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두 아들

조회 수 3287 추천 수 0 2010.06.05 18:36:20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첫째에게 가서 이르되,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21:28~32)

 

이 비유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숨은 뜻이 있습니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한 모습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율법과 의를 강조하면서도 세례(침례)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부인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을, 둘째 아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세리와 창기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더욱 큰 관점에서 생각하면 첫째 아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둘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 주님께로 온 이방인들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세례(침례) 요한과, 예수님을 거절한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구원의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의 상반된 모습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포도원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포도원이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5:1,12:10), 신약시대에는 교회나 혹은 세상의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지만 이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의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하여 가르쳐 주고자 하는 진리는 주님의 명령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첫째 아들은 부르심이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복종할 생각도 없었고 이에 대해 뉘우칠 마음의 변화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성전 밖에서는 그 맹세를 이행치 않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입술로는 대답을 했지만 그의 삶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의 행동 역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대하여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두 아들은 결코 칭찬받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속이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은 거짓과 위선의 죄를 범했으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하는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첫째 아들은 예의 바른 자이지만 정직하지 않은 자이고, 둘째 아들은 정직하지만 고집이 센 자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온전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누가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에는 순종했던 둘째 아들입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동시에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장소로 가지 않고 아버지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곧 진정한 회개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방향이 자신으로부터 아버지에게로 바뀌어 지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통하여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며, 그것이 안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입술로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 즉 삶의 방향이 바뀌었을 때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속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6:29)이라고 주장하면서 삶의 변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은 삶의 열매에 있습니다. 성경은 더욱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5:11).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 없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 대한 결론을 맺으면서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요한이 의의 길로 그들에게 왔어도 그들은 믿지 아니하였으나 세리들과 창녀들은 그를 믿었으며 그들은 그것을 보고도 그 뒤에 뜻을 돌이켜 그를 믿으려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면서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선민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그들은 나중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상황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 속에서 살았는지를 알게 되겠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청난 재앙이 됩니다.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우리의 입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삶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열매라는 것이 단순하게 물질이나 몸으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향기들입니다. 이는 곧 사랑, 기쁨, 화평, 친절, 오래 참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쟁을 일삼는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분명한 변화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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