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의 후손들[2] (창4:25-26)

조회 수 1834 추천 수 0 2010.06.06 21:59:14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를 알매 그녀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하나님께서 내게 다른 씨를 정해 주셨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셋에게도 아들이 태어나매 셋이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창4:25-26)

 

우리는 이미 앞서 셋의 후손들이 단순히 족보를 기록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즉 그들의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속성들을 믿었다고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셋은 이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에노스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뒤를 잇는 후손들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들을 가지고 있을까요?

 

가이난을 통해 보는 예수 그리스도

 

에노스는 구십 년을 살며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뒤 팔백십오 년을 살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에노스의 전 생애는 구백오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 게난은 칠십 년을 살며 마할랄레엘을 낳았고 마할랄레엘을 낳은 뒤 팔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게난의 전 생애는 구백십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창5:9-14)

 

가이난(Cainan)이라는 이름의 뜻은 "광대한 소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주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주님의 소유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이라.(엡2:2)

 

그러나 주님은 이 땅을 통치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통치자로 군림하게 될 것이며, 주님은 그들의 왕, 즉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그 까닭에 그들은 장차 주님의 통치가 있게 될 때에 받을 상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삶을 주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노아에 대하여는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하여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를 바랐기 때문이라."(10)고 말했습니다. 또한 모세에 대하여는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26)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주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한 땅을 치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전 우주를 통치하시고 계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소유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장차 받을 상을 위해 헌신함으로 장차 받을 보상을 기대하는 일보다 나의 집과 자동차, 그 외에 나를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 각종 풍요로움이 나를 더욱 기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듭난 자들이라면 주님의 소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장차 다스리게 될 나라들을 생각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결코 순간순간들을 헛되게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할랄레헬을 통해 보는 예수 그리스도

 

마할랄레헬은 육십오 년을 살며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뒤 팔백삼십 년을 살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마할랄레엘의 전 생애는 팔백구십오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창5:15-17)

 

마할랄레헬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찬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름의 뜻이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많은 곳에서 찬양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찬양을 하시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하나님의 찬양이라는 말만을 생각하여 성경에서 그 말씀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매우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지신 분이고 그 목적하신 바를 충분히 이루시기를 원하시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드릴 수 있는 찬양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찬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피를 흘리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보고 왕좌와 짐승들과 장로들을 둘러싼 많은 천사들의 음성을 들으니 그들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더라. 그들이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서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시도다, 하더라.(계5:11,12)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늘 전체의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계획되어지고 진행되어졌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 사건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천사들의 찬양 소리가 넘쳤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셨음은 물론입니다. 이 찬양은 곧 아버지 하나님의 큰 기쁨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찬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찬양과는 격이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그분의 기쁨이 되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기쁘고 감격스러울 때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기쁨이 되어드릴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찬양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셨듯이 우리가 주님의 기쁨이 되어 드릴 때 하늘은 찬양의 소리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야렛을 통해 보는 예수 그리스도

 

야렛은 백육십이 년을 살며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뒤 팔백 년을 살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야렛의 전 생애는 구백육십이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창5:18-20)

 

야렛이라는 이름의 뜻은"내려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순종을 의미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도 죄에 대하여는 보실 수도 없는 속성을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요일5: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미 주님께서 순종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2:6-8)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기로 결심하신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수치와 모욕, 그리고 사람들에 의하여 죽으실 것을 알면서도 이 땅에 오시기로 하신 것은 실로 특별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죄 가운데 죽어져 가는 사람들을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사랑의 깊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았고 또 믿었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셋의 후손들을 통하여 증거 되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주님께서 이 땅의 왕으로 오실 것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들이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는 그들만의 왕이 아닌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일을 위하여 반드시 피를 흘리셔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많은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일이 성취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앞서 오신 것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라면 이제는 왕으로서 오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그분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권한을 이양 받아 분봉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분이 오실 때까지 간절히 소망하는 기도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22:20)

 

우리는 셋의 아들 가운데 가이난, 마할랄레헬, 야렛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인물처럼 보이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바로 죄 없으신 하나님의 모습이었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하실 어린양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더욱 주님과 더불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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