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주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예수님께 다가 선 자는 베드로였습니다.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가장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했던 자였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교묘하게 그의 열정을 이용하여 올바로 섬기는 일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목숨을 다하여 섬기겠다는 다짐을 한 자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의자와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도구가 되기에 매우 적절했고, 결국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스스로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가장 큰 실수는 열정은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열정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고 열정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탄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열정을 품기 전에 먼저 그분의 말씀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베드로와 같은 실패를 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들이 거둬들인 결실로 함께 나누시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수께서는 친히 먹을 것을 만들어서 공급하시지 않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물을 가져오도록 말씀하셨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장면에서는 어린 아이의 도시락, 즉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먹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열매가 있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가진 것들을 가지고 일을 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무작정 주님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가진 것들을 사용하여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과 명예와 권세와 지식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인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주님께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나누었을 때, 아름다운 교제와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까지 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께서는 교제를 청하고 계십니다. “와서 먹으라제자들은 세상에 보내심을 받기 위해 먼저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가 없이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지식이 그들을 훌륭한 사역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또는 좋은 환경과 훌륭한 지도자 아래서 배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좋은 사역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틀렸습니다. 사역의 기본은 먼저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가르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바로 주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주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그분의 훌륭한 일꾼으로서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주받아 말라버린 무화과나무(21:17~22)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21:17~22)

 

성경 안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교훈은 이 기적이 열매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AD70년경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하여 그 백성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서 1948년 그들이 다시 국가를 회복할 때까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비유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믿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시고, 마가복음에서는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24:32~33)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8년이 바로 무화과가 잎사귀를 낸 시점이라고 주장하며 예수께서 이 때 이미 재림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아닌 한국인으로 재림하셔서 지금은 죽고 없지만 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성경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가르쳐야 하겠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 추정하여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식물인 것이 틀림이 없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다 현실적인 교훈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무화과를 향하여 저주를 하는 순간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놀란 제자들에게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21,22)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기적의 목적이 믿음의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일으킬 수 있는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삶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믿음의 기도를 하는 자세는 어떤 모습일까요? 바른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는 목적을 하나님께 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기도는 언제나 자기중심으로 기도합니다.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중심으로 기도합니다.

 

바른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선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기도, 그것이 바른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기도는 언제나 내 뜻만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바른 기도의 자세는 내 뜻을 주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기도입니다. "주님 제 생각은 이렇지만 주님의 생각이 그렇지 않다면 제 생각을 바꾸겠습니다." 그는 언제나 주님의 뜻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기도는 주님의 뜻에는 관심없이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바른 기도의 자세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 가운데 끊임없이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구했지만 이제는 주는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워하는 마음으로 원망스러운 기도를 했지만 이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문제가 있어서 기도를 하다가도 결국에는 나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고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기도는 내가 달라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 기적을 통한 또 하나의 교훈은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참으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용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신 이후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11:2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동일한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주기도문을 통하여 가르쳐지기도 하였습니다(6:14-15). 용서에 관한 교훈은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반드시 기억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매우 중요하게 가르쳐지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누구든지 용서할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분쟁과 다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떠나간다면 그곳에서 평화를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상대방을 비방하고, 욕하면서 그것이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정의로운 일이라면 누구든 정죄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디에도 누군가를 실족시키며, 판단하고 모욕을 주는 것에 대하여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겨줄지라도 인내하며,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의 모습이 주님이 보실 때 온전할까요? 그분의 신실하심을 기준으로 과연 우리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얼마나 놀라운 인내를 하고 계신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분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 대하여 인내하시고 끝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인내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만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 시대에서 반드시 행해야할 책임이자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심(11:38~44)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11:38~44)

 

죽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린 기적은 요한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은 생명의 떡으로, 7장에서는 생명수로, 8장과 9장에서는 생명과 빛으로, 10장은 선한 목자로,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기록한 11장에서는 부활의 주로 나타나셨습니다. 즉 이 기적을 기록한 것은 단순히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단순한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만나게 될 부활의 소망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 더욱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슬프게 만듭니다. 물론 장차 다가올 세상에서 서로가 만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 땅에서의 모든 인연들을 끝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슬픔은 마르다에게도, 마리아에게도, 심지어 예수님에게조차 매우 슬픈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는 장면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 하셨습니다(33). 죽음은 모든 사람들을 슬프게 합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장차 만날 수 있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 천국이나 지옥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죽음을 더욱 가슴 아파 하는 이유는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인 된 자들은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더불어 살게 될 것이지만 우리 가운데 누군가 불신자로 세상을 살아가다 죽게 된다면 지옥을 거쳐 불 호수에 던져져 완전히 소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에 대한 마르다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매우 낙심하였고,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실망스러운 것은 그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지만 현재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20-24). 그녀는 부활의 신앙을 묻는 질문에도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27). 그러나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하여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라고 말하면서 탄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하여 어떠한 교훈을 주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십니다. 결국 그의 믿음을 더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사로의 사건을 통하여 기적을 보고자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의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교훈하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표적을 보는 신앙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발견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입으로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36)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본 모습입니다. 그분은 사랑입니다. 그 모습은 전혀 가식적이지 않으며,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입술로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하면서 구제를 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봉사를 합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물질이나 말로서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슬픔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그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그분의 진심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진심이 전해질만큼의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면 돌을 옮기는 것도 명령하시면 충분히 가능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돌을 옮겼고, 예수님은 그 상태에서 기도하심으로 나사로를 나오라 명령하셨고, 나사로는 걸어 나왔습니다(39-42).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으로 주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는 응답을 위해서는 먼저 그에 대한 준비에 대하여 성경의 많은 곳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했던 장면을 보십시오. 그는 응답을 위해서 반드시 제단을 쌓는 수고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응답을 위해서는 반드시 수고가 뒤따라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사로를 통한 교훈의 핵심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분이십니다(1:8). 또한 성도들에게 부활을 약속하신 분이시기도 하십니다(6:54).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심으로서 그 약속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보이셨습니다. 그 약속은 확실한 것이며, 예수께서는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분임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데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장차 다가 올 세상에 대하여 아무런 소망이 없다면 그보다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더욱이 천국에 이르지 못하고 지옥으로 던져지게 된다면 그것은 더욱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반드시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수고한 것에 대하여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다가 올 세상에서 주님과 더불어 세상을 통치하는 영광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영광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은 이 땅을 사는 동안 당하게 될 수많은 고난들을 견딜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9:18~26)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9:18~26)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5:22~24,35~43)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8:41~42, 49~56)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은 성경의 순서에 따르면 첫 번째 부활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에 관하여는 예수님의 사역 전반에 걸쳐서 강조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 신앙을 갖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도 능히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이일을 행한 목적은 표적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도록 하시기 위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한 뒤 백성은 흩어져서 각 지역마다 회당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이곳을 통하여 율법을 낭독하고, 토론을 했으며, 그들의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야이로는 그 회당을 대표하는 자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마치 각 지역교회의 담임목사와 같은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이로가 당시로서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백성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있는 분이셨지만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종교 지도자로서 예수님보다 오히려 더욱 나은 위치에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 나와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간청하여 자기 집에 들어오셔서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던 것은 순전히 어린 딸 때문이었습니다. 병들어 죽게 된 딸을 살려보겠다는 마음이 결국에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주님 앞에 나오도록 만들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모습은 마치 예수께서 죄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구하시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을 망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목숨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야이로는 이러한 사랑의 본을 보였던 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체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살아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께서 자신의 딸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까닭에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믿음의 확신이 야이로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도록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가 예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딸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있었다면 그분 앞에 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을 예수님 앞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확신 있는 믿음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용기를 줍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오시는 동안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을 고치시는 일이 생겼고,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자 이미 어린 딸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딸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합니다. 야이로에게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야이로는 이미 절망 중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권면하시면서 용기와 소망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야이로가 자신의 딸이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야이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절망적인 순간이었겠지만 그들 앞에는 영광스러운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야이로와 같이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잊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소망을 갖는 것은 마치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광스러운 날들을 고대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그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 중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만 데리고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들어 가셨던 것은 증인들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만을 기억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나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먼 곳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언제나 기적과 표적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믿음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비웃음의 대상입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부활신앙도 비웃음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어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나 무덤에서 존재조차 사라져버린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허망한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며,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것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이 그들은 부활의 증거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십니다. 여기서는 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모습과 죽음에 대하여 단순히 잠자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예수께서 소녀를 마치 잠에서 깨워 일으키시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죽은 자들에 대하여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야이로의 딸과 같이 주님의 재림의 날에 모두 일어나 그분의 곁으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자 그 부모는 모두 놀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당부하십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에게로 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기적을 통하여 보이고 싶었던 것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친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일깨우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기적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거짓 전도자들은 자신들이 그 능력을 위임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이유가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수많은 기적들을 보면서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있습니까?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심(7:11-16)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7:11~16)

 

성경 안에서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장면이 세 차례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고, 또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이며, 마지막으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특별한 의식이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말씀으로 살리셨다는 것인데, 나사로에게는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는 달리다쿰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으며,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는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안겨다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의식이나, 행위들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새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목격한 모든 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마음 안에 품고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세대를 통해서 과부는 가장 연약한 존재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곧 머리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5:23). 그녀의 모습은 마치 육신을 입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소망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놓여 있으며,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3:10,23,6:23,8:44). 그렇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붙들며, 소망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는 비록 소망이 없는 자였지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이 과부에게 커다란 위로였으며,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었을 때 과부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외아들이었으니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녀로서는 더 이상 삶에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통곡하였고, 그녀가 슬프게 우는 모습은 예수님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나인성 과부와 같은 처지는 아니지만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도 그녀와 같이 절망적인 상황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직 외아들을 의지하고 살았던 과부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권세와 지식에 매여서 그것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되었을 때 스스로 절망의 늪에 빠져버리는 모습을 봅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대부분 자신이 소망 삼고 있었던 것들이 무너지면서 삶의 희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과부의 모습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시고 나르던 사람들을 멈추어 세우십니다. 그리고는 청년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녀에게 청년을 넘겨줍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울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다시 그녀에게 소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잃었던 외아들을 다시 품에 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의 말이나, 물질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되찾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들을 살리시는 모습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문제를 보시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물질이나 명예, 권세와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매우 일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들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죄인의 신분에서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모습을 통하여 부활의 신앙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볼 수 있게 합니다.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셨다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광경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하였고, 또한 예수께서는 실제로 그리스도로서 지금은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시고, 다가 올 세상에서는 만왕의 왕이 되시겠지만 공생애동안 사역을 하시면서 선지자로서 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충격적인 고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셨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들은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전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하여 알고는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 담아 두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출석하고 있지만 막상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은 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같습니다.

 

부활신앙은 교회 안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장면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셨던 이유도 바로 그들에게 부활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활신앙을 통하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을 통하여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능력만을 생각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진리를 무시하는 자들을 경계하십시오. 주님께서는 기적을 보고 믿었지만 막상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참 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면서부터 맹인인 자(9:1~7)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9:1~7)

 

예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고쳐주십니다. 이 기적은 요한복음 9장 전체에 걸쳐서 소개될 정도로 매우 의미 있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적으로 보자면 단순히 한 사람의 눈을 고쳐주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성경을 통하여 매우 큰 의미의 내용들을 말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고쳐주시는 과정에서 제자들과의 대화는 바로 이 기적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먼저 맹인 된 사람을 보면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고 있는 질문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즉 맹인에게 죄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맹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제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처한 모든 환경이 죄 문제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생각들은 오늘날 기복신앙을 가진 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했을 때, 복을 받게 될 것이며, 죄를 짓게 된다면 심판을 받아 고난 중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난과 질병이 오는 것은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결코 동의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닥친 어려운 환경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들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맹인을 고치시는데 있어서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이겨, 맹인 된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는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맹인 된 사람이 그길로 가서 씻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에 관하여는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어떤 의미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맹인이 눈을 떴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각각 다른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고복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맹인 된 사람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그에 대하여 맹인 된 사람의 대답은 한결 같이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5)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전에는 맹인이었고, 이제는 예수님을 통하여 눈을 뜨고 있을 뿐입니다. 어떠한 말로 그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알고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맹인이었던 과거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일들은 하나의 원칙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사망의 상태에 놓여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실에 대하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맹인이 전에는 맹인이었고, 그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는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전에는 죽을 몸이었다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구원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맹인을 고치시는 기적을 통하여 교훈하시고자 했던 대상은 바리새인과 유대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실제적인 맹인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두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야이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으로 보였지만 영적으로는 맹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은 전에는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회유를 당하고, 심지어 협박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이 과거에 맹인이었으며, 지금은 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만 자신의 눈을 고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가 빛 가운데 사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빛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자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영적 맹인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일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비방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위협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지도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종교적 위치와 신념을 위해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들을 모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그들까지도 자신들의 의지대로 행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유대인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목적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눈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마음의 문을 닫아 놓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께서 죽게 될 것이고, 삼 일만에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토록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기적은 보고 있었지만 그분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눈을 뜨고 보는 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빛 가운데 사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관점은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맹인이며, 앞을 보지 못하는 자는 빛 가운데 사는 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진정한 눈은 육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있다고, 단순히 시력이 좋다고 그를 빛 가운데 사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은 마음을 따라 움직입니다. 사악한 것들을 사모하면 그들은 언제나 악한 것들만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마음을 가진 자는 주님의 일들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5:1~9)

 

베데스다 연못을 보면서 어느 민족이나 기적, 혹은 표적을 바라는 마음은 같은 것이라는 점을 보게 됩니다. 그 연못은 매우 평범한 것이었지만 연못의 주변에는 각색 병든 자들이 누워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때에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었고 물을 휘저은 뒤에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에 걸렸든지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한 병자가 38년이라는 세월을 머물러 있었던 것을 보면 실제로 병이 나아서 돌아간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기적이 없다면 사람들은 외면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나아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보면 그는 스스로 거동을 하기 힘든 사람으로 보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연못에 갈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라고 말합니다. 그는 낳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간절했지만 현실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편에서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평생 동안 겪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의 손을 잡아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도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과 같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살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의지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병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 이 질문에 대하여 그는 큰 기대감 없이 대답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그는 아마도 예수께서 천사들이 베데스다 연못의 물을 휘저을 때에 자신을 데려가 줄 것으로 생각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있고난 후 병자는 온전하게 되어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자신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상황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38년 된 병자는 다만 베데스다 연못에 넣어주기를 기대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연못에 갈 필요 없이 즉시로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이기도 하며, 놀라운 은혜가 그에게 주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안에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삶을 조금만 도와주시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도 그들의 일상에서 현재를 극복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문제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근본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와 대화하시는 장면을 통해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고 하십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통해서 죄 문제를 해결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근본문제이기도 하며, 예수께서 반드시 치유하고자 하셨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사건들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 즉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일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을 보고는 유대인의 절기, 즉 안식일을 어겼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이일로 예수님을 핍박하여 죽이고자 결심합니다(5:16).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행위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그들의 왕, 즉 메시야이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그들은 알아야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그분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동방의 박사들로부터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오셨음을 듣고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분께 가서 경배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롯을 도와 그분을 죽이려는 일에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경배한 이들은 박사들과 목자들, 그리고 한나와 같이 기도하는 노인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처음부터 메시야가 그들 가운데 오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변화를 더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던 사건은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의 현장마다 있었고, 그것을 은폐하거나 오히려 악용하여 예수님을 마치 마귀의 조종을 받는 사악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동안 그분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야라는 사실에 대하여 받아들일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토록 거부하는 것은 그들 앞에 다가 올 엄청난 변화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분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마귀의 자녀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방식들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와 상관없이 살아야 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조차도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18년동안 몸이 구부러졌던 여인(13:11~17)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3:11~17)

 

병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답은 아마도 부주의함, 즉 몸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사람들이 몸 관리를 잘 못하는데서 옵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사람의 부주의함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옳은 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그 질병이 사탄, 혹은 마귀로부터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18년 동안 몸이 구부러졌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질병이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 여인의 질병에 대하여 말하기를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1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사탄에 의하여 결박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약 성경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탄, 혹은 마귀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가령 당대에 의롭다고 인정받았던 욥이라든지, 아니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의 소녀도 점치는 영에 사로잡혀 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16:16-18). 그들은 사탄에 의해서 질병을 얻었고, 심각한 고통을 받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질병이 때로는 사탄에 의해서 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 가운데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그들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 여인을 통하여 어떠한 교훈을 주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 여인이 1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허리가 구부러진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그 기간 동안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땅만 바라보고 사는 신세였습니다. 이 여인은 허리를 펴고 보다 높은 곳을 보기 원했지만 사탄에 의해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록 육신이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세상만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 원하고, 더욱 영광스러운 삶을 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여전히 땅의 일에 매여서 몸과 마음을 움추리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사탄이 매우 즐거워할만한 모습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인생이 땅의 일만을 생각하고, 다가 올 세상에서 구원이나, 어떠한 보상도 얻게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허리를 펴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을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께서 그녀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주님께 다가갈 엄두를 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연약한 상태이며, 매우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손을 내밀고 그들의 문제에 접근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모든 세대에 걸친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종교가 사람의 의지로 접근해 가는 것이라면 복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안수를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안수는 제사장들이 짐승들에게 죄를 전가, 즉 넘겨주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안수는 죄 없으신 그분께서 그녀의 죄를 덮으시기 위해서 행하십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이 여인은 몸을 곧게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처럼 안수는 어떤 사람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안수의 목적이 이렇다면 함부로 안수를 받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건치 못한 자에게 안수를 받게 된다면 그도 역시 매우 위험한 믿음의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사는 자로로부터 안수를 받게 된다면 영적으로 매우 유익한 삶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회당의 치리자는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어겼노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비교적 정확한 율법의 기준과 판단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14)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 행위를 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일이 아니라 해방을 시키는, 즉 진정한 안식을 주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일한 자들에게 쉬도록 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회당의 치리자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그날을 스스로 고립시킴으로서 오히려 더욱 자유롭지 못한 날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흔히 발생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 한 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속박들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방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허리를 구부러진 채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가 올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욱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의 치리자들을 향하여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이 여인의 병을 고친 것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안식일에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끌고 가서 물을 먹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안식일을 어기고 있다고 말씀하시기보다는 그들에게 어떤 것이 안식일의 정신에 더 맞는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병자를 해방시키는 것과 짐승에게 물을 먹이는 것,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이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인가? 이일이 있은 후 그분의 대적들은 다 부끄러워하고 모든 사람들은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영광스런 일로 인하여 기뻐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어떠한 일들을 주님께서 기뻐하실 지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의 삶을 고립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자유로운 삶, 즉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하늘을 소망 삼고, 성령 안에서 더욱 선한 일들을 위해서 살도록 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바르게 헤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9:20~22,5:25~34,8:43~48)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9:20~22)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5:25~34)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8:43~48)

 

혈루증이라는 것은 피가 엉키고 뭉쳐서 등이 굽는 병을 말합니다. 등이 굽은 여인에 관하여 이미 소개한 바가 있는데 그녀도 역시 혈루증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이 여인이 이 병으로 인하여 매우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으로 인하여 자신의 가진 재산을 모두 소비하였습니다. 그토록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은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고 밀려드는 무리 가운데 들어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녀가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도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가 당한 고통은 예수님께로 인도했고, 그녀는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 극단적인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자살을 하거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만드는 경우를 목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인생을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만들뿐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인생이 평탄할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의 시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그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며, 얼마나 지혜로운 결정을 하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정해질 수 있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살기 원했고, 건강을 회복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녀의 귀를 통해 들려온 소식은 예수께서 어떠한 병이라도 고치실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제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사력을 다합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향해 손을 내미는 순간 자신의 몸이 깨끗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지나온 시간동안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한 순간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풀어 주는 열쇠와도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교훈은 인생에서 절망적인 상황이 오히려 더욱 큰 희망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혈루증을 앓던 이 여인이 건강했더라면 이토록 간절하게 예수님에게 다가서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절망적인 상황은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더욱 예수님을 찾고, 비록 병든 몸이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그분의 곁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절망의 순간은 예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수많은 왕이 있었지만 믿음의 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지나온 세월들이 매우 절망적인 시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사무엘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형통한 길로만 향했더라면 아마도 사울과 같이 교만해져서 결국 주의 영이 그에게서 떠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당한 고난의 세월은 더욱 주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고, 그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승리하는 믿음의 삶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여인은 세상이 자신의 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 고침을 받기를 소망했지만 오히려 그녀의 병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해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더욱 심각한 상태로 만들어 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물질과 명예, 권세와 지식 같은 것들이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죽을 몸을 다시 살리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더욱 이른 시간에 사망으로 이르도록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생명의 소식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귀를 막고 시끄럽다는 듯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오직 이러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 땅에 소망이 남아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주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시간들은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와 주기를 고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리 가운데 섞여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분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녀가 건강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가히 투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간절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녀의 모습 속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 자들이 강한 확신 속에 산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주님의 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만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헌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장차 주님으로부터 받을 보상을 생각하고 사는 자라면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적극적인 삶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행착오들은 분명히 더욱 확신 있는 믿음 안으로 이끌어 줄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지만 실수가 많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더욱 성숙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생각했었던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닭울음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처절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오히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신다고 고백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생각조차도 주님께 내려놓을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 형통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의 시간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의 미련을 버리고 주님께 다가가는 자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시절들을 보냈던 한 여인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눈 먼 두 사람(9:27~35)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9:27~35)

 

예수께서 눈 먼 사람을 고쳐주시는 장면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동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각기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면서부터 맹인인자”(9:1-41)바디매오”(20:29-34,10:46-52,18:35-43), 그리고 한 눈 먼 사람(9:22-26)은 모두 맹인이었지만 예수님의 긍휼을 입었던 다른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맹인이 눈을 뜨게 하시는 장면을 통하여 이미 영적으로 맹인 된 자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는지를 소개하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주님께 다가가는 맹인들을 통하여 은혜를 얻게 되고, 구원에 이르는 길들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을 통하여 소개되고 있는 맹인 두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27) 이 말은 곧 그들에게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주님의 도우심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자신의 처지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이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인생을 끝내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그들은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조건이 무엇일까요? 많은 복음 전도자들은 대부분 복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듣는 자들에게 한 가지 조건이 이미 완성 되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복음, 즉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구원하심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들은 복음의 필요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위험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설령 그것이 다가올지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복음이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일들은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이며, 불확실한 미래를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던져지게 될 자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 놓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맹인 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육신의 눈은 열려있지만 영적으로 맹인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구원을 얻을 자들은 먼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즉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맹인 된 두 사람은 예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사실과 또한 그분의 능력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 속에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합니다(28). 그리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29)고 말씀 하실 때에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어찌 보면 주님의 긍휼은 매우 조건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편에서 바라볼 때에는 매우 조건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편에서 볼 때는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은혜를 선물로 사람들에게 건네주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곧 그분이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에게 선물을 받게 될 때에 그것의 정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선물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뇌물로 둔갑하기도 하고, 때로는 올무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선물의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는 자가 어떠한 마음인지를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사랑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던 자들이었다가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이러한 일들을 알기 원하시고, 복음을 듣는 자들이 스스로 깨달아 알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즉 주님이 주시는 선물의 동기는 그 자체가 순수할 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온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바로 은혜의 때이며,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없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며, 마지막에는 불 호수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맹인 된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구걸을 하며, 사람들의 도움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세상에 기대어 사는 자신을 보면서 한 숨을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줄만한 놀라운 기회가 그들 앞에 다가왔을 때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분을 소리 놓여 부르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언제나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주님을 가까이 두고도 영접하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전하는 이들도 부지런히 다녀야 하겠지만 현재 우리가 복음을 듣고 있다면 이러한 기회들이 언제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운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디매오(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10:46~52)

 

맹인이 눈을 뜨는 장면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지만 실명이 거론된 것은 마가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디매오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마20:30~34과 눅18:35-43에서의 기록에도 바디매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처럼 그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 바디매오에서 는 아들의 의미를 갖습니다. 즉 그의 이름은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것과 같이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매오라는 이름의 뜻이 존귀하다는 의미를 가지고는 있지만 사실상 바디매오는 세상에서 존재감 없이 다만 디매오의 아들로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어떠한 소망도 없었고, 또한 누구도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큰길가에 나가 구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까닭에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고,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손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냉냉하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눈을 뜨고는 있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바디매오는 그들보다 더욱 간절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인생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스스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들인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절망적인 인생에 소망의 빛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반응은 매우 즉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귀에 예수님이라는 말이 들리자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7) 이러한 표현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다가 올 때 일반적으로 썼던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매우 간절했습니다. 그의 모습은 주님께 다가가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소리를 지르며 주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잠잠하라고 말합니다. 예의 없고 냄새나는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주님의 교회는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세상에서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는 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취하는 조치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이며, 그들을 치유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듯이 죄인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더욱 크게 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그가 이처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에게 있었고, 또한 그분만이 자신을 봐 주실 것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간절함은 사람들의 방해를 뛰어 넘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에 수많은 방해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다가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이러한 간절함이 예수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를 부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서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비록 짧은 순간이기는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의 두 가지 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막는 자와 또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들은 오늘날 많은 복음 전도자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들도 때로는 주님의 교회에 오는 것을 막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초정도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예수님의 곁에 있었던 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바디매오를 초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 전도자들이 죄와 사망 가운데 놓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초청을 들은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겉옷을 단순히 벗는 것이 아닌 내버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겉옷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구걸하는 자의 겉옷은 매우 더러워진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겉옷을 버린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죄와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리고 구원의 안전만을 믿고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갖게 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는 지속적으로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잘 못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경고하시고, 책망하시며, 때로는 채찍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주님께 다가오고, 또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죄를 버려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바디매오의 대답은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51). 바디매오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즉시 눈을 뜨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바디매오의 기도는 매우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의 소원에 믿음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디매오의 시력이 회복된 것은 믿음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병 고침을 받는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의 힘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조차도 바디매오에게 자신이 고쳤노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이 말은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모든 해결점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과, 그 안에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모든 과정들이 오직 믿음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바디매오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한 눈 먼 사람(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8:22~26)

 

이미 맹인에 관하여는 앞에서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예수께서 자신이 눈 먼 것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다가 온 자들이지만 여기 맹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가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서 끌려 온 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눈을 떠야겠다는 절박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맹인이었지만 자신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의 주변 사람들을 그를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서 그의 눈을 뜨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눈 먼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고, 그분의 손에 의해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교회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영적으로 눈 먼 자들이 멸망을 향해 가는 모습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교회 안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여기 맹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 온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만 자신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다가 올 놀라운 삶에 대하여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소 짜증스럽게 주님의 교회에 앉아서 설교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에게 들려질 복음의 말씀이 그들의 삶을 놀랍게 변화시켜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곧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을 통하여 또 하나의 독특한 장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눈을 고쳐주신 이후에 집으로 돌려보내며 마을에 들어가지도 말고 마을의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예수님은 맹인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기를 원치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광경을 통하여 가르치시고자 하는 더 큰 목적은 맹인과 은밀한 관계를 갖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회중 속에서 찾으려 합니다. 좋은 교회, 좋은 목사, 혹은 좋은 교회의 회원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찾아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물론 좋은 교회나 목사, 성도들은 예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개인적인 관계를 갖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주님의 부르심을 입게 되었을 때에 아무리 좋은 교회 안에서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구원하심 아래 놓여 있지 못한 자라면 그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오히려 그가 세상 속에 버려진 상태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구원의 상태에 놓여 있는 자라면 반드시 부르심에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부자는 비록 화려해 보였던 자였지만 구원과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돈으로 구원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사는 동안 많은 제물과 구제를 통하여 자신의 의를 쌓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구원하심과 상관이 없는 상태로 살아갔습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비록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멸시 받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결국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즉 이미 구원받는 상태에 놓인 자였습니다. 구원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는 자는 오직 자신입니다. 그것은 곁에 있는 누군가가 확인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비밀과 관련하여 보다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늘의 비밀을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세상이 멸망을 당할 것처럼 위장하여 사람을 속이고, 믿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심지어 이미 재림했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혼란 속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한 자입니다. 맹인을 통해 보듯이 예수께서는 은밀하게 마을 밖으로 가셔서 그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셋째 하늘을 경험한 자입니다. 그가 본 것은 지금까지 이 땅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보았던 영광스러운 모습을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마음 안에 비밀로 간직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밀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무수히 많은 어려움들과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동안 큰 힘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 안에 믿음의 비밀들을 간직해 두기를 소망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 안에서 어떠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소문내고 다니는 모습을 봅니다. 그것이 때로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부끄럽게 만듭니다. 나와 더불어 활동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보다 많은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확신가운데 승리하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맹인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점진적으로 고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맹인은 사람들이 나무처럼 생긴 채 걷는 것을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다시 안수하시고 쳐다보게 하실 때에 맹인은 회복되어 모든 사람을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안수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단 한 번에 고치실 수 없는 분으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첫 번째 안수가 끝난 후에 맹인은 사람들이 나무처럼 생긴 채 걷는 것을 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맹인의 믿음이 적었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처음 말한 것과 같이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의 눈이 뜨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안수를 통하여 자신이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안수가 있게 된 순간 그는 모든 사람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큰 기대감이 없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확신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의 갈급함에 의해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분명한 믿음의 삶을 위해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비밀스럽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7:31~37)

 

인생을 살면서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비극적인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들음에서 온다는 사실(10:17)을 생각한다면 더욱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고 일도 할 수 있는 자들이지만 복음의 신비들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인생들입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들을 위하여 수화를 가르치고, 글도 읽을 줄 알도록 하기 위해 힘쓰는 많은 선생들을 통하여 최소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소개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도 하지만 예수님 당시를 생각한다면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에 여기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무리들의 손에 의해 예수님께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맹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사역에 관하여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사역을 보고도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바르게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실제로 눈을 뜨고는 있지만 들을 수 없었고, 또한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맹인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했던 성경의 기록에서 보는 것과 같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였습니다(6:9,13:14,4:12,28:26). 비록 볼 수는 있어도 듣는 귀가 없다는 그는 맹인과 다름이 없는 인생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는 보고 있지만 듣지 못해서 구원의 길을 포기하고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습니까? 마치 홍수와 같이 수많은 경로를 통하여 사람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복음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게 될 것과 그들 스스로의 인생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복음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여기 소개되고 있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곧 이 시대의 수많은 영적 맹인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무리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는 비록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 올 수 없었습니다.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끌려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맹인들도 무리들의 손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통해 우리는 볼 수는 있지만 듣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그들의 귀를 열어 줄 책임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로 데려가셔서 치료하십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자주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원치 않으셨고, 또한 이 기적을 통하여 주님의 오신 목적을 보이시기를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는 더욱 많은 기적과 능력들을 보이심으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 결국에는 그들의 왕국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기적을 보임으로서 전능하신 분으로서 힘을 과시함으로 그분의 사역을 완수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린 양이 되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것만이 성경에서 예언대로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할 수 있는데, 예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심에 있어서 손가락을 두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 단순하게 사람들의 병을 말씀으로 치료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복잡하기도 하며, 또한 혼란스러운 방법으로 치료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손가락을 두 귀에 넣으신 것은 그의 막혀 있는 귀를 뚫으시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침을 뱉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는 장면은 비록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청결하지 않은 모습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의 혀에 대심으로 그의 혀가 말씀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통하여 말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고 말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바다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탄식 후에 두 귀가 열리고 그의 혀를 묶는 줄이 풀려 그가 분명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표현을 빌리자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이전에 두 귀는 닫혀 있었고, 혀는 줄로 묶여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닫힌 귀를 열고, 줄로 묶여 있는 혀를 풀어주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귀가 닫혀 있고, 혀는 묶여 있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지 않으려는 자세도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불신자를 향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더욱 큰 탄식은 아마도 믿는 자들이 귀를 막고, 스스로 혀를 묶어 두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사역을 하시면서 가장 마음 아파했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손에 성경을 들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지만 정작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또한 신앙의 양심을 따라 말하지 않고, 권력자들과 군중들이 두려워 그들에게 끌려다녔던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들으려 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탄식하실 것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향한 탄식이 결코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신 후에 그를 돌려보내면서 알리지 말도록 권면하십니다. 그 의도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하는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치료가 된 후 그들에게 명하면 명할수록 그들이 더욱 더 그것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소문으로 인하여 수많은 병자들과 연약한 자들이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람들 사이에 더욱 퍼져만 갔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이 소문이 퍼져가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한 나병 환자(8:1-4, 1:40-45, 5:12-15)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8:1~4)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1:40~45)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5:12~15)

 

나병은 일반적으로 문둥병으로 불려져왔으며, 오늘날에는 나균을 발견한 한센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고 불려지는 병입니다. 이 병은 나균(癩菌)에 의하여 감염되는 만성 전염성 난치병으로 피부에 살점이 불거져 나오거나 반점 같은 것이 생기고 그 부분의 지각(知覺)이 마비되며 눈썹이 빠지고 손발이나 얼굴이 변형되며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 병균이 몸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서서히 신체부위들을 썩게 만들어 결국에는 뇌까지 전이되어 혼수상태에 이르게 하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한 번 걸리면 약 20-30년 정도 앓다가 사망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이 병은 선천적인 것은 아니며, 전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병은 그 기원이 오래되었으며, 지대가 낮고 습한 열대나 아열대 지방에 가장 많이 발생합니다. 특히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와 태평양 연안의 섬들에서 대다수 환자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고된 환자 수는 적어도 200만 명이나 실제 감염된 사람의 수효는 1,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병이 전염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격리 수용을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까닭에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나병 환자촌이 따로 형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표적인 환자촌으로 소록도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 안에서 나병은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나병이 걸린 자에게 대하여 부정하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13:3). 성경이 이처럼 특정한 병에 걸린 자에 대하여 부정하다고 정의한 것은 그 병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병은 나균이 침투하여 서서히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질병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몸 안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머무르며 살을 썩게 만들고 변형을 시키며, 무기력하게 만들어 놓고는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마치 우리의 인생이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지만 서서히 약해져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 까닭에 여전히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자신이 살 수 있는 길들을 찾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 나병 환자를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정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 부정함으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람의 군대장관이었지만 나병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왕은 그를 엘리사에게 보내 치료받기를 구했지만 그는 자신을 상대조차 하지 않았던 엘리사를 보고 분노하여 치료받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종들의 권유로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담굴 때 그의 몸이 어린 아이와 같이 깨끗하게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왕하5:1-14). 그는 깨끗한 몸으로 다시 아람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엘리사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말씀만으로 그를 치유하였습니다.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나병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순종하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종들의 설득으로 순종하게 된 나아만은 깨끗해 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집니다. 세상의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죄를 사해주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사실을 불쾌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종교들과는 달리 어떠한 노력과 헌신이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은 매우 성의 없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종들과 같이 많은 복음 전도자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켜 결국에는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기 한 나병 환자는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과는 달리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반드시 자신을 정결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의 믿음을 보셨고, 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는 깨끗함을 입었고,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는 예수님의 당부를 듣고는 그곳을 떠나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알리고 널리 퍼뜨립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도 역시 예수께서 당부하셨던 것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 나병 환자는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높여드리기 위해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자랑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모든 질병과 가난, 그리고 로마로부터의 속박에서 건져주실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실이 너무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어린양이 되셔서 인류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비교적 초기에 일어난 기적이었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단순히 사람들의 우상과 같이 기억되어지기 보다는 메시야로서 예언 된 말씀을 따라 움직이실 것을 바라고 계셨습니다.

 

결국에 예수께서는 도시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의 외딴 곳에 계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시의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오는데, 이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며, 또한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기적을 통하여 그분의 사역을 완성하실 의도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기적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주님은 주님의 교회 안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며, 또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최종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딤전2:4). 그것은 질병의 치유에 앞서서 먼저 요구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 병 고침을 받고,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가장 비극적인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 즉 구원에 이를 수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열 명의 나병 환자(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7:11~19)

 

이미 나병이 어떠한 병인지에 관하여는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여기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등장 시킨 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 그분을 통해 은혜를 입은 후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지에 관하여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나병은 그 자체로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또한 이미 사망 선고를 받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재앙 속에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는 바로 사망을 앞두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동일한 시간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목소리를 높이며 주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나병이 치유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가 매우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날 때부터 특정한 사람에게 구원이 정해져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민족과 인종을 구분하여 주님의 긍휼이 다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편견일 뿐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며, 그들을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대하시는 모습은 바로 주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긍휼을 구하는 열 명의 나병 환자에게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에게 보낸 이유는 나병에 대한 판정 여부를 제사장이 하도록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1-59). 그러나 열 명의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제사장에게 가기도 전에 병이 치유된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아홉 명의 나병 환자는 자신이 더 이상 나병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리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명의 나병 환자에게는 제사장에게 검증을 받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제사장도 그를 반겨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예수님께로 왔고, 그분께 감사함으로서 영광을 돌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아홉 명의 나병 환자가 모두 유대인이라는 증거를 보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자신의 병이 낫기를 고대하였고, 그들의 병이 치유되는 순간 각기 제 길로 떠나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삶이 형통하기만을 고대하고, 그들의 문제들이 해결되었을 때 더 이상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살면서 힘겨운 시간을 만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주님을 찾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나병환자중 한 사람의 사마리아 사람은 주님을 다시 찾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발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유대인을 대변하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는 율법을 대신하는 것이고, 타국인(이방인)으로 여겨졌던 사마리아 사람은 복음을 대신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이 일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버리고 타국인(이방인)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복음을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홉 명의 환자가 모두 유대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주님께서 그들을 찾으시기는 했지만 그들을 버렸다고 선언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홉 명의 나병 환자가 모두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주님은 그들을 찾으시고, 또한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유대인이나 타국인(이방인)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한 사람의 감사가 돋보이는 장면이지만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는 주님의 질문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마음(50:6,10:6,15:24,15:4)을 생각하면 그분의 간절함을 옅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을 베푸신 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자유로운 삶을 누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이 기적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가르침은 감사를 드리러 온 나병 환자는 한 사람뿐이었다는 점입니다. 아홉 명은 각기 제 길로 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이었던 이 한 명의 나병 환자는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단 한 명뿐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진정성 있게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회중의 여론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의해 남들이 하는 것은 대부분 따라 해야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아홉 명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정직하게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경 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바알과 아세라 850명과 대적하기 위해서 혼자 서 있었습니다(왕상18:19-40). 많은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선지자)를 지지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역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겠다고 선언한 10명의 각 지파의 대표들과는 달리 소신 있게 행동했습니다. 특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겠노라는 다짐을 하는 모습(24:15)을 통하여 그가 다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가장 명확하게 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마도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0)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도 역시 수많은 유혹이 있었고, 힘겨운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외로운 싸움을 지속했던 자입니다.

 

과연 누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어떠한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직한 자세로 주님께 다가가는 자입니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더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 길로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칭찬 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 힘든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하시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9)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약속을 다라 다가 올 세상에서의 영광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정직하게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풍 병으로 자리에 누운 사람(9:1-8, 2:1-12, 5:18-26)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9:1-8)

 

1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2:1-12)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5:18-26))

 

예수께서 중풍 병 환자를 고치시는 기적을 보이시는 장면은 공관복음에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9:1-8, 2:1-12, 5:18-26). 여기서 말하는 중풍 병 환자는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마비 병(palsy)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비 병 가운데 가장 흔한 질병이 중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환자가 중풍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마비 명에는 보다 다양한 질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환자는 스스로 거동할 수 없었고,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만 예수님께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하는 교훈이 있다면 먼저 마비 병 환자를 데리고 왔던 네 친구들의 모습을 통하여 희생의 사랑을 위해 감수해야하는 것들과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참 된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비 병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장애물은 무리들이었습니다. 즉 사람들이 그들의 앞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누군가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인도하고자 하는 전도자들이 모두가 겪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죽어져 가는 영혼을 살리고자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려 하지만 많은 장애물들을 만납니다. 그 장애물은 다름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려 할 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로박고 있습니다. 만일 복음이 장애물 없이 전해졌다면 아마도 지금 이 세상은 완전한 복음화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마귀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직접 공격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 안에서 마귀가 복음 전도자들에게 직접 접촉해서 그들을 혼란스럽게 한 사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마귀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을 순교하게 만들었던 자가 누구였습니까? 대부분은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이었지만 이도 역시 마귀의 조종을 받은 자들이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활동을 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보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들입니다.

 

마비 병 환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네 명의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을 보고 당황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선한 일을 위해서 환자를 매고 예수님께 왔지만 그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지붕 덮개를 통해 그를 자리에 누인 채 한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예수께서 집안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밖에서 만났더라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의 도움을 구했겠지만 방 안에 계셨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접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마비 병 환자를 예수님 앞에 인도하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복음 전도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 앞에 닥친 어려움들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끝까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해 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과 마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1차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동역자로서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편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수 없이 많은 죽음의 위기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환경이 그들을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결국 마가는 전도 여행을 포기하고 돌아왔습니다(13:13). 2차전도 여행에서도 마가는 동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함께 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그 이후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고 갈라섰다는 사실입니다(15:37-39). 왜 바울은 그를 데려갈 수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복음 전도자에게 있어서 인내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탐구하다보면 인내의 위치는 언제나 앞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사랑(charity)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첫 번째 자세를 말할 때 오래 참음(suffereth long)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고전13:4). 인내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복음 전도자들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토록 희생을 했던 것은 예수님 앞에 가야만 마비 병 환자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예수님께로 데려와야만 했습니다. 그분이 아니고는 누구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다만 좋은 상담자가 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세상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철학적으로, 때로는 세상의 경험을 통하여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 전도자의 역할이 아닙니다. 복음 전도자의 목적은 오직 예수님 앞에 피상담자의 모든 것을 내려놓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비 병 환자가 있으니 도와 달라고 말로 할 수 있었지만 직접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전도자는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만일 기도함으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훌륭한 전도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환자를 향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0)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고 따져 묻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3)고 반문하시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람의 아들, 즉 육체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진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단순히 병을 고치심으로 기적을 보이시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이러한 일들을 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마비 병 환자는 그들 앞에서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것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두려워했고, 말하기를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26)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마치 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고, 그 일을 행하신 분은 스스로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것은 기적이 아닌 예수께서 어떠한 분이신가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 복음을 듣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어떻게 관여하고 계신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적들이 자신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나게 되는 가장 충격적인 일은 예수께서 자신과 어떠한 관계 속에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고, 이러한 사실이 우리 안에 확신으로 다가올 때, 우리 안에서 보이셨던 수많은 기적보다도 더욱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까? 단순히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입니까? 아니면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늘 우리의 자리를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중풍병에 걸린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 (8:5-13, 7:1-10)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8:5~13)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7:1~10)

 

로마의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교훈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 속해 있었고, 백부장은 그들을 치리하기 위해서 파견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측면에서 보면 백부장은 권세를 가진 자였고, 예수님은 그가 다스리고 있는 나라의 한 백성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예수님의 도움을 청했고, 더욱이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겸손함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랑하는 종이 중풍, 즉 마비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가 예수님께 나올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것은 그의 종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백부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매우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이 있다면 바로 겸손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당시에 매우 훌륭한 저택에서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로마시민으로서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장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시고자 말씀하셨을 때, 그는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집이 누추하거나 접대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방인이요, 감히 예수님 앞에서 어떠한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더욱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은혜를 구하는 것조차도 부끄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과연 그는 예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었을까요? 그는 육신적으로는 충분히 나아갈 자격이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입으로 자격이 없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때, 육신적은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먼저 사랑하는 자신의 종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병들어 누워있는 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보면서 그의 마음 안에는 다른 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믿음이 그 안에서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시공간을 초월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성경의 많은 곳으로부터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던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을 단순히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그 말씀을 통하여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은 성경의 여러 곳들로부터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령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함으로 배 두 척에 고기를 가득 채우는 장면이라든가(5:1-1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말씀대로 순종했을 대 물이 포도즙으로 변하는 장면(2:1-10)들은 대표적인 장면들입니다. 이 세상이 말씀으로 채워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해야만 합니다(1:1-5). 백부장의 고백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백부장의 고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직접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도 될 만큼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히 예수님께 나와 간청을 했습니다. 이것은 믿음 안에 사는 자들이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문제들을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마음으로 믿으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예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기도도 필요 없고, 우리의 삶도 어떻게 살든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가진 자들은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입술을 열어 기도해야 하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의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문제를 말했고, 또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갔을 때 자신의 모든 문제, 즉 사랑하는 종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는 매우 모범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백부장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누구에게도 없었던 칭찬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칭찬을 듣는 것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러한 칭찬을 듣는 자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단 예수님 당시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칭찬을 듣는 자는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주여 주여를 외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믿는 자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이미 이 문제들에 대하여 성경을 통하여 경고하신 바가 있습니다(7:21-23).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았지만 믿는 자들을 찾아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며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막상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났고, 오직 요한을 비롯한 몇 명의 사람들만 남아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도구로 사용하려 하는 모습들을 보입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듣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백부장으로부터 겸손과 사랑, 그리고 칭찬을 듣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오늘 이 시대를 살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형제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서로가 경쟁을 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그 까닭에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남의 실패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는 치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범위가 상상을 뛰어 넘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이 사랑한 종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합니다. 백부장은 사랑하는 종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자존심과 명예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예수님 앞에 와서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이 되었지만 보통 사람의 생각대로라면 그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한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랑의 모습들에 대하여 다양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를 위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5:14), 주인이 종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할 것을 가르치고(6:5),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확신(4:25)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디 백부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병(fever)에 걸린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4:46~54)

 

갈릴리 가나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첫 번째로 기적을 보이신 곳이며, 특히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시는 과정에서 사역의 방향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보여야 할 행동들에 대하여 가르치셨던 곳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보이신 후 얼마 자나지 않아서 다시 갈릴리 가나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귀족(a certain nobleman)을 만나셨습니다. 그가 왕의 신하로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분명한 것은 그의 신분이 매우 높았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온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거의 죽게 된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아들 문제만 없었다면 예수님께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매우 지체가 높았던 자였으며, 그가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의 문제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사람들이라(10:36)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기억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 것을 요구하고, 가정의 일들은 소홀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최초로 선물하신 것이 가정이었고, 성경의 더욱 많은 부분들을 통하여 부모를 사랑할 것과 자녀들에게 스스로 본이 되며, 또한 지혜와 훈계로 바르게 양육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부모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아들의 문제로 예수님 앞에 선 귀족은 매우 모범적인 자였습니다. 그는 아들을 자신의 명예나 권세, 그리고 자존심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사랑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0)고 책망하십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순수함으로 예수님께 다가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께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오직 표적들과 기적들입니다. 메시야를 열망했던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 심지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눈앞에 드러나는 표적과 기적들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29).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은 매우 초보적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속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성한 자가 되어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귀족은 예수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오직 그의 마음은 자신의 아들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고 말씀하십니다. 그에 대한 반응은 매우 즉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충분히 자신의 아들을 살리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일에 대하여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라”(5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예수께서 구세주이심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했을지라도 아들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받아들일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병 고침을 위해서, 어떤 이는 사업의 형통함을 위해서, 또 어떤 이들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주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그것은 비록 주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다른 것이지만 주님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믿음 안으로 들어오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주님의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납니다. 그들 가운데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으로 구주로 영접하기 위해서 온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주님의 기적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표적들을 구하고, 참 믿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들은 고난을 두려워하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여전히 명예나 권세를 얻기를 소망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고, 세상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기대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귀족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예수께서 열병이 떠나갔다고 말씀하시는 순간에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알고는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단순히 귀족의 아들 병을 고쳐주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귀족과 그의 온 집안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즉 예수께서 표적들과 기적들을 보이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는데 있습니다. 만일 표적과 기적을 경험하고도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성령님께서 활동하시는 시대에는 이 말씀에 대하여 더욱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거짓 전도자들, 혹은 속이는 자들이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각종 표적과 기적들을 일으키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안수하고, 자신의 입으로 명령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신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안겨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일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것도 오직 말씀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귀족의 모습은 오늘날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주님을 찾는 모습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절박한 문제를 가져오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과 세상으로부터의 조롱을 감수하고 예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비록 그들은 주님의 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서서히 그 뜻을 알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고 따르도록 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처음 그 어린 아이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성숙한 믿음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겸손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심(8:14-15,1:29-31,4:38-39)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8:14~15)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1:29~31)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38~39)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베드로에게 장모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불편한 사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가톨릭의 사제들은 모두 독신자이어야만 하며, 그들의 초대 사제, 혹은 교황으로 베드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치시는 장면은 그들의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매우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내를 둔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들을 통해서도 가정의 일들을 언급합니다. 그는 아내들에게(벧전3:1), 혹은 남편들에게(벧전3:7) 그리스도인이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종교들은 가정을 버리고 그들의 신을 따르도록 권면합니다. 고대에는 심지어 가정의 자녀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신실한 가정을 세워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 시대에는 가정의 파괴로 인하여 곤경에 처하는 많은 가정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시대, 즉 신약시대에 접어들어서 가정은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으며, 가르침에 있어서도 일차적인 대상을 가정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정을 떠나서는 누구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치시는 장면은 매우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갔는데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었습니다. 결국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열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베드로 장모의 병을 예수님께 알렸고, 예수님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실 때, 열병이 그녀에게서 떠나가고 그녀 역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셨던 것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의 간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더라도 제자들의 간청이 없었다면 그대로 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단순해 보일지라도 중요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알고도 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응답을 받지 못하는 많은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4:2).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자신의 문제를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무심코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부모가 알아서 해결해 줄 수도 있는 문제이겠지만 대부분은 자녀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수차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실상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준비하신 것들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구하기만 하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구하는 생활을 포기한다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세상에서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도 얻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막연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금 바로 주님 앞에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를 내려다보시고(4:39), 그녀의 손에 손을 대고(8:15),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1:31). 예수께서는 그녀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녀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열병에 대하여 꾸짖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께서 그녀에 대하여 매우 특별하게 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특별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장모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족은 가장 훌륭한 조력자입니다. 만일 조력자로서 같이 일할 수 없다면 자칫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10:36).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과정에서 매우 따뜻하게 대하셨던 것은 앞으로 베드로가 주님의 일들을 하는데 있어서 가족으로서 매우 소중한 조력자가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의도는 열병이 그녀에게서 떠나간 이후에 즉각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서 열병이 떠나가자 그녀는 일어나 그들, 즉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녀를 고치신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녀로 하여금 평생을 베드로를 돕는 조력자로 삼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상 주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조력자의 도움은 매우 필요합니다. 조력자를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없다면 그의 사역은 힘겨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도움을 얻게 된다면 그 사역은 한결 수월해 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치심을 통해서 조력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조력자는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입니까? 신약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울과 디모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끈끈한 동역자의 자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디모데의 자세에 있습니다. 그는 매사에 바울과 '뜻을 같이하였다'고 했습니다.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없애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역자의 자세는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은 이성과 감정의 분출을 억제하고 최대한 감추어서 상대방의 뜻을 간파하고 그 뜻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의 위대하고도 왕성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거의 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역을 뒷바라지하는 디모데의 모습은 동역자의 전형적인 자세를 보여줍니다.

 

디모데의 자세는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다고 말합니다(2:19-24). 그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심을 버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전도자들이 동역 할 수 없는 이유도 사사로운 이익에 연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동역을 위해서는 충분히 손해 볼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질, 명예, 권세, 지식 등에 대한 열정이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면 그는 동역할 수 없는 독불장군과 같은 존재로 남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의 자세 중 가장 주목할 수 있는 자세가 있다면 역시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디모데는 바울을 섬겼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디모데가 우상으로 바울을 섬겼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육신적으로 섬길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을 바울에게 보여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피차 섬기는 자세야말로 동역자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것 같이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족이라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족은 언제나 희생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베드로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조력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여인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께서는 기꺼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족들은 어느 위치에 있습니까? 성공적인 믿음의 삶을 위해서 훌륭한 믿음의 가정을 세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종병(dropsy) 든 한 사람(14:1-6)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14:1~6)

 

수종병(dropsy)은 신체의 조직 간격이나 체강(體腔) 안에 림프액, 장액(漿液) 따위가 많이 괴어 있어 몸이 붓는 병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질병이 그러하듯이 심해졌을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병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 환자를 만나게 되는 장소가 공교롭게도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떡을 잡수시기 위해서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방문에 대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과 예수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수종병 환자가 예수님의 방문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데려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 안에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응답하시고 계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마도 바리새인에 의해서 수종병 환자가 온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앞에 병든 몸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병든 자의 마음이 그러하듯이 그도 역시 예수님을 통해 병이 낫기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서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바리새인 앞에서 대단한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매우 긴장된 모습으로 자신에게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기존의 율법주의자들이 고수하고 있었던 생각에 대하여 고정관념들을 버릴 것을 요구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후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복음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복음을 대표하는 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즉 이 수종병 든 사람은 율법과 복음 앞에서 문제의 해결을 구하고 있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적 행위와 주님의 은혜를 두고 어떠한 방법을 따를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질문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두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정관념으로는 병을 고치는 것을 포함한 어떠한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병을 고치는 문제를 앞에 두고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 된다고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병을 고치지 말도록 정한 것은 스스로 만든 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됩니다. 그 까닭에 자칫 안식일과 같이 거룩한 날에 환자를 잘 못 다루다가 시체를 만지게 되면 엄청난 범죄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만의 전통적인 규례에 따라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들에게 쉬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안에서 안식일은 매우 강제적인 조항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안식일을 범하는 자에 대하여 죽이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35:2). 그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이 쉬는 의미보다는 단순히 율법의 한 부분을 실행하는 날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강력하게 말씀하셨던 것은 자녀들이나, 종들, 그리고 가축들을 위한 배려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5:14). 왜냐하면 안식일의 강제 조항이 없다면 주인은 자녀들이나 종들, 그리고 가축들을 혹사시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법이 왜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의 양심을 따라 살도록 만들면 되는데, 법을 통해서 규제하고, 통제합니다. 그 이유는 약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만일 법이 없다면 힘 있는 자들은 약한 자들을 마음껏 다루고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정하고, 그 법 아래서 약한 자들을 보호하도록 한다면 모두가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강한 자들에게도 유익이 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약한 자들이 자신의 삶에 불만이 없게 된다면 강한 자들은 마음 놓고 자신의 일들을 계획하며 추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들의 불만이 많아지고, 혹사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언젠가 그들의 주인을 배반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을 다만 율법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들에게 휴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 수종병 환자를 앞에 두고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그렇지 아니하냐?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그들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안식일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자유를 얻는, 즉 휴식을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수종병 환자를 고쳐서 보내십니다. 그리고는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실상 그들에 대한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안식일에 환자를 고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재산에 손실이 오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안식일을 잊고 행동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상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활 속에서는 바르게 실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위선자들로 표현합니다(23:13-14). 그들은 안식일을 대함에 있어서도 매우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은밀하게 율법을 범하는 일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교회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는 매우 거룩한 성도로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결코 경건하지고 않고, 세상과도 분리되지 않은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책망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위선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보여 지게 될 모습입니다(14:10,고후5:10).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위선적인 삶에 대하여 반드시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분 앞에서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하루하루를 경건하고, 보다 정직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12:10-13,3:1-5, 6:6-11)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6:6-1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오른손 마른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얻기 위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에 대하여 시험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시험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지에 대한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의도가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쥐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거부하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내면은 욕심으로 가득 찬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생각은 마귀로부터 온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바가 있습니다(4:1-11). 그 시험의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성경에 기록된 구속의 목적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죽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친히 어린양이 되셔서 희생 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그분의 능력을 보이고, 다른 방법으로 사역을 완수하도록 요구합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경배하면 모든 왕국과 세상을 주겠다고 말하면서 성경이 기록된 방법을 따르지 못하도록 시험합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마귀가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핍박이라는 또 다른 방법으로 마귀의 사역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마귀들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귀들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활동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들을 막고, 형통한 삶을 방해하며, 질병을 주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하고, 때로는 환상이나 꿈속에서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결코 그렇게 어리석은 방법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귀들은 이미 그 방법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사역에 대하여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욥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42:1-6). 이후로도 종종 마귀는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들을 주도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히려 더욱 큰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서는 모습들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전략은 더 이상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마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생각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미 예수님을 시험하는 방법들을 통해 보았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드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성경대로 가르치는 많은 교회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복음이 형통하고, 건강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에 이용되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리에 붙여진 교회 홍보물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에게 교회가 마치 그들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마귀가 사용했던 전략과 배우 비슷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도 예수님에게 세상을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성경을 잘 알고 있고, 또한 사람들에게 가장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하여 예수께서 그들의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돌이켜 보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일한 모습들이 존재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적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한 거짓 전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바르게 가르치는 것을 견제하고, 심지어 바른 교리들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적합니다. 심지어 성경의 기준도 없이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정죄하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행합니다. 그들은 현대판 서기관들이요, 바리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두고 사람들에게 질문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십니다. 이 질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그들의 문제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방법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요약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면서 선을 행하는 일을 주저합니다. 오히려 가정을 등지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정죄하며, 자신의 의를 과시하려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비판하고, 실족시키는 일에 대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이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성실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생활만으로 그들의 신앙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 인정받을 수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구원을 받고,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과연 선한 일들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지,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1~52)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1~52)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22:49~51)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8:10~11)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이 일들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예언되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수차례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말했지만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그럴 수 없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오고 있었고, 제자들도 이 사실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제사장은 가룟 유다를 매수하고 종을 보내 예수님을 잡아 오도록 합니다.

 

베드로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이전부터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꿈은 결코 잘 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고, 이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모든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꿈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에서 멈춰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다는 것은 곧 그의 꿈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막기 위해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를 향해서 칼로 내리쳤습니다. 그의 의도는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를 죽이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칼은 말고의 귀를 베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가 칼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자였다면 당연히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를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칼솜씨는 목적과는 달리 귀를 자르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가 예수님을 경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지켜드리겠다는 의욕은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준비해 본 적이 없이 다만 예수님만 따라다녔을 뿐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폭력이나 시위, 즉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행동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씀처럼 그들의 대하여 순종하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대적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분이시지만 오히려 순한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모습만 보면 매우 우스꽝스런 제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칼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자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칼을 휘두르고, 죽이지도 못하고 귀만 자르는 모습은 마치 주님의 종으로서 준비가 되지 않고, 주님께 충성을 하겠다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3년 반에 걸친 오랜 시간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칼을 휘두르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육신적으로 예수님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형편없는 칼솜씨를 가지고 있었고, 대책 없이 말고의 귀를 베는 일을 저질렀을 분입니다. 그는 침착하게 대응하고 계시는 예수님과는 달리 분노로 가득해서 분별력을 잃고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목격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정작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을 채울 도구로 생각할 뿐입니다. 오늘날 사역자들 가운데 명예와 물질, 심지어 권세욕으로 가득한 이들을 보십시오. 결코 많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입으로 예수님의 종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뜻에 역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곁에 두고 있지만 그분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나중에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날만을 생각하며 꿈꾸는 자와 같습니다. 그들에게 다가 오는 것은 영적인 실패와 좌절의 순간들입니다. 그것은 이미 베드로가 경험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칼을 사용한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 이 말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진리입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결국에는 모두가 망하게 됩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막강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리되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2:1-2)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자들의 부당함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함으로서 그 처분은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 의해 귀가 베어진 말고의 귀를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베푸신 마지막 기적입니다. 그 마지막 기적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 온 대제사장의 종이라는 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대적자, 즉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온 자를 사랑으로 품으시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은 특정한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사랑할 것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기적으로 말고의 귀를 고치심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향을 바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무기는 베드로의 손에 있었던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6:17). 이 말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오직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경거망동한 행동이 있은 직후에 바로 이 싸움의 방법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앞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결론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라는 말로 요약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매우 괴롭습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렵듯이 예수께서도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을 향해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셨습니다. 실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언제나 묵상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덤 사이에 있던 두 사람(8:28~34, 5:1~21, 8:26~39)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8:28~34)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 있던 두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기적은 공관복음,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걸쳐서 모두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명에 있어서 마태복음에는 게르게스(Gergesenes), 마가복음에는 가다라(Gadarenes)로 소개되고 있지만 이 두 지명은 같은 장소입니다. 이미 성경 안에서 같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름으로 소개된 지명이 상당수 있습니다. 가령 갈릴리 바다를 여호수아 123절에는 긴네롯 바다로, 요한복음 61절에서는 다베랴 바다로 불려집니다. 또한 시내산을 때로는 호렙산(3:1)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각 복음에서 기록된 귀신 들려 무덤 사이에 있던 두 사람을 고치시는 기적은 다른 지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동일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하여 귀신 들린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매우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는 밤낮으로 산이나 무덤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베고 있었습니다(5:5). 그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에 의해 그는 절제력을 잃고 몸을 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행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삶을 실패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경우도 목격합니다. 누구나 죄를 지으며 살고 싶은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 마귀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술과 담배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해로운지를 모든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떠한 아픔을 가져다 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끊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여전히 그것을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술과 담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귀신 들린 사람은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여러 번 족쇄와 사슬로 그를 묶었으나 그가 사슬을 끊고 족쇄를 산산조각 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힘으로 사슬을 끊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 안에 또 다른 존재, 즉 마귀의 힘을 빌려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맑은 정신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술과 마약, 혹은 주술과 같은 것들을 동원하여 상식 밖의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의 말에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주관하는 것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이 매우 종교적이라는 점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분께 경배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합니다. 물론 마귀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두 사람은 오직 귀신에 의해 조종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보기에 귀신 들린 사람은 매우 신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매우 앞 선 믿음의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귀신 들린 자들이었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이단들을 보십시오. 누가 그들에 대하여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더욱 열심히 있고, 더욱 종교적이며, 때때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종교적으로 훌륭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무아지경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며, 도덕적인 타락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자해를 하기도 하며,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것은 결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갖게 될 것입니다(딤후1:7). 또한 깨끗하고 거짓 없는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벧전1:22). 그는 가장 맑은 정신으로 상식에서 벗어난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간혹 상식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명예를 인생의 목표로 사는 사람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전부인 것으로 아는 자가 성경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자라면 세상에서 덕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귀신 들린 두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쫓겨나고 돼지 떼 2,000마리에게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 죽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유감스럽게도 귀신들이 쫓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귀신 들린 사람이 다시 정상인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있게 될 엄청난 재산의 손실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예수님에게 마을을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

 

가다라 사람들의 마음은 매우 솔직합니다. 그들은 지금 영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귀신 들린 사람이 회복되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호기심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돼지 떼들이 바다에 들어가 수장되는 장면을 보면서 혹시나 있게 될 앞으로의 재산상 손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영적인 문제보다는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딤전6:10), 사람들이 버리기 가장 힘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인생은 잠깐이기 때문입니다(벧전1:24).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에 끝이 없을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지만, 그들은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9:27). 그들은 눈앞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마귀의 힘을 빌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많은 일들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부디 온전하신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자(9:32-34)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9:32-34)

 

말 못하는 자의 유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날 때부터 말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듣지 못합니다. 또한 혀에 장애가 있어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큰 충격이나 사건을 만나서 실어증에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귀신 들려 말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큰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사람이 마귀 들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말을 못하게 된다는 것은 구원과 관련하여 매우 치명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입으로 시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마귀가 그의 귀와 입을 막고 구원의 통로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철저하게 사람들의 귀와 입을 막고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경로들을 통하여 복음의 소식들을 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 앞에 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전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주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원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까닭에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52:7)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0:15)

 

어떤 이들은 주인으로부터 한 달란트를 받고 그것을 묻어 두었던 자(25:24-25)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가 뿌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하여 주님은 반드시 책망을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위해서 수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쉬지 않고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가 같지 않습니다.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자를 고치시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무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무리들은 놀라고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마귀에게 속한 분으로 몰아세우려 했습니다. 그들은 동일한 사건을 목격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자세로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물론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질병들을 병원에서 치료받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님 당시와 같이 수많은 병자들을 살려내는 기적들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욱 다양한 모습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살아계심과 놀라운 능력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간증은 더 이상 그분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향으로만 향하지 않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적과 능력의 현장을 보면서 놀라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그 기적들을 마음속에 간직해 두게 될 것이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라면 대부분 이러한 간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기적 앞에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또한 어려운 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하는 방법들을 잘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먼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조롱하듯이 말하는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종교 지도자라고 할 만큼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고도 오히려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종교적으로 존경받고 있었던 자들이었음을 기억해 두십시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매우 부끄러울 수 있는 말이지만 바로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목사(장로)를 비롯해서 집사와 같이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를 파괴하는 일들을 하는 자들입니다. 매우 건전하고 순수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려는 자들을 정죄하고, 거짓 진리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속이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비록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라도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것처럼 착각을 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도 없이 사역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직업으로서 그 일을 감당하려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자칫 지옥으로 인도하게 되는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의 목적은 단순히 병을 고쳐주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며,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기적들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부하고, 모함하며, 사실을 부정하고, 거짓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경로들을 통하여 그분의 사람을 보여주고 계시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거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다시 한 번 확증하는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

 

 

 

눈 멀고 말 못하는 자(12:22~30, 11:14)

 

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2:22~30)

 

이미 마태복음 9장에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자에 대하여 소개했지만 여기서는 말을 못 할 뿐만 아니라 눈 까지 멀어서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할 수도 없다면 그 인생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매우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행복한 삶을 꿈꾸었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귀에 의해서 매우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꿈을 꾸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지배아래 있는 세상 속에서 그들은 눈멀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돈과 명예, 혹은 지식과 권세와 같은 것들이 그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고 살았던 솔로몬의 고백을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이 헛되며, 오직 젊은 날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권면 하고 있지만(12:1), 사람들은 여전히 마귀들의 지배 아래 있는 것들에 눈이 멀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을 경고하고 있지만(딤전6:10), 사람들은 스스로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사탄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정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 역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이 모든 것들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어마어마한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귀신 들려 눈멀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심으로 그분께서 바로 마귀의 모든 권세들을 능히 이기실 수 있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사건을 단순히 한 사람의 질병을 고치시는 것으로 끝마치려 한다면 그것은 껍데기만 보고 정작 중요한 내용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분을 믿는 우리들로 하여금 마귀의 권세를 이기게 하려는데 있습니다(9:1,1:4). 우리가 제 아무리 많은 교훈과 경험들을 통해서 신실한 삶을 살고자 해도 그들은 결코 마귀의 권세 아래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그의 인생이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들이 마귀에게 속해 있는 동안에는 참 된 행복을 경험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를 고치신 후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마귀를 마귀들의 통치자에 의해서 쫓아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이지만 그들의 역사를 통해 보았을 때 전혀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많은 마술사들과 속이는 자들이 이미 많은 기적들을 그들 앞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속이는 자들에 의해서 기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를 들어 무속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상상할 수 없는 능력들을 사람들 앞에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각종 이방종교의 제사장들이나, 마술사들에게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곧 일시적으로 마귀의 힘을 빌려 귀신 들린 자를 고칠 수도 있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러한 측변에서 본다면 바리새인들의 말이 결코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잘 못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보이시고자 하였던 것은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를 고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마귀를 능히 통제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그들의 왕, 즉 메시야이심을 보이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바리새인들은 오직 기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물론 백성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적만을 보았을 때 마귀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놀라고 흥분하여 예수님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들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보이시는 참 된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놀라고, 한편으로는 그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이 되었지만 그의 백성들은 그 나라가 세워지는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강한 자, 즉 사탄을 먼저 결박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29) 그 후에야 집을 노략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를 고치시는 기적은 곧 예수께서 그분의 나라 건설을 위해 완벽한 작업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서 완벽하게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들이 진정 메시야를 바르게 이해하고 영접했다면 아마도 유대인들의 역사는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토록 바랐던 메시야를 버리고, 그들 스스로 고대했던 또 다른 왕을 기다림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들에 의해 확장되는 역사를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결론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편에 서서 사는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갖고 있으면서도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답게 살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기적을 통하여 호기심을 유발하고, 스스로 영웅이 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행했고, 또한 사람들을 감동시켜 영웅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에 비교하면 예수님은 매우 초라한 인생을 사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이면에 있는 예수님의 뜻과 목적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를 멸하시고, 오늘날 마귀의 권세아래서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들을 고치시고,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15:21-28, 7:24-30)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15:21~28)

 

예수께서 발길을 향하고 있었던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방은 죄악이 성행했던 곳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방에 대하여 종종 멸망당할 도시로 비교하셨기 때문입니다(11:21, 10:13-14). 그 도시에서 만난 가나안 여인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여인은 예수님께 다가왔고,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딸은 귀신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예수께서 그 여인의 간청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여인을 개 취급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전혀 예수님답지 않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누구보다 어려운 이웃들에 대하여 사랑하시는 모습들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전에도 이방인들을 포함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자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어떤 교훈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 어떠한 자세로 다가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처지를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자녀의 떡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스스로를 개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이 귀신에 들려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딸을 살리기 위한 어머니로서의 간절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주었던 행동은 매우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처지를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정직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 이방인들에게 대하여 개와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들과 결혼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것조차 수치스러워 했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이 여인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말씀을 들어야 하고, 영접해야 하며, 후에는 간증과 세례(침례)를 받고 교회의 회원이 되어 만찬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있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하여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백이 있기 전에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긍휼을 구했던 여인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간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딸을 위해서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간구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고, 고통스러울 만큼 힘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조롱하였을 것이며, 심지어 예수님을 포함한 유대인 제자들조차도 그녀를 귀찮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자신의 딸을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세였습니다. 결국 그녀의 기도는 예수님에 의해 응답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니 어떠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낮추고, 내 안에 담긴 모든 욕심들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모든 것들을 버리고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들은 물질을 구하고, 세상에서의 영광을 구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들도 믿음 안에서 신실한 자녀가 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출세를 위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또한 좋은 곳에 취직이 되기를 바라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은 정직하게 표현한다면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기도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셨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결국에는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2:42)라고 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차적인 기도의 대상은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오히려 돌을 던지는 자들을 보면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라고 기도합니다.

 

대부분의 기도하는 자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기복신앙인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가장 위험한 기도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을 종교로 둔갑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기복신앙에 근거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고, 종교가 자신들에게 형통한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속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종교를 이용하여 처음에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지만 마지막에는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최종 목적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 땅이 결국 멸망당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날들을 위해서 수고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은 예수께서 가나안 여인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결국 여인의 요구가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서 진정성을 보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간절했고,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한 여인의 마음은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는 대답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응답이 없음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때때로 좌절하게 만들며, 영적으로 침체되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요구는 그들로 하여금 진정성을 보시기 위한 것입니다. 진실로, 또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선다면 그의 기도는 응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셔도, 주시지 않아도 괜찮다는, 즉 한 번 찔러 보자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그러한 기도가 응답될 까닭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오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때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진심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17:14-20, 9:14-29, 9:37-42)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17:14~21)

 

어떤 사람이 그의 외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는 아이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진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에게 고쳐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가 예수님께 왔을 때에도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여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렸습니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귀신 들려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다시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예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답하십니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간청했을 때 그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9:14~27). 이 일이 있은 후 제자들이 왜 자신들에게는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9:29)고 대답을 하심으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먼저 제자들은 왜 이 아이를 고칠 수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충분히 아이를 고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고치지 못했던 것은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고치지 못했던 이유를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는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 믿음에 관하여는 많은 논쟁이 있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념과 믿음을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뉴에이지 사상을 추종하는 자들은 할 수 있다” “혹은 "하면 된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기 최면과 같은 것들을 신앙에 접목하려 시도합니다. 실제로 근세기에 들어서 그들의 시도는 성공 했고, 긍정적 사고방식은 이미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린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굳이 이것을 분류하자면 신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념은 믿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면 주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망한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념에 가까운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믿음이었다면 이미 마음에 품는 순간 응답이 되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망하는 것은 있지만 실제로 그 뜻을 이루고 사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겨자씨만한 믿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렸지만 그것은 예수님께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아이를 고쳐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스스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면 충분히 기적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 그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약속하셨고,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살 수 있었던 그들 앞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을 미문이라는 성전 앞에서 만납니다. 이 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며 그를 고쳐주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고 말하자 그는 걷고, 심지어 뛰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이 일이 결코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믿음으로 고쳐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가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뉴에이지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9:23)는 구절을 말하며 반박하려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거짓 선생들은 이 가르침을 마치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거짓입니다. 우리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17:21, 9:29)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금식이라는 단어가 개정개역 성경에는 빠져있지만 오랫동안 영어권에서 사용되어져왔던 KJV 성경에서는 금식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금식이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에서 매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는 많은 곳에서 금식에 관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회개나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이 필요할 때 금식을 했습니다. 그 내용들을 요약하면 금식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금식보다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금욕의 차원을 넘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금식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대부분의 성경들은 금식을 삭제하고, 교회는 더 이상 금식의 필요성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승리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할 수 있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스스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교회는 더 이상 예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주님의 교회를 흉내 내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모습으로 있습니까? 교회에 출석하며,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가장하고,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을 스스로 하려하고, 더 이상 주님이 필요 없는 상태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삶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때로는 금식을 통해서 주님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십시오. 그러한 삶은 우리를 더욱 큰 믿음으로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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