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선택(창13:5-13)

조회 수 1784 추천 수 0 2010.06.06 22:09:40

아브람과 함께 간 롯에게도 양떼와 소떼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함께 거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그들이 함께 거할 수 없었더라.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또 그때에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도 그 땅에 거하였더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형제라. 원하노니 나와 너 사이에, 내 목자들과 네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원하노니 너는 내게서 갈라서라. 네가 왼쪽을 취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떠나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평야를 바라본즉 그것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이나 물을 넉넉하며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주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 같았더라. 이에 롯이 자기를 위해 요르단의 온 평야를 택하고 동쪽으로 옮겨가므로 그들이 서로 갈라서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고 롯은 그 평야의 도시들에 거하며 소돔을 향해 장막을 쳤더라.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사악하여 주 앞에 극심한 죄인들이었더라.(창13:5-13)

 

 

아브람과 롯과의 관계는 특별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실제로 롯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없이 자란 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하란은 롯의 할아버지였던 데라보다도 먼저 죽었기 때문에 아마도 롯이 어릴 적에 돌아가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창11:28). 그 까닭에 아브람은 롯의 큰아버지로서 롯의 아버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롯을 데려간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척들조차도 데려가지 않을 것을 명령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롯을 데려간 것은 그의 이러한 환경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롯을 아들같이, 롯은 아브람을 아버지 같이 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동반자였습니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다는 점은 롯이 아브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가 롯과의 관계에 그토록 연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다툼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 땅이 그들이 함께 거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그들이 함께 거할 수 없었더라.(6)

 

아브람과 롯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바로 물질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분명히 기근으로 인하여 이집트로 가야하는 처지에 있는 자였지만 그가 이집트로부터 올라 올 때에는 가축과 금과 은이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가난한 세월을 살아왔던 그들이 물질의 소유로 인하여 더욱 친밀해지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갈등을 낳고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실제로 이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육신의 복들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돈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지게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육신의 지배를 받아 사는 배경에는 언제나 돈이 개입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생활은 서로를 위로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물질의 풍요는 결코 다른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 놓으며, 서로 협력할 마음들을 빼앗아 갑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흔히 발견되어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대부분 어려운 사역을 할 때에 대부분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회가 성장이 되어지고 규모를 더해갈수록 더욱 건강하고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타협 속에서 교회 내에 파당을 만들어 가고 심지어 분열이 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결국 자신의 처지에 대한 만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의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물질은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질에 대한 분명한 자세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바로 청지기적 자세입니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이 가진 소유와 재산들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대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모습들을 보여줍니다(행2:45).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물질의 소유가 주님에게 있다고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최소한 물질에 대하여 욕심을 버린 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물질은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그것은 때로 예수님보다도 더욱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들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물질의 소유를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은 물질이 결코 그리스도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분열과 다툼을 가져다 줄 것이며,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놓을 뿐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롯과의 결별

 

결국 아브라함은 그의 많은 소유로 인하여 롯과 결별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만일 지금까지의 정을 생각해서 적당한 타협을 시도하게 된다면 장차 더욱 큰 문제가 발생이 될 것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분리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받아들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딸이 되리라. 전능자 주가 말하노라, 하셨느니라.(고후6:17,18)

 

주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인도하심에 있어서도 분명한 분리함에 대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신 것도 분명한 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목적을 두고 명령하신 것이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 땅을 나오게 하신 것도 분명한 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올바른 분별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분리를 한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고립되려는 그리스도인들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분리됨이 결코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두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결코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마5:13-16).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또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녀의 죄들이 하늘에까지 닿았고 하나님께서 그녀의 불법들을 기억하셨느니라.(계18:4,5)

 

어떤 분이 저에게 물어왔습니다. 어떻게 다른 모든 기독교회들은 가톨릭에 대하여 호의적인데 왜 침례교도(Baptist)들은 그토록 경계를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가톨릭에 대하여 재앙을 받아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계18:1-24). 바로 그들이 바빌론이며, 마귀들의 거처요, 온갖 더러운 영의 거처가 되고 부정하고 가증한 새들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에 대하여 음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계17:1-18).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회가 그들에게서부터 분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 절기와 의식들, 그리고 비성경적인 대부분의 모양들이 바로 그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기독교회는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고는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톨릭의 유산들을 그대로 닮아가도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아니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교리마저 버리고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구원"이라는 가톨릭의 교리를 받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제 가증한 무리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죄로부터의 완전한 분리, 그리고 배도한 무리들로부터의 완전한 분리야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일에 지체하게 된다면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은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완전한 분리!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추구해 가야할 문제임을 기억하십시오.

 

롯의 선택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원하노니 너는 내게서 갈라서라. 네가 왼쪽을 취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떠나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평야를 바라본즉 그것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이나 물을 넉넉하며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주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 같았더라.(창13:9,10)

 

이제 아브라함과 롯은 갈라서야 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땅은 그들의 소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많은 전쟁을 통하여 그들이 차지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앞으로 주님께서 주실 땅을 소망 삼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 자신들이 바라는 땅을 요구하고 선택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땅을 선택하는 모습은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할 의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매우 겸손하고 사랑이 많아서 이러한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선택을 했던 이유는 그가 부르심을 받은 이후로 장차 받게 될 후사(상속)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히11:8-20). 만일 그도 세상에서 풍성한 삶을 살기로 작정했더라면 이토록 쉽게 결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롯에게 배려하려는 마음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더욱 큰 이유는 바로 장차 들어갈 왕국에서 받을 상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롯에게 있어서는 매우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아브라함과 같이 행동을 했지만 그와 같은 소망은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행복하고 풍성하게 누리는 것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풍성한 삶을 사는 길을 선택했고 결국 아브라함에 대한 의리를 뒤로하고 기름진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결국 그의 인생을 결정적인 실패로 이끄는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멸하시기로 작정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롯은 자신의 영적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인가를 무시하고 자기 눈에 보이기 좋은 땅을 선택함으로서 스스로 실패를 자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은 세상에서 어떠한 일을 결정할 때 그 일들이 자신의 영적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결정을 할까요?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역시 롯과 같은 선택을 하고 있으니까요...

 

직장을 선택함에 있어서 앞으로 자신에게 얼마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것인지가 중요한가 아니면 영적 삶에 도움이 되는 길을 택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시간들을 빼앗아가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믿음으로부터 떠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물질의 풍요를 경험하면서 교회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살아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서 그들의 생명은 점차 힘을 잃어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죄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결과에 따라서 삶의 모양도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를 언제나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람에게 주어진 복

 

롯이 아브람을 떠나 분리된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제 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부터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영원히 주리라.(창13:14,15)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롯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도 오랜 시간동안 동행을 하였고, 결국 좋지 못한 모양으로 헤어지게 되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치 않는 분열로 인하여 마음의 큰 상처를 입었지만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삶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분명히 롯은 거부가 되어야 하고 아브라함은 초라한 순례자로 남아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롯이 기름진 땅을 소유한 반면 아브라함은 거친 들판만을 소망삼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서서 말씀을 드린바가 있듯이 지금까지 그들의 일에 대하여 잠잠히 계시던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드디어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롯과의 결별 후에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 즉 분리된 삶을 살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역사를 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약속과도 같은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롯과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지체하였다면 주님은 여전히 그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모든 땅을 그의 소유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살면서 더욱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잘 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분리된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풍성한 삶을 보장해 주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왔던 삶의 모양들이었습니다. 물론 풍성한 삶이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행복과 관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물질로 인하여 근심하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또한 세상이 주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기쁨으로 그 일들을 해결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은 더욱 많은 것들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여전히 죄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지속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부디 주님의 도우심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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