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창30:25-43)

조회 수 3185 추천 수 0 2010.06.06 22:42:41

야곱이 녹색 포플러나무와 개암나무와 밤나무 가지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그 속에 흰 줄무늬를 내고 가지들 속에 있던 하얀 것이 드러나게 한 뒤에 양 떼가 마시러 올 때에 자기가 껍질을 벗긴 가지들을 양 떼 앞에 물구유 홈통 속에 세워 놓으니 이것은 그것들이 마시러 올 때에 수태하게 하려 함이더라. 양 떼가 그 가지들 앞에서 수태하므로 줄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얼룩진 것을 낳으매 야곱이 어린양들을 분리하고 그 양떼의 얼굴을 라반의 양 떼 중에서 줄무늬 있는 것과 갈색인 것을 향하게 함 또 자기 양 떼를 따로 두어 라반의 가축에 들게 하지 아니하였더라. 강한 가축이 수태할 때마다 야곱이 가축의 눈앞에서 홈통 속에 그 가지들을 두어 그것들이 그 가지들 사이에서 수태하게 하였으나 가축이 연약하면 그것들을 그 속에 두지 아니하였으니 이러므로 약한 것들은 라반의 것이 되고 강한 것들은 야곱의 것이 되니라. 이 사람이 심히 번창하여 가축과 여종과 남종과 낙타와 나귀를 많이 소유하였더라.(창30:37-43)

 

우리는 앞서 야곱이 육신적으로 교활하기보다는 오히려 연약하고 능력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에 대하여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도 그러한 인격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도 이러한 그의 모습은 변할 줄을 모릅니다. 그는 이미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아내는 얻는 과정에서도 지극히 순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철저히 이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14년이라는 기간을 종으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라반의 행동에 대하여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를 얻을 수 있다는 기쁨 때문에 즐거움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떠날 것을 결심하는 야곱

 

이제 야곱이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미 11번째 아들 요셉을 낳은 이후로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족장으로서의 가정을 이끌 책임을 안고 라반의 집으로부터 나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도 했으며, 자신도 고향으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야곱

 

야곱은 라반에게 "나를 보내어 내가 내 본토 내 고향"(25)으로 가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고향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고향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비록 지금은 원수와 같은 관계에 있지만 하나밖에 없는 형 에서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육신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야곱의 마음에 언제나 그리움이 서려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장차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의 육신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그곳에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무능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장차 머물 곳은 바로 주님이 계신 그곳입니다. 그것은 야곱의 그리움과도 같은 것입니다. 과연 누가 세상과의 이별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한 발길을 막을 수 있습니까? 언젠가 가야할 그곳으로 마음을 두는 그리스도인! 그들은 바로 생명이 있는 자들입니다.

 

자신에게서 난 것들을 가져감

 

야곱은 먼저 고향으로 가는데 데려갈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라반에게 "외삼촌을 섬기고 얻은 아내들과 아이들을 내게 주어 나를 가게 하소서"(26)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사실상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순수한 자신의 소유만을 주장합니다. 자신에게서 얻어진 것이 아니면 소유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무엇을 주님 앞에 드러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세상에서 거저 얻어진 어떠한 것도 아닙니다. 정당하게 얻은 소유만이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땀을 흘리지 않는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혼들을 얻어오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역시 주님 앞에서 어떠한 것도 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주변 환경이 제 아무리 화려하고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열매를 맺은 것만이 장차 주님으로부터 주어질 보상과 관계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기본원칙 위에 자신의 믿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야곱은 라반에게 오직 자신에게 속한 것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줄 수 있는 것

 

라반은 떠나는 야곱에게 "내가 무엇을 네게 주랴?"(31)하고 묻습니다. 그는 실제로 아무 것도 줄 마음이 없지만 지금까지 일해 왔던 야곱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두 딸을 준 상태에서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문제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까닭에 그는 야곱이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양 떼들 가운데 점 있는 것, 얼룩진 것, 갈색인 것과 염소 중에서 얼룩진 것을 요구합니다. 라반은 이에 대하여 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십시오. 라반은 야곱이 요구하고 있는 양들을 분류하여 자신의 아들들에게 넘겨주고 오히려 자신의 소유가 될 것들만 골라서 야곱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야곱에게 짐승들을 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에 대한 모습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에서 벗어나 구원받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 세상이 인정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핍박을 계속할 것이고, 우리에게 풍성한 생활을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결코 육신적인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의 풍성함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라반은 그의 짐승들이 야곱의 소유가 되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많은 짐승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토록 많은 짐승을 얻었던 것은 결코 교활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라반을 통해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는 믿음으로 이일을 행하고 있었고, 그 믿음은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야곱

 

라반은 자신의 양이 될 것들만을 골라서 야곱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입장에서 매우 불만스러운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수고한 대가를 지불하기로 하고는 전혀 지불한 마음을 갖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의 양떼를 돌아보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자세를 보십시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라반의 행동에 대하여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떼를 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36).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의 모든 정책에 순종하고, 왕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 정부가 기독교의 말살을 위하여 고문을 하거나 심지어 사형을 시켜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단 한 번도 그들의 이러한 폭정에 대하여 반항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능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또한 정부에 대하여 반항할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을 했던 이유는 자신들의 의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일에 간섭하여 주실 것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핍박과 모욕, 견딜 수 없는 고문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친절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욕심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라반이 야곱을 대하는 모습과도 너무나 흡사한 모습입니다. 라반은 친절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끝까지 야곱을 그의 종으로 두고 싶어 했고, 자신의 재산에 대하여 아무것도 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공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껍질 벗긴 가지

 

야곱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러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포플러 나무, 개암나무, 밤나무 가지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그 속에 흰 줄무늬를 내고, 가지들 속에 있는 하얀 것이 드러나게 한 뒤에 앵 떼가 물을 마시러 올 때에 그 벗긴 가지들은 물구유 홈통에 두어 그것을 바라보게 하고 새끼를 배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이 매우 어리석은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지만 실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 가지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할 때 쓰여 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마라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의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일이 발생되자 그는 한 나무를 물에 던지자 물들이 달게 되어졌습니다(출15:23-26).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는 결코 먹을 수 없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했을 때만이 그 말씀을 먹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이락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행동은 이러한 모세의 행동과 흡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양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나무의 껍질을 벗겼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의 사형수들처럼 아무런 고통 없이 사형장으로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갈보리 산으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시기 위해 가는 길에서 수많은 채찍에 온 몸이 찟기셨습니다. 벌거벗은 수치와 더불어 예수님의 온 몸에는 얼룩덜룩한 상처가 남겨지셨던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지금 양 떼들에게 물을 먹임에 있어서 바로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생각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들을 분리함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는 그가 바라던 양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최소한 과학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일들 이후에 야곱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는 지금 양들을 분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같이 어울리지 못하도록 하는 최소한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양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첫 번째 작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분리된 삶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만일 이일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에게 있어서 경건한 삶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자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그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그는 거듭나지 못한 자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자는 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미워하는데 어떻게 죄와 함께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분리된 삶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중요한 사항들이었습니다. 심지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옴으로서 근본주의자들에 의하여 이를 규제하는 것을 봅니다. 음악, 옷차림, 술, 담배, 마약, 영화 등 많은 것들을 하지 말도록 함으로서 세상으로부터 오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떠한 방법이든지 죄를 유발시키는 모든 요소들에 대하여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죄의 유혹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소유가 될 양들을 라반의 소유가 될 양들과 분리시켰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의 은혜를 입어 낳은 양들이 이후로 다시 라반의 양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리된 삶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분리된 삶을 사십시오.

 

바라본다는 것

 

매우 흥미로운 야곱의 행동은 어린양들을 분리하고 그 양들로 하여금 줄무늬 있는 것과 갈색인 것을 향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양들의 눈이 앞을 보지 못하지 않는 한 그들은 무엇이라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야곱은 어린양들로 하여금 장차 자신의 소유가 될 양들을 바라보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계획을 성공을 하였고, 그가 소원대로 많은 짐승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에 따라서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의 행동과 인격은 그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보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겠지만 사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앞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믿음을 성숙하게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린 성도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 행동을 보이게 된다면 그들이 자라서 역시 덕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훌륭하게 가르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믿음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가르치는 자가 아무런 열매도 없이 살아간다면 그를 통해 배운 자들도 역시 아무런 결실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이 말씀은 바울 한 사람만의 외침이 아니라 경건한 삶을 살았던 모든 전도자들의 외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본이 되는 삶은 수백 편의 설교나 성경공부보다도 더욱 훌륭한 가르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야곱은 심히 번창하여 가축과 여종과 남종과 낙타와 나귀를 많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43). 그것은 그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라반을 비롯한 누구도 야곱이 부유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야곱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으려 했던 라반은 야곱이 얻은 복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복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그리 비범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지혜가 있는 것도,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의지했던 것은 자신이 연약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기대어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결국에는 낭패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렇다면 넘치는 은혜의 복을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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