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싸움에서 실패하는 이유(창16:15,16)

조회 수 1570 추천 수 0 2010.06.06 22:13: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더라.(창16:15,16)

 

아브라함은 분명히 믿음의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매사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더욱 많은 부분에서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었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그 믿음의 결실을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되는 장면은 바로 사라의 여종이었던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마엘의 후손들로부터 수많은 핍박과 고난의 세월들을 보내야했으며, 오늘날까지 서로 대적하게 되는 원수가 되어있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분명히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치명적인 것이 된다면 결국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하여 오늘날의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실패하는 원인들을 살펴보고 승리하는 믿음의 생애를 살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일부일처는 하나님의 명령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착각을 일으키기 쉬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가 여러 명의 부인 부는 것을 허용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일컬어졌던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아내를 거느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솔로몬은 왕비700명과 후궁300명을 거느리기도 했습니다(왕상11:3). 이러한 까닭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약시대에는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 허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명령과 뜻은 오직 한 명의 남편과 아내만이 허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창조와 더불어 명령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신 이 말씀을 다시 가르치십니다(마19:5). 물론 이 말씀을 다시 하시는 까닭은 많은 이들이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들을 지키며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남편에 한 아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신부 된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5:31,32). 이것은 사실상 구약 시대에도 여전히 흐르고 있는 정신이었습니다.

 

그분께는 영의 여분이 있었으되 그분께서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을 따르는 씨를 구하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 영을 조심하여 결코 어려서 취한 아내를 대적하며 배신하지 말지니라.(말2:15)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녀는 오직 본래의 아내(본처)로부터 나온 자여야만 합니다. 그러한 자녀라야 만이 경건한 자녀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의 아내로부터 나오지 않은 자녀는 경건치 못한 부정한 자녀라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남편에 한 아내를 두는 정신에 대하여 결코 포기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신약 시대에도 교회에 독특한 기준을 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는 직분자는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감독(딤전3:2), 장로(딛1:6), 집사(딤전3:12)는 반드시 여러 명의 아내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기준을 세웠던 이유는 그들이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기본 원리인 한 남편에 한 아내를 두는 것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에서 성도들을 가르치거나 양육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가 아닌 다른 이방 종교를 결코 구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십 세 이하의 과부는 수에 넣지 말지니 과부는 한 남자의 아내였던 자로서(딤전5:9)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교회 안에서의 진정한 과부의 기준이 반드시 한 남편의 아내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과부는 이미 남편이 죽은 자입니다. 이 말은 그녀가 만일 남편과 사별하고 다시 결혼한 사실이 있다면 비록 지금은 홀로되었다 할지라도 진정한 과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통해서나 신약 교회들을 통해서 과부들을 구제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남편의 아내가 아닌 과부는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격에서 제외된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령하노니 명령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주시니라. 아내는 자기 남편을 떠나지 말라. 그러나 그녀가 떠나거든 결혼하지 말고 지내든지 아니면 자기 남편과 화해하라. 또한 남편도 자기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7:10,11)

 

성경에서 더욱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은 이혼에 대한 경고입니다. 바울은 혹시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자신의 말로 받아들일 것을 염려하여 이 명령이 내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명령하는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 이것은 사람을 만드시고 인류가 영원히 멸망하게 될 시점에 이르게 될 때까지 변하지 않는 주님의 생각이며,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원리를 무시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제는 절반에 가까운 부부들이 이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조차도 이들 무리에 가담하여 이혼을 정당화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그야말로 가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영적인 간음을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 남편과 아내에 관하여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내는 사라 한 명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곧 아브라함을 통해서 난 자식이라 할지라도 사라를 통하지 않은 자식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으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처럼 분명한 기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던 원인이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의 집착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에는 자식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장남으로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후손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것보다도 아브라함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식의 문제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들을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친족들을 두고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롯을 아들로 삼고자 해서 갈대아 우르에서 함께 떠나 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가져다 준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는 나중에 재산의 문제로 인하여 분쟁을 겪게 되었고, 육신적으로 보기에 좋은 것들을 모두 양보해야 했으며, 후에는 롯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의 종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가는 일들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롯을 통해 낳은 자손들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과 원수가 되어서 대적하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착은 결국 원수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종이었던 엘리에셀을 자신의 상속자, 즉 아들로 삼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를 통하여 자녀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의 집착은 결국 종을 아들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종과 아들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종을 아들로 만들고자 하여도 그는 참 아들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안의 참 자녀가 거듭나야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거듭난 사실이 없다면 그는 참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이었던 에리에셀을 아들로 삼고자 했던 것은 아브라함의 집착에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몸에서 난자라야 만이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집착은 결국 아들을 얻기 위해서 육신적인 방법을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몸에서 나온 씨면 된다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범위를 벗어나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이는 외형적으로 볼 때 충분히 상속자가 될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갈은 그의 유일한 아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그것이 약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참 자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약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육신의 방법으로 약속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자녀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계획들을 거슬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이들이 약속의 말씀들을 뒤로하고 다른 일들에 집착함으로서 그들의 믿음이 파선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질에 집착했던 가룟 유다(막14:10,11), 그리고 부자인 어떤 치리자(눅18:18-23), 능력에 집착했던 마술사 시몬(행8:18-24), 권세에 집착했던 벨릭스 총독(행24:25), 아그립바왕(행26:28), 전통에 집착했던 유대인들(요8:31,37,44,48-52) 그들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기회를 얻은 자들이었지만 결국 실패한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무엇엔가 집착하고 있다면 버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믿음을 크게 손상시킬 것입니다.

 

기다림에 지친 아브라함-성도들에게 인내가 필요함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면 기다림에 지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약속을 받은 지 10년이 지나도록 응답이 없자 자신의 방법대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결국 이일은 그의 믿음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다주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떠할까요? 인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것은 너희가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면 인내해야만 합니다. 세상은 진리대로 살기에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큰 어려움을 안겨다 줄 것이며, 혼란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진리대로 살기를 구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면서 닥치는 어려움들에 대하여 인내한다면 반드시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인내로 너희 혼을 소유하라.(눅21:19)

 

우리는 전도라는 용어를 "혼을 이겨오는 것(Soul winning)"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이 혼을 소유하는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혼의 구원(the salvation of soul)"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혼의 소유, 즉 구원받은 믿음을 잘 지켜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하니라.(히10:36)

 

주님은 어떠한 것들을 약속하셨을까요?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분류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분이 주시는 상속과 보상, 그리고 이 땅에서 누리게 될 풍성함들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인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수많은 사람들의 배경에는 언제나 인내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나니 곧 여기에 하나님의 명령들과 예수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더라.(계14:12)

 

인내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명령들과 믿음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인내가 왜 필요합니까? 그것은 환난과 핍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명령들과 믿음을 지키는 삶에는 반드시 환난과 핍박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말씀대로 살고 있다면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있는 것은 말씀을 듣고 정직하고 선한 마음속에 그것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내는 자들이니라.(눅8:15)

 

열매를 맺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인내를 해야만 합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수도 없이 많은 복음의 씨들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열매를 맺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닥치면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인내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히12:1)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내하며 살아가느냐는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느냐? 아니면 실패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경주하는 자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인내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은 인내하지 못함으로서 결국에는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인내하지 못한 결과는 그야말로 비참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공적인 생애를 살고자 한다면 인내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것은 반드시 세상에서나 다가올 세상에서 놀라운 결과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명령을 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는 아브라함

 

우리는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생각의 근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것으로 소위 하므라비 경전(Hamurabi Code)이란 것이 일찍이 발굴되었는데 거기에 보면 바벨론에 있어서는 아내 된 자가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경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얻어 자기의 자녀로 삼을 수 있다는 법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법률의 흔적이 다른 고고학적 자료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아브라함 시대의 그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된 자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하고 있는 것이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전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릴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니 너희의 생각의 영을 새롭게 하라. 또 너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니(엡4:22-24).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문화에 노출이 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공격해 옴으로서 쓰러뜨리고 곤경에 빠뜨립니다. 그 까닭에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깨어있으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벧전5:8). 우리가 육신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 보고, 말하고, 생각하는 활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곧 죄와 관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상과의 분리를 분명하게 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수많은 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요일5:4).

 

우리가 분리함에 있어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거짓 진리와 가르침"들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주님의 교회를 위협하는데 가장 중요한 도구로 이용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수많은 부분에 걸쳐 성경과 다른 것들이 가르쳐지고 행해지는 것들을 봅니다. 그들은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아무런 가책도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언제나 교회의 변질을 가져왔습니다. 그것들은 사탄이 가장 즐겨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본래부터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이러한 것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의식과 절기, 행사 등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성경과는 관계없는 것들을 교회 안으로 들이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습니다. 과연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의식과 절기들, 그리고 행사들은 성경과 일치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성경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대부분 사탄이 교회 안에 심어 놓은 작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교제하는 교회들은 어떠한 교회들입니까? 과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라면 모두가 교제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또한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다면 인정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이단이나(딛3:10), 진리에서 벗어나거나 불법을 행하는 자(딤후2:19-22)들로부터 떠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분명합니다. 먼저는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살펴보고(고후13:5), 그 후에는 우리의 주변과 교회들이 바른 믿음 위에 있는지를 살펴본 후 교제를 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분리되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 앞에서 너희 마음을 거룩함에 흠잡을 것이 없게 굳건히 세우시기를 원하노라.(살전3:13)

 

세상과의 타협은 분명히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분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게 붙들었더라면 위와 같은 결과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부디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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