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순종할 것인가?(창22:1-14)

조회 수 1648 추천 수 0 2010.06.06 22:23:01

이 일들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더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1,2)

 

지금 소개되고 있는 이 내용은 아브라함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도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 자신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그와의 약속에 대한 무효선언을 통보 받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그가 100세나 되어 얻은 아들입니다. 그의 아내는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었고, 그 자신조차도 희망이 없었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그야말로 귀하고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희생 헌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그는 이제 아들을 잃고 또 다시 후손 없는 신세가 될 것이며, 그의 가진 재산도, 지금까지 쌓아 온 명예와 권세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버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의 때는 예고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그 일로 인하여 큰 근심을 가지고 결단하여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었습니다(창21:11). 그러나 아브라함은 또 다시 힘겨운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모든 시험이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는 다시 그러한 시험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한 시험이 그에게 닥쳐 온 것입니다. 그는 지금 절망적인 상황으로 가는 순종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고한 적도 없는 갑작스러운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순종에 대한 시험!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순종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때로 그들의 삶에 있어서 절망적인 상황으로 갈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많은 갈등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또한 고통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위한 많은 이익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포기를 선언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언제 들이닥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고 있었던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지금 그의 지금까지의 삶을 기꺼이 포기한 것입니다. 그물을 깁고 있는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도 역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로서의 삶은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전부였지만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리였던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즉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는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직업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많은 학식과 재능과 명예를 얻었던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주님의 명령에 바울은 즉시 그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주님을 위해, 그리고 복음 전도자로서 그의 생애를 보냈습니다.

 

이미 나이 많아 늙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세는 그가 이집트를 피해 달아났던 새로운 터전을 버리고 이집트로 향했습니다. 미디안의 속박 가운데서 건져내시기 위해 기드온을 불렀을 때, 그도 역시 모든 열악한 환경들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 외에도 너무도 많은 곳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과 순종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에게 주님의 명령이 주어질 것에 대하여 기대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순종은 곧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순종을 시험할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어떠한 자세로 주님을 따르시겠습니까?

 

때로는 불가능한 상황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시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을 요구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이"라는 말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이 말은 "lad"라는 단어로 연령과는 관계없이 남자를 일컫는 말로 쓰여 진 단어로서 실제로는 이삭이 이미 청년이 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이 많은 청년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사흘 길을 걸어 간 이후에 번제 헌물을 직접 지고 간 사실을 보면 결코 어린 아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6).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헌물로 드릴 것을 요구받고 있었던 시기는 이삭이 이마 장성한 상태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성장한 아들 이삭을 희생 헌물로 드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아들의 반항으로 인하여 희생 헌물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충분히 모든 상황들을 생각할 수 있는 장성한 아들을 희생 헌물로 드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후손도 없는 그가 죽고 나면 아브라함의 인생은 더욱 비참해 질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순종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순종에 대한 요구는 결코 환경이 좋을 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도 순종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 중에도 물질적인 순종이 요구될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를 대접했던 사르밧 과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가난 중에 빵 한 조각을 요구받았고,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웅큼과 기름 조금으로 엘리야를 대접했습니다(왕상17:8-16). 병든 상황에서도 육체적인 헌신이 요구될 수도 있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서 병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순종에 대한 요구는 어느 때입니까? 그것은 환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게 대하여 순종하기를 요구할 때 우리는 즉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종의 과정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또한 그의 천사들이 도울 것입니다. 때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믿음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참 된 순종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님의 특별한 소명이 주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갈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근심을 하고 결국에는 돌아갔습니다. 순종하기를 꺼려하는 자는 틀림없이 고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결코 지체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난 이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일은 결코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더 늦추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뒤로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일찍부터 준비하고 출발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계산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계산적이지도 못하고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직업을 버리고 무작정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가 합리적인 것입니까? 자신의 지식과 명예, 권세 모두를 배설물로 여기는 바울이 합리적인 인물입니까? 자신이 돌에 맞아 죽을 줄을 알면서도 설교하고 있는 스데반이 합리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하고 있었던 것은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을 따르고자 하는 순종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길거리에서 전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이 합리적이어서 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견디기 힘든 상황을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그 일들을 기꺼이 할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육신적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환경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며, 또한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아침부터 일찍 아들을 죽이기 위해 준비하고 출발했던 이유입니다.

 

침묵 가운데 순종하는 것

 

아브라함과 이삭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아들아 번제 헌물의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 이 대화가 그들이 나누고 있는 유일한 내용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 처참한 상황에서 농담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위로하기 위해서 수다를 늘어놓겠습니까? 이 상황은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심각한 표정 속에서 이삭이 느끼는 불안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모리아 땅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며 순종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리아 땅에 이르러 순종을 결행하기까지 주님도 어떠한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고 계십니다. 다만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주님 앞에 순종할 때에 침묵 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비장함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경은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그가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양같이, 끌려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사53: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향하시는 모습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땅으로 가는 모습과도 너무 흡사한 모습입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의 고지를 향해 가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시험 중에 순종을 요구받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그는 반드시 침묵의 시간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그 답을 제시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직접 해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성도들이 겪어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를 했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닭울음소리 이후로 회개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를 포함한 120명의 제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경계하는 시선들만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아무 것에도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침묵할 따름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하셨던 약속의 말씀을 두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공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서로를 위해 봉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침묵의 상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침묵의 시간들은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큰일들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들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또 다른 형태가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위대한 사역을 위한 준비의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의 바라보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순종의 길을 여전히 걸어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순종의 실행

 

가지런히 나무를 놓고 그 위에 자기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재단의 나무 위에 놓고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의 모습! 상상이 가십니까? 그는 지금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들이 반항을 하거나 도망을 하는 모습 없이 아버지의 그러한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지금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생각만으로 이러한 엄청난 일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그는 이 시대의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미친 사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결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이한 행동들은 아브라함뿐만이 아닙니다. 120년간 배를 만들었던 노아는 어떻습니까? 10만 명이 넘는 군대를 300명으로 대적하고자 했던 기드온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분명히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도 이해되지 않았던 행동들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그가 이삭을 죽이고 싶어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보이는 믿음의 실행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행동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기이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식의 기준에 맞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덕을 세워야 한다는 말로서 세상의 기준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을 세울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변질을 가져왔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들을 가져왔습니다. 성경의 기준이 결코 세상 사람들이 제시하는 기준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에 걸쳐서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부분에 걸쳐서 분리된 삶을 살도록 요구합니다.

 

진정 순종하는 생애를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직 성경 안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지를 바라보십시오. 그렇다면 반드시 그 안에서 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욕적인 상황이나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장차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자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가져다 준 것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은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하셨고, 그들을 위하여 숫양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희생 제물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기꺼이 순종함으로서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결코 순간적으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시간과 실패 속에서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리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종의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은 믿음의 자녀들을 두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순종은 비록 힘겹고 어려운 순간들을 만날 수 있겠지만 반드시 놀라운 결과들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으로 더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받지 못한 것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더욱 행복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더욱 놀라운 보상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생애를 사십시오. 그것은 그야말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실 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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