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연구2-1 소발(11-14, 21장)

 

엘리바스와 빌닷에 이은 소발은 욥에게 매우 철학적인 접근을 시도합니다. 그는 앞의 두 사람보다 더욱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며 욥을 권면합니다. 그는 욥이 앞에서 권면한 두 사람의 말에 대하여 계속해서 변론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듯 한 말에 대하여 욥이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매우 많은 지식과 철학적 논리를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도 역시 욥의 마음을 위로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욱 많은 변론의 구실을 만들었습니다.

 

1. 소발의 말

 

앞 서 말한 두 사람의 말에 대하여 변론하는 욥의 모습을 본 소발은 매우 분노한 어조로 욥을 책망하듯 권면합니다(11:2,3). 과연 그의 말이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욥에게 적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욥의 상태에 관계없이 자신의 철학적 논리와 지식을 가지고 욥을 강하게 책망하듯 권면하고 있습니다. 앞 선 두 사람이 말한 것에 대해서 공감하듯 하면서도 더욱 형식적인 말로 욥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을 높이는 듯 보이지만 매우 위험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1) 소발의 책망

 

소발은 욥에 대하여 말이 많은 사람, 심지어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 이 권면은 욥의 상황을 생각하면 매우 충격적인 것입니다. 그는 욥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욥은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하나님께 고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가식이 없었고, 오히려 주변의 친구들이 볼 때는 하나님의 분노를 가져 올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충격적인 말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온전하지 못한 몸을 가지고도 오히려 친구들보다 더 많은 말들로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소발은 참을 수가 없었고, 욥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실제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은 많이 선생이 되지 말 것을 경고하면서 “혀는 아무도 능히 길들이지 못하나니 그것은 다스릴 수 없는 악이요 죽이는 독으로 가득한 것이니라”(약3: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발은 욥이 말이 많아 많은 죄를 짓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책망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염려만을 생각한 나머지 친구에 대한 배려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욥의 말을 책망하기 이전에 애통하고 있는 욥의 마음을 먼저 헤아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비웃고 책망하며, 더욱 큰 상처를 안기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진리라 할지라도 잔인한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은 항상 조심하고 간결하게 구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많은 말이 주는 결과

 

욥의 친구들은 욥이 많은 말을 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들이 더욱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지식에 근거한 신념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시간을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 진리의 여부와 관계없이 많은 말들을 끌어들여 말하는 행위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말들은 분명히 많은 실수를 하게 되며, 때로는 상대방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겨줄 수 있습니다. 자기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강요하듯이 말하는 행위는 결코 지혜롭지 못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생각과 갈등을 하게 만들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는 말들은 그가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변호하는데 주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서로가 배려하고 돈독한 우정을 과시했던 그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많은 말, 특히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많은 말들은 오히려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특히 소발과 같이 무례한 모습으로 말하는 것은 더욱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소발의 착각

 

소발은 욥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 안에는 욥에 대한 저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욥이 당한 현재의 고난이 그가 행한 불법보다 적다고 말합니다(11:6). 이 말의 의미는 욥이 지금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들은 자신의 지식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지식에 대하여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말을 보면 그는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11:7-9). 그는 믿음 안에 사는 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1) 소발의 잘 못된 위로

 

욥은 매우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유를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구들의 권면을 들으면서 스스로 낙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는 심지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14:19)라고 말하기도 하며, “그분께서 진노하사 나를 찢으시고 미워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가시니 내 원수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신다”(16:9)고 했습니다. 이러한 욥의 고백들은 절망스러운 환경으로 몰아넣는 소발의 말에 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욥에게 지속적으로 소망이 없는 말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소발은 위로하기 위해서 나아마로부터 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위로보다는 책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의 말들은 철저히 그의 지식과 신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가 한마디씩 말할 때마다 오히려 욥의 상처는 더욱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갖게 하기보다는 절망의 상황을 만들어 냄으로서 욥의 입에서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를 내도록 만들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말은 상처받은 이들에게 소망을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절망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소발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지식의 한계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식의 한계는 바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소발은 분명히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의 풍부한 지식은 욥을 권면하는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그의 말은 전통적으로 들어 왔던 하나님에 대하여 결코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식을 뛰어 넘는 분이십니다. 소발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오히려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욥도 역시 하나님에 관하여 많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당대에 존경받을만한 지혜로운 자였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친구가 자신의 처지와 같이 되었을 때 그도 친구들과 같은 권면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변론도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분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도 역시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지식이 전부였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서야 깨달았습니다(38:-40:). 그는 자신이 매우 적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에는 오직 귀로만 들었고,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자였음을 고백합니다(42:5).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지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보다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욥은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친구들도 하나님의 꾸짖으심이 있게 된 이후에 회개하였습니다(42:8-9).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으로 벗어나십시오.

 

3. 소발의 어리석음

 

소발이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생각, 즉 신념으로 모든 말들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욥에 대하여 말할 때 “내 생각들이 나로 하여금 답변하게 한다”(20:2)고 말합니다. 심지어 스스로 대단한 자처럼 소개하기를 “내 지각의 영이 나로 하여금 답변하게 하는도다”(20:3)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는 “그가 자기 똥처럼 영원히 사라지리라”(20:7)는 말과 같이 듣기에 민망할 정도의 경박한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는 풍부한 지식에 비하여 매우 어리석은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절망을 안겨주는 권면

 

욥은 엘리바스와 빌닷의 어리석은 권면에도 불구하고 잘 견뎌왔습니다. 그러나 소발의 거침 없이 쏟아내는 권면은 욥으로 하여금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욥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편에서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가 모든 것을 잃었어도 인생의 참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거듭되는 책망에 가까운 권면은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소발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욥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욥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욥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욥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바른 말이라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절망만을 안겨 준다면 그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입니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 더욱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에 근거한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때로는 말하는 사람 자신도 듣지 않으려는 상대방에 대하여 실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말들이 듣는 자에게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가르침이나 훈계는 오히려 많은 상처를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면하는 자는 듣는 이가 소망을 갖도록 만들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2) 욥의 대응

 

소발의 어리석음을 대하는 욥은 그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21:4). 오히려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는 고통의 과정에서 마지막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욥이 내린 결론은 인생이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21:26), 더 이상 육신적인 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말 것에 대한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가장 깊이 생각해야 할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바울도 자신의 세상적인 모든 배경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8). 그것들은 곧 멸망을 당하게 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은혜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자 했을 때 부딪히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욥은 고통 중에도 그 일을 찾고자 했습니다. 과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가? 그는 자신이 아픔을 당하는 동안 이 고민 안에서 생각하고, 또한 친구들에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 간청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세입니다.

 

 

내용연구2-2 엘리후(32-37장)

 

엘리후는 마치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멜기세덱(창14:18-20)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람의 친족 중에서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로 매우 지혜로운 자임에 분명하지만 특별히 자신의 대하여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 논쟁에 끼어 든 이유는 그들의 변론이 매우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 대신 자기를 의롭다”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지적하려 하였고, 그의 친구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대답을 찾지도 못한 채 욥을 정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32:2-3). 그의 성격으로 보면 욥과 세 친구가 원만한 대화를 통해 위로가 되었더라면 끼어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논쟁만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엘리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중재자 엘리후

 

엘리후가 다른 세 친구들과 다른 것은 그들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난 후에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결코 충동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무슨 말을 통해서 그들에게 위로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교만이나 자랑도 없으며, 상대방에게 자신의 신념을 주입시키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엘리후의 변론

 

엘리후는 사람 안에는 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면서 자신의 말이 전능자, 즉 하나님의 영감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32:8). 즉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 그리고 지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에 따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확신 있는 어조로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시고 [전능자]의 호흡이 내게 생명을 주었느니라”(33:4)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자신의 의지에서 온 것이 아니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엘리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리고자 하는 계획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엘리후도 자신이 흙으로 지어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33:6).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뜻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갈1:10), 또한 그분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는 아무도 위로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의지로 사람을 설득하려 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좋은 위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언제나 상대방의 편에 서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필요한 말들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2) 엘리후의 인격

 

욥은 친구들의 훈계를 들으면서 당당하게 반박했습니다(13:22,23:4-7,31:35-37). 심지어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대답을 하실 수도 없고 우리와 함께 재판을 받으실 수도 없는 분(9:32)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공격적인 변론에 대하여 매우 불편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상태를 본 엘리후의 접근은 친구들의 방법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도 욥과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말합니다. 그리고 욥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33:6,7). 엘리후는 자신의 생각으로 욥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욥이 자신의 말로 인해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분명히 훌륭한 인격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인격의 기본은 역시 남을 배려하는데서 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격을 겸손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겸손함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상처만을 안겨 줄 뿐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많은 지식과 경륜이 있었지만 욥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가장 젊고(32:4), 부족한 자였지만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대할 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마11:29).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중재자로서 가장 필요한 인격입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2. 고난의 목적

 

엘리후는 중재자, 즉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욥의 사이에서 말을 했습니다. 그는 다른 세 친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지혜롭게 접근했으며, 또한 욥의 마음을 움직 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엘리후 자신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던 사람이었으며, 또한 자신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욥의 고난은 자신 뿐만 아니라 엘리후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욥의 고난을 통해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또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욥의 고난은 결국 욥 자신 뿐만이 아니라 엘리후, 그리고 세 친구들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만드는 동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1) 교만의 유혹

 

사람들은 물질과 명예, 그리고 지식이 쌓이는 순간 교만의 유혹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으로서 가장 완벽했던 아담과 하와(이브)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창3:5,6). 마귀는 결코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교만의 위험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는 엘리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자신의 생각으로 욥을 판단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34:3,4). 심지어 욥은 그토록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를 앞세우거나 하나님을 비방하는 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33:8-12). 이러한 교만들은 자신이 완전하다는 신념이 강한 자에게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에 대하여 쉽게 착각을 합니다. 모세도 이집트의 왕궁에서 자라면서 자신을 훌륭한 지도자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지도자가 아닌 교만으로 가득한 자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이 가장 뛰어난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마26:74). 사람들은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거나 명예로운 자리에 앉게 되면 자신의 본래 상태를 잊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본래부터 연약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들입니다. 엘리후나 욥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훌륭함은 즉시 깨닫고 돌이켰다는데 있습니다. 교만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고난을 통한 겸손

 

결국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은 겸손에 있습니다. 만일 욥에게 고난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바르게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주신 분도 {주}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시라”(1:21)는 고백을 했지만 고난을 통해서 그 증거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에는 자신 안에서 모순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육신적인 고통과 변론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고백은 엘리후와의 만남을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결코 믿는 자들에게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현재 받는 고난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습니다(롬8:18).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게 합니다. 그 안에서 연약함을 알게 될 것이며, 겸손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결국 고난은 믿는 자에게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믿음으로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곧 주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낮추고, 오직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며, 그것은 고난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엘리후의 권면에 대한 욥의 태도

 

욥이 생각했던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언제나 좋은 것들로 넘치게 주시는 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수많은 재앙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깊은 갈등과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세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항변했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 안에 있는 문제들을 보아야 했고, 또한 그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 욥의 침묵

 

엘리후와의 대화를 보면 욥은 자신이 대답해야할 부분에서 때로는 침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은 그동안 세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거침없이 대답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들을 귀를 열어 놓고 있었고, 그 말들을 통해 자신의 문제들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자신을 자극하는 말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했다면 이제는 그 말들을 자신의 치료제로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침묵은 어찌 보면 가장 훌륭한 치료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주님의 음성이 회중들이 많은 곳, 즉 각종 변론과 설교, 그리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은 잠을 잘 때나(삼상3:3,4), 양을 칠 때(출3:1,2), 또한 무의식 상태(행10:10)에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의 생활 주변 어느 곳에서든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때로는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의 침묵은 자신을 볼 수 있게 하고, 그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2) 욥의 믿음

 

욥은 엘리후의 권면을 듣는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말했던 내용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들이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내하고 계셨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완벽한 행동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그것들을 깨달아 알게 됨으로서 더욱 굳건한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완벽하게 경건한 생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욥에 대하여 착각을 하는 것도 그의 말이나 행동은 모두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욥은 완벽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솔직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도 사람이었고, 많은 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그것을 알고 바로 잡았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누군가 실수를 하게 되었을 때, 책망함으로 모든 가르침을 대신한다면 반드시 실족하게 될 것입니다. 실족은 하나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것입니다(마18:6; 막9:42).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대적한다면 그들을 책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장과정에서 있는 솔직한 표현들과 시행착오라면 그들을 관대하게 대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연구2-3 욥의 회개(38-42장)

 

엘리후에 이어서 욥이 마지막으로 변론을 하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욥은 여전히 원인모를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뜻을 알지 못하고,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와도 변론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33: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욥을 만나기 위해서 오셨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 만남이 단순하게 명령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위로하며 그분의 사랑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시는 장면이 종종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 만남은 대부분 극적이며, 대화를 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강요하거나 지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설득하고 계시며, 또한 그들이 깨닫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시고 인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집트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모세를 설득하신 분이시며, 광야에서 홀로 남았다고 한탄하던 엘리야를 만나주신 분이십니다.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만나주셨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사울(바울)을 친히 만나셨던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변하게 하시고, 결국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들을 깨닫고 순종하는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1. 하나님과의 대화

 

욥은 많은 변론을 통해서 스스로 더욱 많은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세 친구들을 통해서 그는 육신의 고통보다도 더욱 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욥을 보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엘리후를 보내신 후에 이제는 직접 욥을 대면하십니다. 자신의 존재를 보이심으로서 욥이 이제는 더 이상 변론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욥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이제는 욥이 대답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1) 욥의 깨달음

 

하나님께서는 변론 중에 있는 욥을 향해 “지식이 없는 말들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이 자는 누구냐?”(38:2)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욥의 말들은 매우 화려한 수식과 뛰어난 언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매우 어리석고 우둔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분명히 그의 친구들보다 신실한 상태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면 감히 자신의 의를 드러낼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순간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어두운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깨달았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친구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했던 내용들도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앞에서 말씀하실 때 그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깨달았던 것은 자신의 존재가 매우 미약한 존재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실제로 믿음의 길로 접어드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욥의 변함없는 믿음

 

사탄은 처음부터 욥이 고통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환경을 모두 파괴했던 처음의 계획이 실패해서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탄은 육체를 고통스럽게 만들면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에게 있어서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절망에 가까운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극에 달해 있을 때 엘리후를 만났고, 그의 위로가 있은 후에 그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연단을 통하여 더욱 견고해 질 수 있었습니다. 연단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사48:10). 왜냐하면 연단이 없이는 귀하게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의 기간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친구들, 그리고 사탄 앞에서 자신의 변함없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자신에게뿐 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편에서도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는 곧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봉사와 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을 통해 보듯이 변함없는 믿음으로 시험의 과정들을 이기는 것보다 좋은 경배의 수단은 없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오히려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고난은 결코 피할 것이 아닌 우리의 온 몸과 마음으로 이겨내야 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창조의 신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창조의 위대함을 소개하십시다. 그 창조가 있었을 때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38:7). 그리고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속에 있음을 보게 합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과 그로 인한 변론으로 인하여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보도록 요구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욥은 결국 그 놀라운 섭리 앞에 자신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우연히, 혹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들입니다. 그분의 명령이 없이 만들어 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귀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려 합니다. 그는 세상의 지혜 있다고 말하는 자들의 입을 통해 사람들을 속이는 일들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이 창조의 신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창조의 신비를 밝히려 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설득하기 위해서 창조에 관하여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관해 눈을 뜨게 된다면 그의 믿음은 더욱 분명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부터 인체의 신비들, 그리고 자연의 이치와 같은 것들을 보면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욥이 눈을 들어 세상을 보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더 이상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떠한 철학과 지식을 다 동원해도 결코 견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완전한 창조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과학의 힘을 빌어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눈을 속여 세상의 어떠한 것도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사람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흉내 내어 만들 수 있을지언정, 오히려 그것들은 많은 재앙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은 단순히 외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이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하게 하셨고, 그것들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속에 거하는 모든 것과 사막과 짐승들, 어족들 그리고 구름, 바람, 비와 눈, 우박 등 갖가지를 다 지으셨는데 하나도 불완전함이 없이 각기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과학으로 모방은 할 수 있을지라도 그 본질을 모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혼란 없이 움직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고 마구 사용하는 것들로만 가득하게 되었다면 이미 세상은 파괴되고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가 창조 이후로 계속되고 잇다는 것은 아직도 그분에 의해 세상이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질서는 그분께서 이 땅의 사람들의 악한 것을 보시고 멸망시키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께서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을 보고 오직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회개 뒤에 얻은 은혜

 

욥은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신의 부족함을 알 수 잇었습니다. 그도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이며, 연약한 육신의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를 일으켜 줄 수 있는 것은 없었으며, 심지어 그의 가까운 친구들마저도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느끼는 좌절감은 더욱 심각했을 것입니다. 엘리후에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나타나셨고, 그분께서 욥에게 사랑과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1) 욥의 회개

 

욥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더 이상 자신에 대하여 변호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42:5~6)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에 관하여 단순히 지식으로만 이해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었고, 또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잊게 할 만큼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을 자책했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많은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욥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완전한 자, 즉 의인이라고 불려졌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고,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가 인내의 시간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보는 세상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과 육신에 속한 죄의 모양들이었습니다. 그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고백하였습니다. 성숙한 그리슫인이 된다는 것은 많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 욥에게 주신 은혜

 

욥에 대하여 돌아보면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가 회개를 하고 난 이후에 그의 친구들과의 관계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있고 난 후에 주님께서 욥에게 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 배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42:10).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하셨는데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18:18)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분명히 욥의 세 친구들과 원수의 관계로 남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주 안에서 계속 교제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복을 받고 난 이후에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빵을 먹고 {주}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해 슬퍼하며 위로하고 또 각각 돈 한 개와 금귀고리 한 개를 그에게 주었습니다(욥42:11). 그는 또 다시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 받았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의 시간들은 많은 이들에게 교훈이 되었고, 욥도 이 고난의 시간들을 통해서 더욱 성숙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은혜는 물질과 자녀를 얻은 것으로만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 가장 큰 은혜는 바로 욥이 자신을 알고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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