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제단(창35:1-15)

조회 수 3219 추천 수 0 2010.06.06 22:47:33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시니 그때에 야곱이 자기 집안사람들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내버리고 정결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고난의 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들의 손에 있던 모든 이방 신과 자기들의 귀에 있던 귀고리를 야곱에게 주니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옆의 상수리나무 밑에 묻었더라. 그들이 이동할 때에 그들의 사방 도시들 위에 하나님의 두려움이 임하므로 그들이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못하더라.(1-5)

 

야곱은 또 다시 커다란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그가 에서와의 화해를 통하여 순탄한 생애를 살 것이라고 생각을 해왔지만 그의 외동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함으로서 그의 가족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의 족속가운데 남자들을 모두 죽임으로서 주변의 다른 족속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수가 많지 않았던 야곱의 가족들로서는 커다란 위협을 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일로 인하여 깊은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심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언제나 먼저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에서로부터 떠날 때에도 그러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 올 때에도 그러했으며, 지금 위기의 상황에서 절망하고 있는 상태의 야곱을 만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외에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평범한 생애를 보내고 있었던 아브라함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를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던 모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린 양치기였던 다윗을 왕을 세우시기 위해서 그를 불러 기름을 붓도록 하셨으며, 어린 나실인으로 드려졌던 어린 사무엘을 만나주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고기를 잡고 있었던 베드로를 주님이 먼저 부르셨고, 그물을 깁고 있었던 요한을 먼저 부르셨고, 세리의 일을 하고 있었던 마태를 친히 부르셨으며,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분주하게 다니던 사울(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주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와 복음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행을 통하여 그들의 의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주셔서 행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의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가 바로 주님께서 주신 성령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절망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물론 야곱은 절망의 상황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이러한 고통 중에 언제나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마치 아버지가 평상시에는 자녀들이 마음껏 뛰어 놀고, 사소한 문제에는 관여를 하지 않다가도 커다란 문제를 만났을 때 해결해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야곱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에도 부끄러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자 친히 그를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순간순간 문제를 당할 때마다 만나주실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도 우리가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녀만이 가질 수 있는 매우 큰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1)

 

주님께서 야곱을 만난 이후에 가장 먼저 내려졌던 명령은 그가 가장 먼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바로 그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 하필 가장 먼저 만났던 곳을 가도록 말씀하셨을까? 우리는 이에 대하여 많은 이유들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바로 처음 사랑을 기억하도록 함으로서 그 일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에서로부터 도망을 나와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그네가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제는 한 민족의 족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알도록 하셨고, 여전히 그를 지켜주시겠다는 의지를 야곱에게 보여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림으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로서는 매우 치명적인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역시 주님은 문제의 해답을 제시해 주고 게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조금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하라.(계2:4,5)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의 해답이 무엇입니까? 바로 처음 행위를 갖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를 기억해야만 했고, 또한 그들의 행동을 돌이켜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러한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등잔대를 옮기는 정입니다. 등잔대는 바로 교회(계1:20)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교회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교회 처음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질된 상태를 지속한다면 그들의 교회를 옮기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까? 그들은 대부분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웠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교회는 점점 성장을 거듭해 갔을 것이고 수백, 수천수만, 심지어 수십만의 성도들이 운집하는 교회로 성장을 거듭해 갔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진정한 주님의 교회를 얼마나 볼 수 있을까요? 그들의 교회는 이미 사유 재산으로 분류된 지 오래된 일이고, 교회 안에 정치가 난무하고,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이 그들의 교회의 재산을 늘리고, 숫자를 채우기에 급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처음이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변해갔고,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의 교회라고 불릴 수 없을 만큼 변해져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회복은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처음 하나님을 만난 장소인 벧엘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바로 오늘날 변질되어진 교회를 향해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일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곳은 더 이상 주님의 교회라고 불려 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순종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고난의 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두드러진 것은 바로 즉각적인 순종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도 그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본이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순종의 행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체하지 않습니다. 그는 즉시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로 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무작정 이일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벧엘로 향하기 전에 자기 집안 족속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들에게 세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하고 있습니다.

 

1.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내어버리라

아마도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 가운데 이방신들의 잔재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로 라헬이 자기 아버지의 형상을 훔쳐 달아났다는 사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창31:19). 아마도 그들은 그 때까지도 형상들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곱은 지금 그들에게 모든 이방 신들의 잔재들을 버릴 것을 명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현재 당하고 있는 위기의 극복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로 내려진 결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들은 어떠할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의 교회가 매우 심각한 위기의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면 바로 야곱의 결단을 통하여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이방신들을 섬기거나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회 안에는 수많은 이방 신들의 잔재들이 심각할 정도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알의 생일이 예수님의 생일로 둔갑한 성탄절, 이스터 여신의 축제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둔갑해버린 부활절,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세우는 종교의 탑이 교회로 들어와 종탑으로 둔갑해 버린 일, 아직도 교회당 건물을 성전으로 여기고 가르치는 사람들, 십자가를 비롯한 각종 형상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교회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며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야곱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와 가의 가족들은 여전히 이방 신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버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중요한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역시 처음 사람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 신들의 잔재들을 모두 버리는 데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고집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힘겨운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결실을 기억하십시오.

 

2. 정결하게 하라

그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두 번째 자세로 정결하게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단장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은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그들의 마음 자세를 깨끗하게 단장할 것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변하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정결의 의미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가 있어야 합니다. 깨끗한 물을 담기 위해서는 빈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 앞에 정결한 마음, 즉 빈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세상의 생각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면 그는 주님의 주시는 복을 충분히 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죄와 싸워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변화된 삶을 원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들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고 그 안에서 자라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기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만 자신을 채워가야만 합니다.

 

3. 옷을 갈아 입으라

마음의 변화만 있고 행동의 변화가 없다면 그것을 누가 믿어줄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사람은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옷은 여러 가지의 의미로 설명되어지지만 일반적으로 성도들의 행실로 비유되는 것입니다(계19:8). 야곱의 명령은 바로 그가 벧엘로 향하는데 있어서 자세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데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새로운 자세로 주님 앞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심이 대부분 마음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도 보게 됩니다. 또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고자 힘쓰는 모습들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실을 맺지 못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대부분 행동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의 문제를 핑계 삼고 마지막 결단을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 행위가 변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비록 구원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복을 얻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얻은 것

 

야곱은 그의 집안 족속과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로부터 얻은 모든 이방 신과 자기 귀고리를 세겜 옆 상수리나무 밑에 묻습니다. 그리고는 벧엘을 향해 떠나갑니다. 그는 벨엘로 향하는 모든 길에서 다른 족속들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동할 때에 오히려 주변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 두려움이 임하고 결국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순종하는 길을 가는데 있어서 철저히 그들을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들이 순종의 길을 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순종의 길을 가고자 했을 때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미 많은 말씀들을 통해서 주시고 계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 있다는 그것은 야곱이 아직 주님의 명령을 듣기 이전의 상태에서 고민을 하고 있듯이, 아직 주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전의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고자 한다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보호하시고, 주님의 날까지 안전하게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야곱은 이 후로 그의 조부였던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약속해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다시 받게 됩니다(11,12). 그리고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됨을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10). 그것은 야곱에게 보다 큰 확신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는 이후로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살아간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순종은 결국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다 능력 있는 생애를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바로 야곱의 생애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활한 자일 것이라고 오해받고 있는 자였지만 오히려 그는 절대적으로 순종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생애를 살면서 주님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얻고자 한다면 순종의 생애를 살기 위해서 힘쓰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더욱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현대의 위대한 전도자들에게도 이러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무디, 스펄전, 웨슬레, 피니, 뮬러....등 그들의 생애 뒤에는 절대적인 순종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 우리 가운데 위대한 생애를 경험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면 야곱의 생애를 기억해 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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