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음악가 다윗(사무엘상16:23)

조회 수 3219 추천 수 0 2010.06.07 15:25:14

오늘날과 같이 난잡하리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음악들이 들려지고 있는 이 때에 바른 음악을 정의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을 전체적으로 매도하고 규제하려 한다면 그것도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CCM에서 소개되고 있는 모든 음악은 사탄적이다.”라고 주장한다거나 모든 악기는 교회에서 사용되어서는 않된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마음과 몸을 움직이는 모든 악기와 음악은 모두 사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이 왜 정당화 될 수 없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위대한 왕이기도 하지만 위대한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찬양을 위한 글을 쓴 시편만 해도 약 80편(1-41,51-65,68-70,86,101,103,108-110,122,124,131,138,145)에 이를 정도로 많이 썼으며 또한 성경 곳곳에서 직접 찬양을 하고 심지어 춤을 추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음악과 관련하여 다윗의 삶을 추적하여 봄으로서 진정으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자들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만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프 연주자 다윗

다윗이 연주자로서 정식으로 연주를 시작한 것은 사울에게 악한 영이 임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이미 기름부음을 받고 처음 왕궁에 출입을 하게 된 동기가 바로 음악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이미 주의 영이 떠나고 그 자리를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삼상16:14)

사울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더욱 흥미롭게 하는 것은 신하들의 제안입니다. 그것은 그의 악한 영이 하프 연주를 통해서 나가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프를 연주하게 되면 왕이 낳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주는 왕 앞에 있는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하프를 잘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 악한 영이 왕에게 임할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하니(삼상16:16)

이 일을 위해서 다윗이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정식으로 궁중 음악사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욱 흥미롭게 하는 것은 그가 하프를 연주할 때에 사울에게로부터 악한 영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음악을 통해 그의 질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할 때에 다윗이 하프를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게 되고 나았으며 그 악한 영이 그에게서 떠나니라(삼상16:23)

이 사건은 비단 다윗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음악을 통하여 주님의 손, 주님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하는 장면을 성경 안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음악하는 자를 내게로 불러오소서, 하니라. 음악하는 자가 연주를 할 때에 [주]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임하시니(왕하3:15)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그들의 연주가 악기로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악기 자체만으로도 매우 훌륭한 능력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곡조만을 가지고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심지어 그 영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에 있어서 곡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작사된 내용만 괜찮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곡조는 그 자체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히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음악이 내용보다는 곡조에 더욱 영향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의 시도 훌륭한 곡조가 없으면 사람들에게 불려지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내용이 부실하고, 단순해도 곡조가 훌륭하면 불려지게 되는 경우들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에 대하여 비교적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곡조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가 그 곡을 작성했는가? 그리고 어떠한 리듬을 사용했는가? 기본적인 곡조(장조,단조)는 무엇을 사용하였는가? 하는 다양한 조사를 거쳐서 신중하게 선택을 합니다. 이 말은 그만큼 곡조가 가져다주는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찬송시가 없이도 사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연주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도 연주를 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연주는 양들을 인도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어졌을 것입니다. 음악은 온 자연 만물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들도, 식물들도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이 음악의 힘 앞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음악은 분명히 위대한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소리의 힘입니다. 우리는 이 일들을 대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사탄이 음악을 맡았던 천사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탄은 음악에 있어서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다양한 음악들을 가지고 유혹할 것입니다. 이미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사탄의 음악들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이러한 사탄의 활동을 경계하고 주님을 위해 어떠한 찬양을 드려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2. 다윗의 춤

몇 해 전에 매우 친분 있는 어떤 분이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어떠한 이유로 이단이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춤을 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찬양을 할 때 몇 명의 성도들이 나와서 춤을 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매우 흥미롭게 생각하여 친분 있는 교회의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춤을 춘 이유를 물으니 교회 안에 무용을 전공하는 대학 교수가 있는데 그분이 자신의 재능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원한다고 말해서 찬송할 때에 함께 무용을 기획해서 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시기했던 주변 교회의 마치 무당들이 춤을 추는 것 같다면서 교단에 고소를 해서 결국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교회들이 “몸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찬양을 드리는 시간에 춤을 춥니다. 그것을 정죄하는 모습도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할 수만 있으면 그것을 하고 싶어서 사람들을 초청하기도 하고, 또 팀을 만들어서 배우기도 합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이렇게 춤을 추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춤이라는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는 춤을 추는 장면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추니 그때에 다윗이 아마 에봇을 입었더라(삼하6:14)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추고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간단한 동작의 율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춤은 격렬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춤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은 다윗이 춤을 출 때에 그 몸을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삼하6:20). 즉 다윗은 자신의 옷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사탄은 교묘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성적 자극을 바탕으로 한 춤을 사람들에게 보급하고 있습니다. 그 춤들은 격렬하고, 보기에 좋으며, 때로는 환상적이기까지 합니다. 그 까닭에 많은 젊은이들과 심지어 중년에 이르기까지 춤을 배우기 위해 문전성시를 이루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춤은 그들의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다윗의 춤은 배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 앞에서 행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춤을 추는 이유는 자신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의 치리자로 삼으신 것에 감사하여 주 앞에서 뛰노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삼상6:21). 그것은 보기에 매우 천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지만 주님 앞에서는 매우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주]의 궤가 다윗의 도시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주]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그를 업신여겼더라(삼하6:16)

[주]의 언약궤가 다윗의 도시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그를 업신여겼더라(대상15:29)

미갈은 다윗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그를 업신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도 매우 품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될 사람이 백성들과 함께 몸이 드러나는 것도 모르고첨박한 춤을 추는 것이 좋게 보일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사울 왕의 딸이었던 미갈의 눈으로 볼 때에 그의 모습은 더욱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윗의 편이었습니다. 그의 춤을 합당하게 여겼으며, 오히려 다윗을 업신여긴 미갈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도록 하심으로 그를 매우 수치스럽게 하셨습니다(삼상6:23). 다윗의 춤은 주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 안에서 춤을 추는 일이 발생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춤을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하심이 감사하고, 또한 부르심에 감사해서 춤을 추는 자가 있다면 그들에 대하여 정죄하는 일은 삼가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모든 것에 대하여 질서 있고 품위 있게 행해져야 합니다(고전14:40).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법을 정해 두고 그 안에서 행동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성령의 법 아래서 운영이 되어야만 하며, 그것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안에서 행하고 있는지를 살핀다면 심지어 춤을 추는 일조차도 모두의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춤을 추는 일은 최소한 성경의 근거로 볼 때 결코 천박한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모든 것은 지혜롭고 덕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3. 다윗의 악기

찬양을 함에 있어서 악기가 가지는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많은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을 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악기를 통한 찬양 단원의 숫자가 사천 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대상23:5). 그 가운데 주로 사용되어졌던 악기는 하프와 비파와 작은 북과 코넷과 심벌즈였습니다(삼하6:5,대상13:8,15:16,15:28,25:1,25:6,대하5:12,20:28,29:25). 그러나 악기를 연주함에 있어서 기준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기쁜 소리를 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레위 사람들의 우두머리들에게 말하여 그들의 형제들을 노래하는 자들로 세우고 비파와 하프와 심벌즈 등의 악기를 울려서 기쁜 소리를 크게 내게 하매(대상15:16)

우리는 악기가 사람의 모든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리는 찬양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기쁜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행진곡처럼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전쟁에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행진곡 풍의 노래가 찬송에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행진곡 풍에 아니더라도 우리의 영적인 정서를 기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곡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찬양을 선택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기쁜 소리입니다.

우리가 흥미롭게 생각할 수 있는 또 한가지 사실은 당시에 주로 찬양을 연주했던 자들이 제사장을 포함한 레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대상15:16,16:5,대하5:12,7:6,29:25). 물론 연주를 함에 있어서 반드시 레위인들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선견자들도 찬양을 하였지만(대상25:1-5), 대부분은 레위 사람들에 의해 연주가 되었으며,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이 되어 후에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 할 때에도 레위사람들을 찾아내어 연주를 하도록 한 것을 보면 찬양에 대한 그들의 비중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할 때에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처소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내어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심벌즈를 치며 비파와 하프를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느12:27)

그러나 이러한 일에 있어서도 결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않됩니다. 왜냐하면 다윗 자신도 레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다 사람이었지만 궁중 음악사로 초청을 받았고, 악기를 연주함으로서 사울에게 임했던 악한 영들을 나가게 만드는 일들을 했었던 것입니다. 다만 당시에 주된 연주자들은 레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며, 다윗도 그들로 하여금 연주하도록 만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경배 모임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목회자 중심의 경배 모임은 오늘날 교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 당시에 찬양을 연주하는 자들이 레위인들로 구성이 되고 그들의 역할이 매우 비중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찬양을 하는 자들은 그들이 경배 모임의 중심에 잇다는 사실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교회는 다양한 악기로 보다 아름답고 기쁨이 될 수 있는 찬양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왕이 백단목으로 [주]의 집과 왕의 궁에 이르는 계단식 단을 만들고 또 노래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프와 비파를 만들었으니 이 같은 것들은 전에 유다 땅에서 보지 못한 것이더라(대하9:11)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찬양은 다윗이 그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 이전에는 찬양을 하기 위한 계단식 단과 노래하는 자들을 위한 하프와 비파는 없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윗의 오늘날과 같이 악기와 사람들의 노래가 함께 연주할 수 있도록 개발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대상15:16). 현대인들은 대부분 악기와 노래를 같이 합니다. 이러한 형태는 바로 다윗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는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성경 구절을 근거로 악기를 금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주를 찬양하는 도고로 악기가 얼마나 소중하게 사용되고 잇는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주께서도 이러한 찬양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악기를 통해 영광을 드리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들의 재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 그리스도인의 찬양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찬양은 어떤 것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찬양이 경배의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중적인 음악을 표방하는 CCM과 같은 음악은 사탄음악으로 규정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CCM은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 불손한 동기나 다양한 음악 장르, 그리고 치밀한 사탄의 계략 아래 진행되어지고 있는 사탄 음악들의 침투 등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경계해야할 대상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사탄음악으로 치부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불려지고 있는 찬송들의 대부분이 대중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성경적으로도 지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찬양은 단순히 한 개인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에게 화답(和答)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주}께 아름다운 가락을 만들어 노래하며(엡5:19)

우리는 바울의 이 권면에서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에게 화답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서로에게 화답한다는 의미가 단순히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하나님과의 교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성도들과의 찬양을 통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찬양을 성도들과의 교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찬양이 오직 경배의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찬양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교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삶 속에서 찬양이 없는 교제를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가 교제를 위해서만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는”일에도 사용되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찬양은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에도 매우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찬양은 단순히 노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니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때에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특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과 실라 뿐만이 아니라 찬양을 듣고 있던 모든 죄수들의 결박이 풀렸던 것입니다. 찬양은 이처럼 사람들의 결박을 푸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리요?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지각으로도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노래하고 또 지각으로도 노래하리라(고전14:15)

우리가 찬양에 대하여 주의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영으로만 찬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 말에 대하여 지지하지 않습니다. 영으로 뿐만이 아니라 지각으로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혼에 속한 것으로 우리의 지식과 감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직접 영광을 드릴 수 없다면 그 찬양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찬양을 듣기 원하시며, 그 찬양은 영적 교제를 통하여 하늘에서 아름답게 들려지게 될 것입니다.

5. 결론

다윗은 위대한 음악가 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를 왕으로 기억하고 있기만 그는 모든 삶의 상황들을 찬양으로 극복한 자입니다. 그리고 왕이 된 이후에도 주께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악기를 만들고 노래하는 자들을 모아 그의 거처와 성막 사이에 계단을 만들어 찬양을 하도록 만든 자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찬양에 대하여 고정 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최고의 찬양을 드렸던 다윗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오늘날 무엇으로 찬양을 드릴 수 잇는지를 생각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잇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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