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연구 1-1. 욥의 고난(욥1-3장)

 

욥이 당대의 의인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은 복음(교회)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욥기의 시작이 고난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일반적인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매우 대조가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그의 고난이 하나님과 사탄의 합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복신앙에 근거한 종교와는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셔서 명령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인생을 돌아보시며, 그 안에서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돌아보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그분의 품 안에서 키우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광야와 같은 곳에 던져 넣고 그곳에서 스스로 이겨나가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단순히 아픔이 아니라 그의 영적 치유를 통하여 더욱 놀라운 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필요하다면 사탄의 활동까지도 이용하셔서 그분의 자녀들로 하여금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훈련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배울 수 있는 훈련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1. 경건한 사람 욥(1:1-22)

 

이 모든 일에서 욥이 죄를 짓지도 아니하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아니하였더라. (1:22)

 

욥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1:1)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한다면 “경건한 자” 혹은 “의인”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가 누리고 있는 모든 행복과 명예는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욥의 고난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쉽게 결론지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들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모든 것을 가져가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곧 현재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이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욥기는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1) 동쪽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큰 자

 

욥은 “동쪽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큰 자”(1:3)라고 일컬어질 만큼 많은 재산과 완전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가 사는 모습은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그러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가진 자였습니다. 그의 부귀와 영화가 유산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자수성가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즉 경건한 삶을 살았던 자였다는 사실입니다(1:8). 즉 그의 재산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 아래 지켜지고 있었으며, 그는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의도에 맞게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2) 사탄의 도발

 

욥이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았던 까닭일까요? 사탄은 그의 경건이 위선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욥을 두고 흥정을 합니다. 그는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나이까?(1:9)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소유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1:11)라고 말합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욥의 경건함은 가식적인 것이며, 그의 넉넉한 환경이 만들어 놓은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믿음에 대하여 결코 의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탄으로 하여금 시험을 허락하십니다(1:12). 과연 넉넉한 생활과 안정된 삶이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욥의 믿음이 결코 그의 환경에 있지 않으며, 오직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황 속에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갑작스럽게 당한 환난 앞에서 오히려 그분을 찬송하고 죄를 짓지도 아니하며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1:21-22). 사탄의 도발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3) 욥의 가정교육

 

욥이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또한 스스로 경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의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잔칫날이 지나가면 번제헌물 드리는 일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온 정성을 다해 헌물을 드렸는데, 그 이유는 “내 아들들이 죄를 짓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저주하였을까”(1:5)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그의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 온 것으로 보입니다. 즉 그는 혼자만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경건한 삶을 살도록 훈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또한 그가 동쪽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불릴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사탄의 공격(욥2:1-10)

 

사탄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의 믿음을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결코 안정된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그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결코 욥의 믿음에 대한 시험을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욥을 넘어뜨리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의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욥도 자신이 그토록 심하게 시험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탄의 집요한 공격으로 인하여 철저하게 파괴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1) 계속되는 사탄의 공격

 

욥은 사탄의 계략으로 인해 재산과 자녀를 모두 잃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고통을 이기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사탄은 결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이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요8:44). 그는 또 다시 욥의 뼈와 살에 손을 대는, 즉 육체의 고통이 필요하다고 참소합니다(2:4-5). 하나님은 생명에만 손을 대지 말 것을 명령하고 사탄의 의도대로 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라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사탄은 이 후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욥에게 안겨다 줍니다. 욥은 사탄에 의해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즉 온 몸에 종기가 나서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으며 죄인의 모습으로 재 가운데 앉아 있는 신세가 됩니다.

 

욥의 고통은 육신에서 멈춘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아내에게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심지어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순전함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2:9).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주어야 할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을 것을 요구하는 아내를 보는 욥의 심정은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그는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족, 재물, 건강, 심지어 아내까지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집요한 공격으로부터 온 결과입니다.

 

2) 욥의 신앙

 

욥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병든 몸과 절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의 아내조차도 더 이상 욥의 편이 아닙니다. 그가 이제 바라 볼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이것은 사탄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욥은 아내가 자신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좋은 것을 받으며 또 나쁜 것을 받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2:10). 그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잃고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그가 모든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인내를 대표하는 인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약5:10).

 

3. 친구들의 위로와 욥의 탄식(욥2:11-3:26)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지역(데만, 수아, 나아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욥과 함께 애곡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욥을 찾아왔습니다(2:11). 그들은 저마다 자기 겉 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자기머리 위에 티끌을 뿌리고 이레 동안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욥을 보면서 그들은 친구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자 했지만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1) 욥의 탄식

 

이제 욥은 자신을 향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나온 것에 대하여 스스로 저주합니다(3:1). 이것은 지금까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하소연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며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성장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 때 매우 행복하고, 완전한 것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게는 안전도 없고 안식도 없고 평온함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염려하고 있었던 고난이 자신에게 임했음을 고백합니다(3:26). 그는 이미 자신의 본성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미 사도 바울에 의해서도 들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는 매우 뛰어난 복음 전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이 비참한 사람이며, 사망의 몸을 지닌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롬7:24). 또한 죄인들 중에 자신이 우두머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딤전1:15).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잇었던 자였습니다. 욥은 과거에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켜왔지만 이제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고난이 주는 열매

 

만일 욥에게 사탄으로부터 오는 고난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고난은 모든 믿음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만일 모세의 광야생활과 사울로부터 피해 다녔던 다윗의 생활,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장들의 험난한 여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믿음의 사람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처럼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더욱 신실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없으면 성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난이 닥칠 때 느끼는 것은 결국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상실감입니다. 사실상 시험 중에 있는 모든 환경들을 이겨내는 일들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시간동안 포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10:3). 결국 인내의 과정을 누구나 거치지만 그것이 결코 이길 수 없는 것들은 아닙니다. 욥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땅을 사는 자들이 욥이 당한 고통만큼 시험을 당한 이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이 시험을 이겨낼 수 있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시험이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욥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내용연구 1-2 엘리바스(욥4-7, 15-17, 22-24장)

 

욥은 이미 모든 것이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병든 육체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심정도 매우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친구들은 무슨 말이든 욥에게 위로할 말들을 생각해야 했고,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선의 위로라고 생각되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욥의 고통을 지나치지 않고 먼 길을 달려와 준 좋은 친구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들이 반드시 위로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 더욱 아픈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그들의 대화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엘리바스의 충고

 

엘리바스는 데만 사람이었습니다. 데만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지혜가 있기로 유명합니다(렘49:7). 그리고 엘리바스는 세 명의 친구 가운데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것으로 추측되어 집니다. 엘리바스가 친구가 된 이유는 그가 말하는 내용들을 생각해 볼 때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그의 인격과 신앙, 그리고 서로 대화가 되는 자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는 분명히 훌륭한 자였습니다.

 

1) 엘리바스의 인격

 

그는 많은 부분에서 박식하며, 꿈을 꾸며, 영을 분별할 줄 아는 자였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으로 봐서 그는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자였음이 틀림없으며, 욥이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는 욥의 친구였지만 경솔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친구의 아픔을 보면서 칠일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진심 어린 아픔과 놀라움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는 그가 욥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또한 고통 받는 욥에게 어떻게든 위로가 되고 싶어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인격은 매우 존경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2) 엘리바스의 신앙

 

그의 말들을 통해 보면 그는 매우 신중하며, 많은 명상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힘썼고, 또한 들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으며(4:16),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환상을 보았습니다(4:13,7:14). 오늘날과 같이 성령님의 시대가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주셨던 시대였음을 생각하면 그는 매우 경건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미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던 욥과 변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변론이 끝난 후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번제 헌물을 드리라는 명령에 대하여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42:7-9). 그는 비록 욥과 변론을 하고 있었고, 또한 그의 말들이 어리석은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매우 경건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엘리바스의 충고

 

엘리바스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니 욥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회개할 것을 권면합니다. 실제로 욥이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곤경 가운데 있는 많은 자들에게 위로자이며, 친구로서 살았습니다. 엘리바스는 그러한 욥이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분명히 그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종교인들에게서 가장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사들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회개하는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풀었습니다. 몰론 고난의 원인이 죄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까닭에 누구든지 회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엘리바스의 충고는 욥에게 도움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의 고난은 죄로 인해 온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율법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은사주의자들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들이 반드시 죄로 인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숙한 믿음으로 가기 위해서 누구나 겪는 것이며, 최종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아직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2. 엘리바스가 말한 내용과 문제점

 

엘리바스의 주장은 지극히 철학적입니다. 그것은 매우 경건해 보이지만 가장 오래된 이단인 영지주의를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논리로 분리를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결코 망할 수 없다는 논리를 가지고 설득하려 합니다. 그의 주장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1) 악인은 반드시 망한다.

 

엘리바스의 생각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는 욥에게 닥친 모든 재앙들이 불법으로 인한 것임을 말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는 “불법을 심고 악을 뿌리는 자들은 바로 그것을 거두나니”(4:8)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종교인들의 일반적인 주장과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모든 재앙의 뒤에는 반드시 죄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앙이 왔을 때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친구였지만 그에게 위로하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종교인의 관점에서 정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종교인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과연 욥은 죄로 인하여 재앙을 만난 것일까요?

 

2)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

 

엘리바스는 죄 없이 멸망한 자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의로운 자는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4:7). 이는 곧 의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결코 고난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에게 고통이 오게 되더라도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학 하시다가도 자신의 손으로 온전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5:18). 이 말은 자칫 고난 중에 잇는 사람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며, 형통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의인으로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실제로 대다수의 종교인들은 이러한 생각 아래 살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죄인처럼, 넉넉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의인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특히 욥에게는 결코 위로가 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진리라 할지라도 상황에 맞게 적절히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시고,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최소한 욥에게 있어서 그 권면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자신의 입장에서 느끼는 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은 현재 모든 것을 잃었고, 또한 그의 육신마저도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조차도 극심한 절망 중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한 욥에게 엘리바스는 죄로 인한 것이라고 회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듣는 입장에서는 비난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옳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욥에게는 더욱 큰 상처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났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고생하려고 태어났다고 말합니다(5:7). 그의 말은 단순히 인간의 삶이 복되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고난을 위해서 인생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즉 엘리바스의 눈으로 볼 때 욥의 고난은 매우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고통 아래 놓여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이브)가 죄로 인해 주어진 결과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고난 받는 것에 대하여 당연하게 여기시는 분은 더욱 더 아닙니다. 그분은 오히려 우리가 그분 안에서 더욱 복된 삶을 누리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자칫 욥을 조롱하는 말로 들립니다. 그는 욥의 고난을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엘리바스가 진실한 위로자였다면 욥이 당하고 있는 아픔을 보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욥에게 위로부다는 종교적인 권면만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권면은 오히려 욥의 아픔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3. 엘리바스의 권면에 대한 욥의 대답

 

엘리바스의 권면은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듣는 이의 입장에 따라서 매우 훌륭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상황에 처해있는 욥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말은 오히려 더 큰 아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욥은 엘리바스의 장황한 설교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1) 욥의 대답

 

욥은 자신의 처지를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가 지금 엘리바스에게 원하는 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는 “나를 가르치라. 내가 내 혀를 억누르리라. 내가 어디에서 잘못하였는지 깨닫게 하라”(6:24)는 것입니다. 만일 죄로 인한 것이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미 온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상태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욥의 요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알지도 못하는 죄를 무조건 회개하라고 하시지는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욥은 엘리바스를 책망합니다. 그는 엘리바스가 바른 말들을 하는 것 같지만 무엇을 책망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자신을 노리고 구덩이를 파고 있다고 말합니다(6:25-27). 바른 말이 위력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적절한데 쓰이고 잇지 않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들마다 적절하게 사용되었을 때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못 쓰여 지게 되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엘리바스는 바른 말들을 욥에게 흉기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지식이 있는 자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지식이 있는 자가 반드시 훌륭한 선생은 아닙니다. 지혜롭게 말하는 것보다 훌륭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2) 욥의 기도

 

욥이 현재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7:15). 그가 힘들어 했던 것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정작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7:20).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소연합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현재 그의 상황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의 육체는 너무도 심각할 정도도 상처가 심했고(7:5), 친구조차도 위로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오직 그의 마음을 알아줄 분, 즉 자신의 증인이 되어 줄 분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그는 차라리 죽음을 원했습니다(16:19). 그는 차라리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면하기 원했습니다.

 

욥의 기도는 매우 절망적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어떠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뵙기를 청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욥을 통하여 이 세상의 일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보이고자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절망가운데 잇는 자들에게는 어떠한 말들도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잠잠할 필요가 있는 자들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고 오직 자신을 향한 뜻과 계획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엘리바스와 같이 자신이 아는 것들을 말한다고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처가 될 뿐입니다. 욥의 기도를 통해 보듯이 그는 더욱 절망의 상황에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계신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아 갈 필요가 있는 것들입니다.

 

 

내용연구 1-3 빌닷(욥8-10,18-19,25-31장)

 

빌닷은 엘리바스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엘리바스가 욥에게 훈계를 할 때 욥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더욱 강한 어조로 욥을 책망하듯 권면합니다. 그는 이전시대의 사람들, 즉 조상들의 가르침에 대하여 말하면서 욥이 그들의 가르침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려 합니다(8:8). 그의 말들은 지금까지 조상들의 전통과 역사를 통하여 배웠고, 지켜왔던 것들에 대한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인식시키려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욥에게 있어서 그의 가르침조차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은 더욱 비통한 심정으로 그들에게 답변하고 있습니다.

 

1. 빌닷의 충고

 

빌닷은 엘리바스보다는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생각으로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직선적이고, 공격적으로 욥에게 설득했던 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주저하지 않고 말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비록 말을 지혜롭게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지혜로운 자를 대표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지식이 뛰어났던 자로 추정됩니다. 그 증거로 그는 이전 시대의 사람들, 즉 조상들의 교훈을 말하려 하고 있고, 또한 표현에 있어서도 매우 은유적인 표현들을 사용함으로서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사람인 것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지식은 때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는 욥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었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안겨다 준 자였습니다.

 

1) 빌닷의 신앙

 

그는 전통적 진리에 자신의 신앙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조상들의 가르침과 속담, 그리고 구전을 통하여 내려오는 말들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지식만으로 말한다면 그는 매우 뛰어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꿈을 꾸고,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힘썼다는 사실들을 생각하면, 그의 신앙은 극히 지식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에 그의 말들에는 확신이 있었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상대방의 상태와 관계없이 원칙대로 교훈합니다.

 

빌닷과 같은 사람들은 현대 신학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많은 지식은 사람들에게 상처가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통, 혹은 원칙(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성경에서 말하는 원칙과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상대가 상처를 받게 되도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빌닷의 말은 그 당시의 전통과 가르침으로 볼 때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오히려 그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더 큰 고통으로 괴로워했고, 그의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통과 원칙만으로 사람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2) 빌닷의 착각

 

그는 자신의 신념과 판단에 근거하여 욥의 자녀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죽이셨다고 말합니다(8:4). 그는 그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자신의 신앙적 이념을 묶어서 욥을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욥이 매우 훌륭한 가정 교육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그는 자녀교육의 실패를 말하고 있고, 심지어 욥의 말이 가증스럽다고 책망합니다. 당연히 그는 자신의 신앙에 근거하여 욥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람들에 대하여 정죄하거나 수군수군거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의 말들이 자신의 신념과 판단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이는 곧 피차 많은 상처를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합니다. 빌닷은 보지도 않은 것들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욥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를 권면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빌닷과 같이 착각하여 상대방을 정죄하려 한다면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언제나 가르침을 받는 자의 입장에 서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빌닷의 가르침

 

빌닷은 조상들의 가르침, 즉 전통에 매우 충실한 자였습니다. 특히 그의 가르침 중에 사람들에게 가장 잘 인용되어지는 것이 있는데 이는 “비록 네 시작은 작을지라도 네 마지막 끝은 심히 크게 되리라”(8:7)는 말입니다. 이 가르침은 성경 안에서 매우 유용하게 인용되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욥에게 있어서 이 가르침은 결코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 잘 못된 비유

 

빌닷의 가르침은 욥의 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시작은 작을지라도 끝은 심히 크게 되리라”는 말은 듣는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큰 오해를 가져 올 수 있는 말입니다. 빌닷이 말하려 하는 것이 과거에 욥이 누렸던 복이 작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현재 고난이 아직 미약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욥에게 있어서는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빌닷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진리라는 것은 말의 옳고 그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사실상 빌닷의 가르침은 성경 안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장차 받을 복에 대한 말씀을 생각나게 하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많은 일들을 맡기시겠다는 약속(마25:21,23)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소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삶을 살게 된다면 주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입혀 주신다는 소망을 갖게 하는데도 매우 유익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 특히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에게 미래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 욥에게 필요한 친구는 자신의 아픔을 같이 고통스러워하고, 울어줄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러나 빌닷은 오히려 친구를 책망하듯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좋은 친구, 혹은 좋은 선생이 될 수는 없습니다.

 

2) 기복신앙

 

빌닷과 기복신앙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매우 심각한 기복신앙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일단 그는 욥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욥의 고난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기 때문에 온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다른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닷은 매우 적극적입니다. 그는 창대해지는 것, 즉 심히 크게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복주의는 종교인들에게 흔히 볼 수 잇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장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생명의 씨가 심겨졌다면 당연히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질과 명예, 권세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내면에서 자라는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으로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리고 사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평가하려 합니다. 욥의 친구들에게는 욥의 처한 상황이 매우 불행해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눈이 오직 욥에게 향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16:7). 기복신앙은 믿음이 성장하는데 있어서 최대의 적이라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욥의 찬송

 

욥은 빌닷의 공격적이면서도 직선적인 권면을 듣고 매우 비통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그를 탓하거나 변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의 찬양은 절망 중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찬양의 내용 역시 자신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고, 오히려 처지를 한탄하듯이 노래합니다. 찬양은 결코 아름다운 말이나, 듣기 좋은 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솔직한 감정을 드러낼 때 가장 아름다운 찬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욥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고통 속에 부르는 노래

 

그의 육체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는 뼈와 근육과 살에 이르기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마치 먼지와 재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30:17~19). 또한 그는 자신을 용들의 형제요, 올빼미들의 벗이라고 말합니다(욥30:29). 이는 그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함을 한탄하며,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의 하프는 애곡으로, 오르간은 우는 자들의 소리로 변하였다고 고백합니다(욥30:31). 욥이 고통 중에 부르는 노래는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내용이 소망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욥의 노래 가운데 가장 진실하며, 슬픈 노래입니다.

 

일반적으로 노래는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소망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언제나 소망적이고 행복할 수만은 없듯이 우리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노래 역시 언제나 아름다운 것일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통을 고백함으로서 그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그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잇도록 도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그분 앞에 내려놓고(마11:28),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잇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소망의 노래

 

욥은 육체의 고통 중에도 소망을 노래합니다. 그는 “내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6)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고통을 받는 중에도 주님을 찬송했습니다(1:21). 그리고 그 찬송이 있은 후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욥의 찬송은 그를 견디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찬송하는 일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온 몸이 묶인 상태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이 기도와 찬송 밖에 없었듯이(행16:25) 욥의 상태도 온 몸에 병이 들어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기도와 찬송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그가 모든 고통을 이기고 사탄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무기였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훌륭한 노래는 나의 마음이 곡조를 통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 변할 수 있습니다. 이말은 곧 사람들이 모든 환경에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이 말이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주님을 높이기도 하고, 또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감격하여 우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성경 안에서 묵상한 애용을 가지고 노래하기도 하며, 또한 자신의 고백과 다짐을 담은 시를 노래할 수도 있습니다. 찬송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기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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