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창12:1-5)

조회 수 1802 추천 수 0 2010.06.06 22:06:11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 이처럼 아브람이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떠나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와 자기 조카 롯과 하란에게 자기들이 모은 모든 소유와 또 자기들이 얻은 혼들을 데리고 가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떠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라.(창12:1-5)

 

하나님은 민족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분의 일을 진행하시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고(창6:6)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주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방주를 만드시고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자들을 모두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인류를 새롭게 시작하시고자 했지만 또 다시 죄악이 관영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자 주님은 민족을 이루어 그분의 뜻을 전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와 아브람이 전혀 별개의 인물쯤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는 홍수 이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습니다(창9:28). 이것은 아브람이 홍수 이후로부터 시작하여 약 292년 후에 태어난 점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노아와 아브람은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같은 지역에 살고 있지 않았더라도 주님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들을 충분히 들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환경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이자 나홀의 아버지인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24:2)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리 좋은 환경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다른 신들을 섬겼던 자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가 머물고 있었던 갈대아 우르 지역은 전통적으로 달 신을 숭배했던 지역으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르"라는 말의 의미가 빛, 혹은 불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서 당시 불을 숭배하는 종교 의식에서 생겨난 지명이었다는 것도 우르가 하나님의 편에서 바라볼 때 매우 사악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러한 도시 안에 머물고 있었던 아브람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가 뛰어난 능력과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고 훌륭한 믿음의 가문이어서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젊고 유능해서도 아니며, 가진 재산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175세까지 살았던(25:7-10) 점을 감안하면 청년의 나이를 지나 중년에 이르는 시점에서 부름을 받았다고 불 수 있고, 그의 생활은 이미 습관화되어 변화를 싫어하는 시점에 이르렀고,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던 시기에 부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아브라함의 결심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의 가정생활은 그를 매우 힘들게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75세가 될 때까지 자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렇듯이 나이가 들어 자식이 없으면 매우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비교적 개방되었다는 현대인들조차도 부부가 자식이 없으면 가정적으로 매우 불안해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러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갔습니다. 그가 데라의 맏아들이었다는 점도 그에게 부담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환경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두어야만 합니다.

 

아브람을 부르심

 

이토록 불안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브람을 주께서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결코 아브람이 요구했기 때문이 아니고, 또한 그가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부르심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대하여 해야 할 바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에게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응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 가운데 누군가가 거듭났다고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될 소망을 갖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역시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나와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으로부터 나오라!" 아브라함이 머물고 있는 땅은 우상으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족들은 그것들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육신의 안식을 제공해 주는 곳이었지만 실제로 그 배도한 땅에서 머무르도록 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나오도록 명령을 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명령은 신약 성경 안에서도 수 없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분리되어 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고후6:14-18).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부터 나오도록 명령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계18:2-4).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안전한 곳 같지만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곳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머무는 동안 그는 분명히 그곳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민족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친족들이 머무르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서 결코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었고, 장자였기 때문에 그 모든 소유를 가질 수 있었음으로 안정된 삶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곳이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배도의 땅이요, 가증한 무리들이 섞여서 사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곳으로부터 나오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생각에 세상이 때로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세상에서 행복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웃과 친족들은 우리의 삶을 즐겁게 해 줄 것으로 믿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은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서 최선의 삶을 계획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분명히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도 언젠가는 떠나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마저도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영원한 이별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처지에 대하여 주님은 "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주님은 분명하게 내가 네게 보여줄 땅(가나안)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1). 그것을 아브라함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에게 있어서 소망의 땅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을 가지고 그곳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히11:8,9). 성경은 그가 훗날 상속을 받게 될 곳으로 향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가나안이 단순히 육신적인 행복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떠난 것이 아니라 그의 순종을 통하여 주어질 상속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은 어떠할까요? 우리도 역시 장차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질지 알지를 못하고 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순탄치 않은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어질지 전혀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마6:34). 또한 우리의 육신이 다하는 동안 선한 싸움을 지속하며 마치 경주하는 이들처럼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딤후4:7,8). 우리가 이토록 무모한 듯한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신실하게 살아감으로 주님으로부터 왕관을 수여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심에 있어서 결코 일방적인 순종을 요구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에게 있어서 과분할 만큼의 보상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처지는 매우 딱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 사라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그리 부유한 생활을 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그는 세상에 소망을 둘 만한 어떤 것도 소유하고 있지를 못한 채 평범하면서도 소망이 없는 미래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주님의 약속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매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75세가 되도록 자녀를 가지지 못했으므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약속의 시간(100세)이 되기도 전에 이 약속에 집착하여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과 더불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보면 그의 자식에 대한 기대가 어떠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이렇게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육신에 대한 약속들에 대하여 영적으로만 해석하려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영적 자녀를 갖는 것, 즉 복음 전파를 통하여 많은 이들을 영접시키는 것(Soul winning)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주님의 왕국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육신적인 약속조차 성취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될 그분의 왕국에서의 보상과 더불어 세상에서의 풍성한 삶도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마6:25-34). 비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겠지만 주님은 그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약속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받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도 갖지 못하고 죽여서 갖고자 해도 얻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워도 갖지 못함은 너희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주님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필요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구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대부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들은 그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신다는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구하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약속대로 주실 것입니다.

 

또한 "네 이름을 크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아브라함의 곁에서 그를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사람들에 대하여 보복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남이 자신을 미워하거나 저주를 한다고 해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곳에서 미워하지 말고, 염려하지도 말고, 고소하지도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용서할 것에 대하여 강조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단 이것은 구약 시대에만 적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약시대에는 더욱 필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시대는 사람들에 대하여 미워하는 모습들을 더욱 교묘하게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 갚는 일은 내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롬12:19)

 

아브라함은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들을 모두 주님께 의뢰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모든 일마다 간섭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주님께 맡겨졌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의 행위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많은 것으로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삶이 풍성해 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믿고 자신이 갈 길도 알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순례자가 되어 길을 나섰듯이 우리의 삶도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분리의 삶을 살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간다면 그 약속은 결코 아브라함만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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