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바울이 보는 헌금

조회 수 2838 추천 수 0 2010.06.05 10:55:24

10 장 바울이 보는 헌금

 

헌금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조심스러운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헌금의 문제로 인하여 실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또한 교회 안에서 너무도 왜곡되게 가르쳐지고 있는 주제입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헌금에 대하여 말하면서 신약 시대에 헌금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성경구절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예를 들면서 십일조가 가장 이상적인 헌금방식이라고 주장하며, 율법적인 헌금을 가르칩니다. 이 일들로 인하여 결국에는 많은 부딪힘이 생기고, 성경대로 믿는 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등을 지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헌금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헌신하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을 통해서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자신을 드려야 한다

 

헌금의 가장 일차적인 방법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기준보다도 앞섭니다. 현대인들의 물질에 대한 애착은 심각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 교회만을 찾아 나서는 경우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주님 앞에 먼저 자신을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 훈련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정상적인 헌금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5)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만일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헌금을 요구한다면 그는 분명히 강도나 혹은 절도와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듭난 사실도 없이 헌금을 요구 받고 있으며, 이 일을 위해서 율법을 가르치고, 사람들은 그렇게 헌금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며, 그들의 헌신을 통하여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듭나지도 않은 이들에 의해서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면 그곳은 분명히 종교단체로 분류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헌금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드리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고후 8:8)

바울은 헌금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것이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바울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헌금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자신을 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나올 수 있습니다.

 

2. 헌금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헌금에 대한 보상에 대하여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된 것이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헌금에 대한 보상은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회계장부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게 될 때에 그가 행했던 것만큼 상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에게 보낸 헌금에 대하여 풍성한 열매가 있을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헌금은 주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4:15-17)

그렇다면 그들이 드리는 헌금은 하늘에서만 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드려지는 헌금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도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실상 많은 이들이 주님 앞에 신실하게 드림으로 인하여 넉넉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 넉넉하고 넘치는 복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겠지만 넉넉한 삶은 자연스럽게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결국 주님께 헌금을 하는 것은 그 상에 어디에서 주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풍성하게 주어집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주님께 드린 것에 대하여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3. 자원하여 정한대로 드리라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당신은 누구의 것입니까? 만일 주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스스로 믿음에 따라 십일조가 아닌 새로운 법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십일조가 필요 없다거나, 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물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이후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교회에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물질의 소유가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약교회 성도들의 헌금에 대한 자세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믿음의 분량에 따라 스스로 얼마의 헌금을 해야 할지를 정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 분의 일이 될 수도 있고, 가진 것의 전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억지로 해서도 되는 것이 아니며, 또 가르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헌금에 대하여 바울은 기준을 정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3)

이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 성도들의 헌신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헌금하는 자의 자세가 먼저 자신이 힘이 닿는데 까지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때로는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헌금을 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자세로 헌금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스스로 정하십시오. 그것은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하신 대로 드리라

 

헌금에 대한 바른 기준은 스스로 정할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을 정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만한 가르침은 바로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하신 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가진 대로 주께서 받으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가지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 8:12)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무리한 확장으로 인하여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는 모습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가진 재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빚을 얻어서라도 교회의 헌금을 요구하고 심지어 재산을 팔아 드리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헌신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가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오늘날 교회들은 교회 물질적인 필요가 생기면 각종 특별 집회들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바울을 통하여 그러한 행위를 중단하도록 가르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대로 모아두었다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5. 심는 대로 거둔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 자기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7-8)

많은 사람들이 믿음도 없이 헌금을 합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심는 것은 무엇을 심는 지가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먼저 말하고자 합니다. 무엇을 뿌렸습니까? 만일 육신을 위하여 심었다면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헌금을 하는데 있어서도 어떠한 자세로 드리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헌금을 드리는 것이 탐욕과 자랑거리로 삼기 위한 것이라면 그에 대한 결과도 결국 비참한 육신의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함과 진실함으로 드리게 된다면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결실을 가져 올 것입니다.

 

6. 지역교회에 드려야 한다.

 

저는 가끔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지역교회에 헌금을 하지 않고 다른 교회로 헌금을 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물론 그들은 그들이 헌금하고 있는 교회가 물질적으로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선교차원에서 헌금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최소한 성경적으로는 명분이 없습니다. 그러한 지원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성도들은 마땅히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어려운 교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고전 16:1-3)

사실상 오늘날의 교회가 이러한 일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교단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교단에 속한 교회들만을 지원할 것이며, 또한 선교의 권한이 담임목사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에서 선교비용이 지출되고 잇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연히 성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헌금을 하려고 할 것이며,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헌금은 당연히 지역교회에 드려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역교회는 이 헌금을 적절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헌금을 지출함에 있어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성도들의 반발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며, 결국 성도들은 그들이 속한 지역교회에 헌금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의 방지를 위해서 교회는 재정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하며, 더불어 성도들은 당연히 지역교회에 헌금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신약교회의 모습입니다.

 

7.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렇다면 헌금이 어떻게 사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이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상 많은 교회들이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대부분이 레위족속들을 포함한 제사장들과 성막, 성전의 관리에 쓰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그러한 헌금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요, 교회는 레위족속들을 위한 헌금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 드려지는 헌금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사역자를 위해서

 

헌금의 일차적인 용도는 전임 사역자들을 위한 지원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천막을 짓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사역자들에게 물질적인 공급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자비량 선교를 했다고 말하고 있는 바울이 사역자의 지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자신도 많은 지역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들에 관하여 섬기는 자들이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며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제단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3-14)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6)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 5:17-18)

사역자에게 물질을 공급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과제입니다. 만일 교회가 사역자에게 지원을 할 수 없다면 결국 사역자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직업을 가져야만 하고, 그는 자연히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시간들을 빼앗길 것이며, 결국 가장 큰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은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사역자들이 오직 기도와 말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충분한 물질을 공급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제하는 일을 위하여

 

물질의 사용에 있어서 교회가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구제입니다. 물론 우리의 주변에 각종 선교단체에 구제를 위한 명목으로 구제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구제의 방법은 교회 내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특히 과부에 대한 구제는 성경의 많은 곳들로부터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그 조건에 있어서도 우리는 충분히 검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 5:9-10)

 

선교하는 일을 위해서

 

헌금의 용도 가운데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선교하는 일을 위해 쓰이는 것입니다. 사실상 많은 교회들이 선교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적인 지원에는 인색한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교회는 반드시 선교하는 일을 위해 지원할 수 있어야 하며,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자들의 필요를 알고 지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1-2)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4:15-16)

그러나 선교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교회 돌아보는 일들을 게을리 한다면 그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선교는 그들이 지원하는 대상자가 자신의 사역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충분히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서도 안 되며, 안정되고 꾸준하게 지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선교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원은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8. 헌금에 관한 잘 못된 가르침들

 

오늘날에는 교회 안에 헌금에 대한 많은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 못 이해하는 데서 오는 것이며, 이 잘 못된 가르침은 때때로 많은 성도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0,21)

우리는 위의 구절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을 하면서 교회에 헌금을 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하늘과 교회는 다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보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헌금()이 아닙니다. 그 답은 바울의 서신 안에 답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그리스도의 신성),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보석(구원받은 혼)들이 바로 보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보물과 헌금()은 다릅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오해되고 있는 헌금에 대한 가르침은 바로 율법의 십일조에 대한 것입니다. 말라기서에 쓰여진 성경구절은 모든 집회 때에 성도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반드시 쓰여지고 있는 성경구절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3:8-10)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흩어져 있었던 관계로 십일조를 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전을 잃었고, 레위지파들도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말라기는 그들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다시 그들이 십일조를 하도록 말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레위지파나 성전을 위하여 헌금(십일조)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 답도 성경 안에 있습니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7:12)

이제는 더 이상 율법 개념을 가지고 헌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며, 왕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구약의 율법을 가지고 헌금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면 그는 성경을 매우 잘 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들은 누군가로부터 생활비를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신약의 헌금에 대한 자세는 구약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에서 시작되어 감사로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율법의 십일조는 그 체계가 없어졌으며, 이제는 스스로 자원하여 정하고 인색하지 않게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신약성도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체계가 된 것입니다. 부디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넘치는 은혜가 이 땅에서와 하늘에서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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