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아들들(창9:18-27)

조회 수 2347 추천 수 0 2010.06.06 22:03:23

방주에서 나간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더라. 이들이 노아의 세 아들이요, 그들로부터 난 자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부가 되기 시작하여 포도원을 세우고 포도주를 마신 뒤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있더니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밖에 있던 자기의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뒷걸음쳐 들어가 자기들의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덮나니 그들의 얼굴이 뒤를 향하였으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의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고 또 이르되, 주 곧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만드시리니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하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였더라.(창9:18-27)

 

홍수가 끝난 뒤 세상은 새로운 명령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9:1)는 명령을 주셨고, 땅과 하늘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을 넘겨주셨습니다(9:2). 그리고 살아있는 것일지라도 식물이 될 것이나 피 째 먹지 말 것을 당부하시고(9:3,4), 다시 한 번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에서 풍성히 내고 그 안에서 번성하라."(9:7)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시지 않겠노라고 약속을 하시면서(9:11),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어 언약의 증표로 삼으셨습니다(9:13). 이제 인류는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술에 취한 노아

 

노아가 농부가 되기 시작하여 포도원을 세우고 포도주를 마신 뒤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있더니(창9:20,21)

 

분명히 노아는 의인이며, 완전하고도 하나님과 동행했던 자였습니다(창6:9).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셨고, 아담과 동일한 수준의 명령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노아로부터 시작되는 인류의 새로운 역사도 역시 죄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롬3:10)라는 말씀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완전한 자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자였지만 그 역시 죄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아가 술을 마신 것은 매우 우연한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의인인 그가 술을 마시고 벌거벗은 채 누워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는 친히 농부가 되어 포도원을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포도주를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마시게 되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도를 재배하고 술을 만들어 마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벌거벗은 것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벌거벗는 일은 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목욕문화가 발달한 때에는 사람들이 더 자주 벌거벗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행위들이 혹시 범죄는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시 인류가 시작되면서 있었던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또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니라.(창3:21)

 

우리는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옷을 입었던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술에 취함으로 인하여 그 은혜의 옷을 벗어 던지고 수치스럽고 더러운 죄의 모양들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 걸쳐서 하체를 드러내는 것이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사장들은 하체를 가리기 위해 반드시 고의를 입어야만 했습니다(출28:42). 그리고 성경은 분명하게 하체를 드러내는 것이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

 

우리는 노아의 아들들에 대하여 단순히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아들과 그 부끄러움을 가리는 아들정도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함이 그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고 셈과 야벳이 그 수치를 가렸다는 사실은 율법과 복음에 관하여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신뢰하는 자 모세니라."(요5:45)"

 

이 말씀은 모세, 즉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죄에 대하여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속성은 함과 매우 똑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하체를 보는 순간 그것을 형제들에게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도 우리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에 대하여 결코 너그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죄를 낱낱이 드러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죄를 가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셈과 야벳은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모범적으로 대처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노아가 수치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을 때 그 수치를 가렸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이것은 또한 다윗이 행위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하시는 사람의 복됨에 관하여 다윗도 묘사하여 이르되, 자기 불법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들이 가려진 자들은 복이 있으며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5-8)

 

바울은 복음의 성질가운데 하나가 죄를 가리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셈과 야벳은 바로 이러한 복음의 성질에 대하여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복음의 성질만을 논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부분에 걸쳐서 용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상대방의 죄를 가려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덮어줄 줄 아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범죄를 통하여 율법과 복음의 성질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믿음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율법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반드시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함의 행동에 대하여 가나안을 저주한 사실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우리의 죄를 가리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가나안을 저주하셨는가?

 

우리는 노아가 술에서 깨어 그의 아들의 행동을 보고 축복과 저주를 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당연히 함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히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유감스럽게 그의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기록에 대하여 매우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받게 되면 죄가 자식에게 넘어가는 것쯤으로 해석하여 조상의 잘 못을 자손들이 뒤집어쓰는 식의 이상한 논리를 주장하는 자들까지도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 안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약의 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완전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히10:10)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죽으심을 통하여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문을 갖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며, 그 죄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자들은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노출이 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은 완전한 것입니다.

 

노아가 함에 대하여 저주를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자였습니다. 그 까닭에 그는 죄의 모양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한 자들에 대하여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으실 것이라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5:5)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비록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생활은 도저히 믿는 자라고 보기가 힘들만큼 부패되고 타락된 자들이었다는 점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육체는 사탄에게 내어 주어 멸하게 하겠지만 그의 영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한 번 구원한 자들에 대하여 결코 그것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내 자식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아마도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부모의 소원은 자식이 부모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말을 듣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 부모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살겠지만 한 번 자녀로서 거듭난 자들은 영원히 그 신분이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보장받았으니 마음껏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6:1-3)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더불어 살 수 있을까요?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노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곧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성령에 의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요소들을 제거해 갈 것이며, 말씀의 씨가 우리 가운데 자라게 됨으로서 열매를 맺어감에 따라 점점 죄와 상관없이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애를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죄가 가나안에게 넘어가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앞서 함이 율법의 상징이 될 것임에 다하여 살펴 본 적이 있습니다. 이는 가나안과 그의 후손의 저주와 매우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따르는 후손들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고 니므롯과 같은 이는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왕이 되는 모습들을 봅니다. 이것은 율법의 또 다른 속성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구원을 하고자 하며, 사람들 사이에 계급을 만들어 다스리는 모습을 갖습니다. 그들은 결코 주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들입니다.

 

세 아들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음

 

우리는 노아의 세 아들과 관련하여 생각보다 많은 편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셈이 장자이고 그 다음이 함이며, 야벳이 막대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셈, 함, 야벳의 순서로 기록했다고 그것이 나이 순서대로 기록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결코 셈을 장자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요, 그 형 야벳의 동생이라. 그에게도 자손이 태어났으니(창10:21)

 

어째서 성경은 셈을 가장 앞에 두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셈이 아브라함의 조상이요, 더 나아가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할 때 셈의 후손들의 역사들을 다루게 될 것이므로 그를 가장 앞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함의 장자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것 역시 그가 장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9:24)

 

노아는 함에 대하여 작은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장남이 아닙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누가 장남이고 막내일 것인가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추정하기는 야벳, 셈, 함의 순서일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가 노아의 아들들에 관하여 가지는 또 하나의 편견은 인종에 관련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자료들을 통하여 셈은 황인종, 야벳은 백인종, 함은 흑인종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종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가설일 뿐입니다. 또한 중세시대 이후에 흑인들을 노예로 삼고자 했던 자들이 명분을 쌓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학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노아의 아들들이며, 한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자식들입니다. 한 뱃속에서 백인, 흑인 황인종들을 생산해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종들의 형성은 환경의 영향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노아의 아들들의 이름

 

우리는 노아의 아들들의 이름이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셈은 "높은 지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함은 "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야벳은 "확장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름의 의미는 인종 차별주의자들에 의하여 매우 난도질을 당해 왔습니다. 함의 이름이 "검다"는 의미를 가졌다는 이유로 흑인들을 차별하고 죄인 취급을 하며, 노예로 삼는 것을 정당화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함의 이름이 "검다"는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어둠, 즉 죄와 관련하여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 걸쳐서 어둠에 대하여 죄와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의 이름은 "높은 지위와 확장함"이라는 의미가 가지고 있듯이 장차 복음 안에 사는 자들이 누리게 될 영광과 확장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벳이 "확장함"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을 두고 백인종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이 오늘날 부귀를 누리고 있으므로 주의 번영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200년 전만 하더라도 아시아의 국가들이 더욱 부요하고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장차 세계의 경계는 어떻게 재편될지 모르는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은 우리의 구미에 맞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아들들은 후대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두 가지 흐름을 가지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율법과 복음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행위로 인한 구원과 은혜로 인한 복음의 역사를 가지게 될 것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는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함의 자손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의 복음으로 인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에 대하여는 "셈과 야벳의 자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사람들을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놓을 것이며, 저주와 보상으로 나누일 것입니다. 부디 은혜의 복음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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