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믿음의 사람(창14:17-20)

조회 수 1797 추천 수 0 2010.06.06 22:10:34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또 그와 함께한 왕들을 살육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에 나와 그를 맞이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즙을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을 축복하여 이르되, 하늘과 땅의 소유주 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네 원수들을 네 손에 넘겨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하매 아브람이 모든 것의 시분의 일을 그에게 주니라.(창14:17-20)

 

우리는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가? 물론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봐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롬4:16). 그러나 그의 삶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믿음의 조상으로 불려 지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불신과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그 믿음을 인정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아브람은 여전히 롯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재산들 나누어 가지고 비옥한 땅 소돔으로 향했던 롯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롯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가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롯을 자식과 같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롯에게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주변 상황은 그야말로 혼란함 그 자체였습니다. 계속해서 전쟁과 약탈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시 아브라함의 롯을 향한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롯이 살던 소돔에는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연합군을 형성하여 전쟁을 치루고 있었는데, 롯이 살던 소돔은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벨라와 연합하여 싸우고 있었고, 상대는 당시 가장 강력한 민족의 연합을 형성하고 있었던 엘람왕 그돌라오멜, 민족들의 왕 디달, 시날왕 아므라벨, 엘라살왕 아라옥이었습니다. 결국 막강한 연합군에 의하여 소돔과 고모라는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겼고, 롯도 역시 모두 빼앗기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창14:1-12).

 

그곳에서 도망하여 온 사람에 의해 소돔과 롯의 상황을 전해들은 아브라함은 결국 자기 집에서 태어나 훈련받은 종 318명을 무장시켜 밤에 직접 자기와 자기 종들을 나누어 그들을 치고 모든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여인들과 백성들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두 가지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람이 자기 형제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듣고"(14) 이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이 말이 다른 이들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들을 구해내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사회 구원을 외치는 자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싸움이 이 땅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엡6:12)

 

그렇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인가요? 그것은 우리의 형제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형제에 대하여 영적 전쟁을 대신 치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희생이 따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대신 싸워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복음적인 교회에서는 신앙적으로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서로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신앙은 존중이 되어야 하겠지만 서로 관심을 가지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공동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믿음의 사람이라면 형제의 곤경에 대하여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여 하루 속히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어야만 합니다.

 

둘째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분명히 그와 동맹한 아모리 족속이었던 마므레와 동맹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에서 태어나 훈련을 받은 종 318명을 무장시켜" 전쟁에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에는 수가 많은 수록 유리합니다. 더구나 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그들과 연합으로 전쟁에 나가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집에서 태어나 훈련을 받은 소수의 종들만을 데리고 전쟁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비결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 교회들이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숫자를 늘리고, 이웃의 교회나 교단이 연합하고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결정이 반드시 이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안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숫자나 세상의 능력을 가지고 그들을 평가하신 적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구원받을 자들은 매우 적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마7:14).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영적 전쟁을 치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결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리라는 말과도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치루는 자가 여전히 세상과 짝하고 있다면 그는 결코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다른 이들을 위해서 싸우게 될 때에도 올바른 싸움의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깊은 수렁으로 인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앞에 일군으로 부름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거룩한 삶을 사십시오. 또한 만일 어떤 중요한 영적 전쟁을 위해서 동역자를 필요로 한다면 그가 과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지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그것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확인이 되어야 할 중요한 결정입니다.

 

멜기세덱

 

그는 성경에서도 가장 신비스러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가 더욱 주목을 받는 이유는 신약성경에서도 여전히 그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렘 왕이요, 전쟁에 승리한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즙을 가져온 자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한 자이며, 아브라함으로부터 십분의 일을 건네받은 자였습니다.

 

다윗의 시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시110:4)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히브리서에서는 더욱 많은 부분에 걸쳐서 멜기세덱-레위사람-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히5:6-10; 7:1-28). 성경은 그에 대하여 더욱 소상히 설명하기를 "그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또한 살렘 왕이니 곧 화평의 왕이라.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혈통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오직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어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7: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쉽게 설명하면 멜기세덱이 모든 제사장의 조상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서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성경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사장의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때 고개를 가로 지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레위인들이 제사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유다지파에서 나온 예수님이 어떻게 제사장이 되실 수 있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중보하시는 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증거 하는 분이 바로 멜기세덱인 것입니다. 그는 영원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을 비롯한 레위자손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죽었습니다(히7:23). 그러나 지금도 죽지 않으시고 영원히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다(히7:25).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멜기세덱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 대제사장임을 증거 하는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라는 말만 나오면 귀를 막으려 합니다. 그 이유는 십일조가 교회 안에서 율법적으로 가르쳐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더욱 많은 사람들은 사실상 물질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무척이나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들은 그것이 율법과 함께 폐지되었다고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하지 말도록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건이 모세를 통하여 율법이 선포되어지기 이전의 사건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 이외에도 율법 이전에 십분의 일을 드린 일들이 있었음을 야곱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되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더라.(창28:22)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야곱은 자신의 믿음과 관계없이 순간적인 감정에 의하여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일까요?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드리기 전에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었고 즉시 십분의 일을 드린 상황으로 봐서 그가 감사함으로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후에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약속했던 믿음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율법에 의해서 강제적인 조항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우리는 율법시대를 사는 자들도 결코 그것을 의무적으로만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감사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몇 사람을 임명하여 재물과 헌물과 첫 열매와 십일조를 둘 방들을 관리하게 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위해 율법이 정해 준 몫을 도시들의 밭에서 거두어 그 방들에 두게 하였으니 이는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인하여 유다가 기뻐하였기 때문이더라.(느12:44)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너희가 십일조와 헌물에서 강도질하였느니라.(말3:8)

 

위의 두 성경 구절을 비교해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율법시대에도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한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분이 제게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합니까? 물어왔습니다. 저는 하지 마십시오 라고 답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기를 "율법의 십일조는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이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며,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라면 당신의 가진 것들을 모두 드리십시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진 것 모두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 너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에게 속해있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과 명예와 권세와 지식과 같은 것들도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위임받아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마다 그것을 소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벧전4:10).

 

아직도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논하고 있다면 저는 감히 초보신앙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구약시대를 사는 자들이 자신의 소유와 삶이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하나의 행위로 보였지만 이제는 그들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5:20). 아직도 십일조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을 위임받아 물질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나중에 회계하실 때에 반드시 묻고 그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마18:23).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내가 하늘과 땅의 소유주 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곧 주께 내 손을 드노니 네가 이르기를, 내가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었다, 할까 염려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오라기 하나나 신발 끈 하나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14:22,23)

 

아브라함의 결단을 보십시오. 그는 지금 부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주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생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과 주시는 복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다고 간증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적당한 타협을 시도합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주님이 주시는 복을 구하기보다는 세상이 주는 혜택과 풍요를 누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일하지 않고도 넉넉한 삶을 살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많은 재물과 권세를 얻은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혼돈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동기는 순수하지 않지만 많은 물질을 주님을 위해서 쓴 자와 순수하게 살아가지만 주님을 위해서 별로 쓴 것이 없는 사람 중 장차 올 세상에서 누가 더 많은 보상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주님은 불의한 재물에 대하여는 전혀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비록 천문학 적인 돈을 가지고 와서 헌금을 한다고 할지라도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었다면 전혀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십시오. 그들이 비록 많은 재물을 드렸지만 그들은 성령을 속인 대가로 죽음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자가 형제와 대적한 일이 있거든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제단에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3,24). 부당한 방법으로 얻어진 소득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한 가지 명심해 두어야 하는 것은 소득을 얻는 것도 순수한 방법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는 소돔 왕이 제시한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가 돌아갈 때에 사람들은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는 멸망당할 소돔에서 나오는 불의한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부당한 것이라면 당장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장차 우리에게 주실 복들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결코 놓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시행착오를 통한 믿음의 성숙

 

그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겪어 왔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향할 때에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을 데려감으로서 처음에 하나님께서 친척과 아버지 집으로부터 떠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였고, 결국 이일로 인하여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기 전까지는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했고, 조카 롯으로 인하여 재산이 나누어지고 눈에 보기 좋은 땅들을 모두 잃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기근이 있어서 그 자리를 떠남으로 해서 자신의 목숨의 위험과 아내를 잃을 뻔한 과정을 겪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극적으로 살아 나왔고, 많은 재산까지도 얻게 되는 복을 누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욕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바라고 나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아브라함의 작은 실수들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통하여 성숙해져 가는 모습들을 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함을 통해서 회개함으로 더욱 성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함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으며, 또한 사역의 과정에서 마가와 결별하면서 일꾼의 소중함을 더욱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실수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더욱 믿음을 성숙시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당신은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히 더욱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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