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기도

조회 수 3115 추천 수 0 2010.06.05 15:13:46

우리는 어떠한 자를 능력 있는 전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구분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더구나 물질, 명예, 권세, 지식의 정도에 따라 인격의 정도를 측정하는 현대인들에게 참된 전도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제아무리 성경의 기준을 따라 능력 있는 전도자로서의 삶을 산다할지라도 아무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뭐래도 최고의 전도자였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와 서신은 오늘날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는 교회와 말씀의 기초를 세웠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단순히 상징적인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속에 뿌리 내릴 수 있게 한 위대한 전도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 사도 바울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았을 것이며, 온 회중을 감동시킬만한 언변이 뛰어난 설교자요, 기적과 표적을 몰고 다니는 능력자 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오늘날 우리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면 능력 없고 추한 전도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도 그가 행한 업적에 비해서 매우 초라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처한 현실이 육신적으로는 매우 빈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위대함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어려움이 그를 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고후 12:10)

자신의 약함을 강한 것으로 만드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 바울을 통하여 참된 능력있는 전도자의 삶을 설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이 시원치 않은 바울

"내가 비록 말에는 서투를지 모르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오직 우리는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일로 온전히 드러났느니라"(고후 11:6)

"그들이 말하되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함께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도 형편없다 하는도다"(고후 10:10)

우리는 구전에 근거한 것이지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최고의 수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점을 들어 그가 상당한 지식을 가진 자였고, 또한 훌륭한 웅변가였으므로 당연히 바울도 뛰어난 설교가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당시 다른 전도자들에 비해 뛰어난 설교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이 시원치 않다는 객관적인 평을 들어야 할 정도로 설교자로서는 그리 인정 받지 못했습니다. 어찌보면 바울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바울과 유사한 인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는 모세도 말이 둔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모세가 주께 아뢰되 오 내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자니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니"(출 4:10)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형 아론을 대변자로 붙이셔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도록 하셨습니다. 모세와 바울은 이러한 점에서 매우 유사합니다. 뛰어난 언변을 지니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함으로 모세는 구약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바울은 신약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교훈 삼아야 할 것은 사람의 마음을 녹일 듯한 뛰어난 말솜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 중간 중간에 섞여 나오는 유머나 재치는 청중들에게 집중력과 재미를 가져다 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을 위한 설교를 하는데는 이러한 요소들이 필수적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나 세미나에는 언제나 재미있는 목사(강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미에 뻐져들다 보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할 우려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언제나 진지함속에서 깊이를 더해가기 때문입니다. 재미에 빠져 진지함을 상실해간다면 아주 중대한 타격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비록 뛰어난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능력있는 전도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복음에 대한 진지함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논리있고 청중을 사로잡는 설교를 하는 데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복음이 가지고 있는 깊이를 더해 가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를 가진 바울

"여러 계시가 넘침으로 말미암아 분량 이상으로 높임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 육체 안에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는 나로 하여금 분량 이상으로 높임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12:7)

우리가 가진 사역자에 대한 고정관념은 항상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지켜주시는데 건강하지 못한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매우 종교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특징이 만사형통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자 앞에 가난과 질병과 고난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됩니다.

아브라함도 고향과 친척으로부터 떠난 것이 복이 되었고, 이삭도 블레셋 사람에게 우물을 빼앗긴 것이 복 받는 계기가 되었고, 야곱도 에서와 그의 부모를 떠나게 된 것이 복이 되었고, 모세가 왕궁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간 것이 부르심 받은 계기가 되었고, 다윗이 사울의 창을 피해 달아난 것이 훌륭한 군사를 얻는 계기가 되었고, 욥이 자신의 모든것을 잃었던 것이 갑절의 복을받는 계기가 되었고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이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된 것처럼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반대로 육체적 고통과 고난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질병이 많은 계시를 받은데서 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새겨본다면 능력있는 전도자에게는 그만큼의 아픔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현대인들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은사 하나라도 자랑하고 싶어 가히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길거리에서 소리도 쳐보고, 아무나 붙들고 기도도 하며 환자만 보면 방언을 말하면서 몇 시간을 안수 혹은 안찰하기도 합니다.

사역자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해서 자신이 비밀한 일을 깨달았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밀만이 유일하게 진실된 것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서슴없이 떠들고 다닙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단 종파가 무수히 많고, 공인된 교파라도 그 내부에는 자신들만이 바른 진리를 고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측면에서 이미 그들의 교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지만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질병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왜 비밀한 일들을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바울은 자신이 높아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것들이 복음보다 앞서서는 안된다는 것을 염두해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음이라" (고전 2:2)

어떠한 신비스런 비밀도 복음을 앞설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환상과 계시를 통해 천국과 지옥을 여행하고 다닌다 할지라도 복음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자입니다. 또한 아무리 기적과 능력을 베푼다하여도 역시 복음이 아니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나를 떠나라 하리라"(마 7:22,23)

외형적으로 능력있어 보인다고 능력있는 전도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과 같이 육신적으로는 비록 병들어 있어도 복음의 비밀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능력 있는 전도자입니다. 부디 이 시대에 오직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 주께 구한 바울

"내가 이 일로 인하여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도록 주께 세 번 간청하였더니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하여짐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후 12:8,9)

우리는 종종 교회안에서 믿음없는 자들이 조건부로 기도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하나님 ㅇㅇ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 믿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ㅇㅇ 문제 반드시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등등 그들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되어야 하나님으로 인정하겠다는 투로 말합니다.

매년마다 서점에서 베스트 셀러 목록을 발표하는 데 기독교 관련 책 중에 거의 빠지지 않고 올라 있는 것이 '죠지 뮬러의 자서전'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는 기도마다 응답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만 있다면 기도하는 것마다 모두 응답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매우 당연한 소리 같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실족 당하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이 응답을 받지 못하면 스스로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믿음과 기도 응답과는 비례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복음에 열정적이었지만 정작 그가 육신의 질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는 응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응답은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요구했던 내용과는 다르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대화의 수단이지 우리의 목표를 이루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가 일반 종교인들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가능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을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자신의 목적이나 만족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데 쓰여져야 합니다. 이것이 실패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바울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한 기도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기도의 모범을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이 분명했지만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사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26:42)

이제 더 이상 기도를 육신의 만족을 채우는 일에 쓰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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