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의 죽음(창23:1-20)

조회 수 1580 추천 수 0 2010.06.06 22:24:09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던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그 안에 있던 굴과 그 밭과 사방 모든 경계에 있던 모든 나무가 헷의 자손들 앞에서 곧 그의 도시의 문에 들어온 모든 사람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니라. 이 일 후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마므레 앞 막벨라 의 밭 굴에 묻으니 마므레는 가나안 땅에 있는 헤브론이라. 그 밭과 그 안에 있는 굴을 헷의 아들들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소유 매장지로 확정하였더라.(17-20)

 

파란만장한 사라의 일생이 끝이 납니다. 그녀는 분명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의 아내로 살아가게 됨으로서 결코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만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특별하지 않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분명 특별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와 정혼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여인의 모습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모셔 들이기 전까지는 분명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고, 속성 또한 육적인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특별한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들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눈물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애곡하며 그녀로 인하여 울고 있습니다(2). 그가 과거에 이집트 왕과 아비멜렉에게 그녀를 넘겨주려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녀를 진실로 사랑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나이가 들어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녀의 죽음이 매우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감정에 대하여 말할 때 느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결혼에 대하여 생각을 할 때 느낌이 좋은 여성, 혹은 남성과 결혼을 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이 사랑이라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그녀가 아름다운 젊은 시절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버리고자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27세의 나이가 된 그녀가 죽자 울고 있습니다. 그녀가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처럼 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로 아픔을 나누고 힘겨운 과정들을 거치면서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수많은 시간들을 갈등 가운데 보내왔습니다. 주변으로부터 많은 수모를 당하기도 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들을 슬기롭게 극복했고, 그들의 상황이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내몰릴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셔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사랑의 힘보다도 위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장지를 제공하기 원하는 헷 사람들

 

아브라함은 사라를 매장하기 위한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그 땅에서 나그네로 지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을 가지지를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사라를 매장할 만한 작은 땅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에게 매장지를 조금 달라고 요구합니다. 물론 그들은 당시에 매우 강력한 민족을 형성하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거저 줄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는 땅을 거저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신실한 자들에게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제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물질뿐만이 아니라 명예와 권세도 더불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것들이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위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첫 번째는 돌을 빵에 되게 만들라는 요구였으며, 둘째로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요구였고, 셋째로는 내게 경배하면 모든 권세를 주겠다는 사탄의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그 거절의 의미는 생각보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아무런 공로 없이 그분의 사역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탄의 제의를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죽음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값을 지불해야만 완전한 소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밭 값을 지불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결국 사백 세겔이나 되는 땅 값을 지불하고 매장지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이후로는 누구도 그 땅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헷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 땅을 거저 얻게 되었다면 이후로 소유권 문제를 두고 싸움이 일어날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장래의 일들을 생각하며 그 땅을 값으로 샀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거저 얻어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누군가 갚지 않았다면 그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의 구원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됨으로 장차 천국의 상속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사실을 믿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값은 예수님께서 지불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값을 지불해 주신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 이후에 있게 될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받게 될 보상(reward)에 있어서도 이 원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의 행위에 따라 상을 주실 것입니다. 결코 그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보상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을 얻은 것만으로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보상은 구원함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선한 일을 한 것만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기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를 하고 헌금을 많이 하면 복을 받고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그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거짓이 없이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만일 무위도식하며 넉넉한 생활을 기대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도둑보다도 오히려 더 악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일을 하도록 명령을 하셨고, 또한 세상은 그것에 대하여 값을 지불할 것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원칙에 거저 주어지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만일 날 때부터 부자였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부모나 조상들의 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값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의 원칙입니다.

 

자신도 함께 묻히기를 원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아내와 더불어 묻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까지라도 아내와 더불어 있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주는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실로 놀라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아담이 그의 아내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자신에게도 권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먹게 된다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결코 먹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선악과를 먹었고, 결국에는 죄로 인하여 부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담은 남편의 속성에 대하여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더불어 죽음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진정한 남편이 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자리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죄의 자리로부터 건져주셨습니다. 장차 우리가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때에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대변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오직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만 속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주님의 죽으심은 몇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죄를 알지도, 또한 보실 수도 없으신 그분께서는 당장에라도 이 땅을 멸망시키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하여 주님의 왕국을 세우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지체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장차 신부 될 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결론

 

아브라함의 사랑의 눈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은 결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적인 매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어려움들과 고난의 시간들이 가져다 준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결코 외적인데서 오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에서 거저 받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십시오. 그렇다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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