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창21:9-21)

조회 수 1444 추천 수 0 2010.06.06 22:20:47

사라가 본즉 이집트 사람 하갈의 아들 곧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이삭을 희롱하니라. 그러므로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노예 여자와 그녀의 아들을 내쫓으소서. 이 노예 여자의 아들을 내 아들 곧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 없나이다, 하매 자기 아들로 인하여 이 일이 아브라함의 눈앞에 큰 근심거리가 되니라.(9-11)

 

아브라함의 가정에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고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과 동침을 함으로서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가정은 이미 분열의 조짐을 보였고(창16:4-6), 이제 아브라함은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하갈과 그녀가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보내는 결단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결단은 그야말로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아내의 몸종에게로부터 나온 아들이라도 한 때는 그의 상속자로 생각하였고, 또한 십여 년을 함께 동거동락 해오면서 깊은 정이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 이삭을 낳으면서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삭이 있기 전까지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가 태어났을 때 그는 새롭게 시작하기를 요구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상속을 받는가?

 

왜 아브라함은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약속의 자녀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이 새로운 상속자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육신의 생각으로 낳았던 아들 이스마엘을 그의 집으로부터 내쫓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교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역시 약속의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자아가 우리 안에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말씀이 다가왔을 때 결국 우리의 자아와의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속성들과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것들을 우리 안에서 내 몰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상속을 받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상속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요인들입니다(고전6:10).

 

이 신비는 곧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료 상속자가 되고 같은 몸에 속하게 되며 그분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라.(엡3:6)

 

우리가 상속자가 되는 것은 실로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를 상속자가 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많은 선행과 구제들을 통하여 상속을 얻어 보겠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실로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상속자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과 같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할 것이며, 넘어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약속된 자녀라야 만이 상속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노예로 표현하고 있듯이 우리가 만일 율법으로 상속이나 구원을 얻을 줄로 생각한다면 이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의 곁에 있어서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하갈과 같이 지옥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갈4:21-31). 즉 큰 아들이었던 이스마엘은 먼저 나왔지만 노예 여종이었던 하갈을 통해 태어났고, 이삭은 비록 나중에 나왔지만 자유로운 여자, 즉 약속받은 여자였던 사라를 통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하갈과 그 아들은 쫓겨났고, 사라의 아들 이삭은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선생들은 아들보다는 노예가 될 것을 강조합니다. 훌륭하게 율법과 종교를 잘 따르는 자들에게 많은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되지 아니하고는 결코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종이었던 하갈의 아들도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녀라고 모두가 같은 자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대로 난 자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 같이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가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를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때나, 바울의 때나, 지금에 이르러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사실상 지금도 바른 복음을 가진 교회들은 많은 핍박을 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거짓 선생들이 가득한 교회에서 바른 복음을 전하려 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가 가르쳐 주는 중요한 교훈중의 하나입니다.

 

역사상 막강한 종교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 단체들은 바른 성경, 바른 복음 위에 바른 믿음을 가지려 했던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들을 계속해 왔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과 같이 여겨져 왔던 칼빈이나 쯔윙글리 같은 자들도 국가 교회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많은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사형시켰던 역사적인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을 볼 때 상속을 받을 자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약속을 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삭과 같이 오히려 핍박을 당하는 자들이었고,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부끄럽거나 무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통해 어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참 자녀가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상속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복음으로 말미암은 자녀들은 남을 핍박하거나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당하고, 참아낼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노예의 자녀인지, 아니면 약속에 의해 난 자녀인지를 바로 깨달아 알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의 기도도 응답이 될까요?

 

위의 질문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기도를 할 수 있으며, 혹 알더라도 거듭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가지지 못한 자의 기도를 들어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하여 "예"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지 못한 자의 기도도 응답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음성을 들으시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그녀에게 이르시되, 하갈아, 무엇이 너를 괴롭게 하느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 아이가 있는 곳에서 그의 음성을 들으셨느니라.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리라. 하시니라.(창21:17,18)

 

이스마엘은 구원받지 못한 백성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종의 신분으로서 약속 받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을 따라 다님으로서 하나님을 알았고, 그가 아브라함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울며 기도함으로서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응답은 단순한 위로의 차원이 아닌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이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주여, 주께 간청하고 간청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으로 인하여 우리를 멸하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 주여, 주께서는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셨나이다, 하고 이처럼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니 격렬히 뛰놀던 바다가 잔잔해지매 그때에 그 사람들이 주를 심히 두려워하여 주께 희생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1:14-16)

 

불신자들의 응답가운데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 부분은 바로 요나가 탔던 배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배가 큰바람으로 인하여 거대한 폭풍이 배에 들이닥치게 되자 배에 밑창에 들어가 잠자고 있었던 요나를 깨우고 요나가 믿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욘1:6). 그리고는 이일이 요나 까닭에 벌어진 것을 안 그들은 주님께 부르짖고 요나의 말대로 그를 바다에 던지자 바다가 잔잔해 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불신자들이었던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의 기도응답에 대하여 가장 뚜렷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은 고넬료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들이 행했던 방식대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특이할만한 것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아직도 구원을 받기 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루는 아홉시쯤 되어 그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에게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보매 그가 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이르되, 주여, 무슨일이니이까? 하니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올라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었은즉(행10:3,4)

 

우리는 위와 같은 것들을 결코 신학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을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론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한 자의 기도도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주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에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며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산다면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율법에 의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직 복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여전히 율법에 머물고 있다면 이제 그것들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이 오기 전까지는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삭이 온 이후에는 결국 아브라함의 집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알고,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모셔 들이고 있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율법이 그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과거의 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통해 가르쳐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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