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의 후손들 (창세기4:25-26)

조회 수 1996 추천 수 0 2010.06.06 21:58:20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세기4:25-26)

 

우리는 이미 구약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고 배운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족보만을 기록한 듯한 창세기 5장의 기록에서는 예수님의 어떠한 속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 5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흥미 있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인물들을 소개하자면 이브가 고백했던 아벨 대신에 주어진 아들이었던 셋, 그리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림을 받은 에녹,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었던 므두셀라, 거기에 한 사람정도 더 속할 수 있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던 시절의 에노스 정도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것은 이 족보는 결코 단순한 혈통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놓치게 된다면 가장 중요한 내용을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 혈통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셨을까요?

 

셋을 통해 보는 예수 그리스도

 

""이라는 이름의 뜻은 "지명된""대신 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셋에 대한 내용은 아담의 제3자로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아벨 대신으로 출생하여 아담의 장자의 직분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시조가 되었고 그 자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였다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4:25, 5:6,7, 3:38). 그러나 그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셋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지명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벧전2:4)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해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아해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예수님으로 해석하려는 많은 성경학자들에게는 이 구절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죄로 인한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었습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2:7)

 

셋의 속성은 바로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할 누군가를 준비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없어야만 했으며, 또한 사람의 몸을 입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일에 적격자로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 결정은 이미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계획되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셋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앞서 아벨이 오직 죄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었다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셋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그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대하여 설명하시고자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미 준비되어진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았던 자들은 장차 이 땅에 오실 그분을 믿고 그 믿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

 

어떤 이들은 위의 성경 구절을 가지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헌금하고, 믿음으로 병을 고치고,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경 구절이 결코 그런 종류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후의 구절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것은 아벨 대신에 주신 아들 셋으로부터 예언되어진 것을 그들이 믿었으며, 그 믿음의 행위를 보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은 바로 이미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노스를 통해 보는 예수 그리스도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에노스가 태어난 때로부터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일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아직도 많은 이단 종파에서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한 분께서 이처럼 악한 죄인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모습입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2,3)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피에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죄는 여전히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명시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

 

피를 흘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를 입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영과 혼을 피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를 흘리기 위해서는 희생을 당해야만 합니다. 사람의 몸 안에 있는 피를 모두 흘리게 된다면 반드시 육체의 죽음을 경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피를 흘리기 위해서는 살이 찢기는 일이 있어야만 합니다. 살이 찢기지 않고는 결코 모든 피를 흘릴 수가 없습니다. 또한 모든 피가 쏟아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장에 구멍이 뚫려야 합니다. 그것은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죽음의 모습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모습들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채찍과 가시와 돌에 맞으심으로 살이 찢기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창에 옆구리를 찔리심으로 마지막 한 방울의 피마저도 남기시지 않고 모두 흘리셨습니다. 그분은 육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사람들의 죄를 위해 희생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바로 이일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다고 수차례에 걸쳐서 증거하셨습니다. 마귀는 이일에 대하여 방해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여러 가지 기적을 보이도록 요구함으로 보다 쉽게 사역을 하시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는 모든 권세마저도 예수님께 주겠다는 타협을 하면서까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죄 사함을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 달리셔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순히 희생하라는 교훈쯤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 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에 대한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구원 얻을 사람들이 있어질 것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오셔야만 가능한 것이었고, 예수님은 그 일들을 완수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이 단순히 역사적인 기록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위의 두 사람을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이미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셨던 분이시며, 또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신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계기를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앞서 셋의 후손들이 단순히 족보를 기록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즉 그들의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속성들을 믿었다고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셋은 이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에노스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뒤를 잇는 후손들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들을 가지고 있을까요?

 

가이난을 통해 보는 예수 그리스도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5:9-14)

 

가이난(Cainan)이라는 이름의 뜻은 "광대한 소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주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주님의 소유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그러나 주님은 이 땅을 통치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통치자로 군림하게 될 것이며, 주님은 그들의 왕, 즉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그 까닭에 그들은 장차 주님의 통치가 있게 될 때에 받을 상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삶을 주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노아에 대하여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11:7)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하여는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1:10)고 말했습니다. 또한 모세에 대하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주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한 땅을 치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전 우주를 통치하시고 계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소유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장차 받을 상을 위해 헌신함으로 장차 받을 보상을 기대하는 일보다 나의 집과 자동차, 그 외에 나를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 각종 풍요로움이 나를 더욱 기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듭난 자들이라면 주님의 소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장차 다스리게 될 나라들을 생각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결코 순간순간들을 헛되게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할랄레헬을 통해 보는 예수 그리스도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5:15-17)

 

마할랄레헬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찬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름의 뜻이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많은 곳에서 찬양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찬양을 하시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하나님의 찬양이라는 말만을 생각하여 성경에서 그 말씀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매우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지신 분이고 그 목적하신 바를 충분히 이루시기를 원하시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드릴 수 있는 찬양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찬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피를 흘리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5:11,12)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늘 전체의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계획되어지고 진행되어졌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 사건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천사들의 찬양 소리가 넘쳤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셨음은 물론입니다. 이 찬양은 곧 아버지 하나님의 큰 기쁨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찬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찬양과는 격이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그분의 기쁨이 되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기쁘고 감격스러울 때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기쁨이 되어드릴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찬양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셨듯이 우리가 주님의 기쁨이 되어 드릴 때 하늘은 찬양의 소리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야렛을 통해 보는 예수 그리스도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5:18-20)

 

야렛이라는 이름의 뜻은"내려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순종을 의미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도 죄에 대하여는 보실 수도 없는 속성을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요일5: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미 주님께서 순종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기로 결심하신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수치와 모욕, 그리고 사람들에 의하여 죽으실 것을 알면서도 이 땅에 오시기로 하신 것은 실로 특별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죄 가운데 죽어져 가는 사람들을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사랑의 깊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셋의 후손들을 통하여 증거 되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주님께서 이 땅의 왕으로 오실 것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들이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는 그들만의 왕이 아닌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일을 위하여 반드시 피를 흘리셔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많은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일이 성취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앞서 오신 것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라면 이제는 왕으로서 오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그분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권한을 이양 받아 분봉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분이 오실 때까지 간절히 소망하는 기도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

 

우리는 셋의 아들 가운데 가이난, 마할랄레헬, 야렛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인물처럼 보이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바로 죄 없으신 하나님의 모습이었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하실 어린양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더욱 주님과 더불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는 앞서 셋의 자손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됨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단순한 자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결코 소홀히 대해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족보에 거론이 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약속되어진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증거 해 주는 중요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과연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어떠한 분임을 보여주고 계실까요?

 

에녹을 통해 보는 그리스도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은 "바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 가운데 사는 자들을 위하여 바쳐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헌물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위해 드려졌던 짐승들을 대신하여 드려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에녹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짐승을 대신하여 희생 헌물이 되시지 않는다면 사망을 면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또한 그분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러한 믿음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5:24).

 

우리가 에녹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은 바로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이러한 삶의 모습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들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1:66)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8:29)

 

그분은 하나님과 한 시라도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사셨습니다. 에녹이 그의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듯이 예수님께서도 동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동행하는 삶을 사실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실까요? 그것은 바로 "항상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동행하실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비결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와 헌신 , 봉사, 물질 등으로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비결을 찾아낸다면 잃은 양의 모습을 통하여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18:12,13)

 

우리가 세상에서 잃어진 혼을 찾아 주님의 품에 안겨드리게 된다면 주님은 그 일로 인하여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언제나 동행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녹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욱 행복한 삶을 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에녹이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11:5)

 

그는 분명히 예수님의 속성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은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그는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곧 산 채로 들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께서 산 채로 들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녹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부활해서 산 채로 들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1:9)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올라 가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에녹을 통하여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하게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빈틈이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이일은 장차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도 있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부활과 같이 우리도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장차 썩어질 이 추악한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운 것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할 것이며, 또한 영광의 날들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보다 큰 소망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므두셀라를 통해 보는 그리스도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창던지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성경에서 가장 장수한 자라는 점을 들어서 매우 좋은 의미의 이름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를 통하여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판하시는 예수님이라뇨? 어떻게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심판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1,12)

 

장차 다가올 주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상의 자리가 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미뤄지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일단 대기하는 장소에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그들은 연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대기 장소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동정이나 양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선한 행위를 하면 반드시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명예와 권세를 가진 자들에게조차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이르는 조건은 결코 세상에서의 선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느냐? 아니면 죄인의 상태로 남아 있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면 그의 행위는 불로 태움을 받아서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라멕을 통해 보는 그리스도

 

라멕이라는 이름의 뜻은 "능력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주님께서 결국 승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노아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그는 아들을 낳고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5:28,29)

 

결국 노아 시대에 홍수가 있음으로서 라멕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이름이 말하고 있듯이 주님은 능력이 있는 분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살고 있었던 시기는 그야말로 타락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다음 세대였던 노아의 시대에 완전히 멸망을 당했을 정도로 죄악이 관영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반드시 주님께서 승리하실 것을 믿었던 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승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탄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에 우리는 수고를 해야 하고, 때로는 곤경가운데 처하기도 하며,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핍박가운데서 그들의 목숨이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힘든 삶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는 결국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은 이 세상의 권세를 몰아내고 통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나라가 세워지게 된다면 우리 가운데 충성스러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왕관이 주어지게 될 것이며, 그들은 주님의 나라에서 통치하는 권세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매우 절망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결코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소망스럽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장차 다가올 세상에서의 소망을 바라고 헌신적인 생애를 살게 된다면 현 세대에서도 그만한 보상을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18:29,30)

 

주님은 막연하게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생애를 사는 동안 그에 못지않은 보상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기뻐해야 할 일들은 이 세상에서 받는 보상이 아니라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보상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나라를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장차 다가 올 나라를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생애는 더욱 소망스러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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