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죽음이 주는 의미(창35:16-29)

조회 수 2500 추천 수 0 2010.06.06 22:48:40

이삭이 나이 많고 날수가 차서 숨을 거두고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묻으니라.(29)

 

이 세상을 사는 사람 가운데 누가 죽음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임을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히9:27),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도 매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하여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가족, 친척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비단 남의 이야기만일 수는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장차 당하게 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헬의 죽음 이후에 나타나는 이삭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둘의 죽음은 매우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그 사람의 생애에 대한 결산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의 모습은 매우 좋은 비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살펴봅시다.

 

라헬의 죽음

 

라헬은 분명히 사랑을 받았던 여자였습니다. 그는 남편이었던 야곱의 사랑을 얻음으로서 매우 행복한 시절을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녀가 행복했던 기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야곱의 사랑을 받고 있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단 한 번의 잘 못된 선택이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7년 동안을 그녀를 위해 일하고 난 후에 그녀의 아버지였던 라반은 언니였던 레아를 야곱의 침소에 들여보냈습니다. 이 때 그녀는 당연히 이 문제를 말했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당시의 환경이 비록 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야곱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야곱의 지극한 사랑에 대하여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야곱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자신을 위해 7년을 더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잃게 만들었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결국 조강지처의 자리를 언니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첩의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사실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환경에서나 인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한 남편에 한 아내의 원칙을 고수해 오신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는 사라입니다. 비록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큰 아들 이스마엘이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일부다처의 제도는 가인의 후손이었던 라멕 등 죄와 상관이 있었던 족속들에 의해 내려 온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야곱의 한 아내는 바로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던 것입니다. 결국 라헬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아내가 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언니에게 넘겨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녀의 불행은 여기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분명히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하나님으로부터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레아와 두 여종을 통하여 열 명의 자녀를 낳을 동안 단 한 명의 자녀도 낳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제일 마지막으로 요셉과 베냐민을 낳은 것으로 그의 인생은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을 불행하게 설계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심지어 야곱에게 스스로 죽겠다고 협박을 했던 여인이기도 합니다(30:1). 또한 요셉을 낳은 이 후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수치를 없애셨다"(30:23)고 말함으로서 스스로가 수치스럽게 살고 있었음을 고백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마지막 아들을 낳으면서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슬픔의 아들"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그가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인생이 결코 기쁨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이름은 야곱에 의해 "베냐민" 즉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졌지만 라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라헬과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많은 부분에 걸쳐서 후회하고 절망하며, 때로는 세상에서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슬픔 속에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불행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후회하고 슬픔 속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심어 놓을 것입니다. 라헬은 남은 자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던 대표적인 여자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어떠한 모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다시 한 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삭의 죽음

 

가장 평범한 인생을 경험하고 산 사람이 누구일까요? 성경에서 그 인물을 찾는다면 이삭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란만장한 인생을 경험하고 살아가지만 이삭의 인생은 그야말로 평범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매우 우유부단하고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보여 지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잘 속기도 하고, 싸움을 싫어하는 둔하고 겁도 많은 사람으로 보여 지는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40살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해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결단하여 종을 보내 리브가라는 아내를 데려와야 할 정도로 수동적이고도 매력 없는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결코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어찌 보면 가장 모범적인 인생을 경험하고 살았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릴 적에는 아버지에게 순종했던 아들이었습니다. 매우 착한 아들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를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는 아버지의 제안에 대하여 결코 부정적이거나 불순종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믿고 따라갔고,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버지에게 효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어릴 적 판단력이 미흡할 때에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못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의 이러한 순종은 신선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찌되었든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할 줄 아는 효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싸울 줄을 모르는 오늘날 소위 말하는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 많은 대적들이 그에게 시비를 걸어오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 자리를 피하거나, 또는 양보하여 싸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블레셋 사람들과의 우물을 놓고 다투는 장면은 그가 어떠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양보할 줄 아는 자였으며, 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했던 자였습니다.

 

오늘날 진리를 수호한다는 이유와 명분 때문에 상대방을 공격하고 상처를 주며, 그것을 정당화시키려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삭의 생애에 비추어 본다면 전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인격이 오늘날의 사람들이 행하는 보편적인 것들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이삭과 같이 화평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기본적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에게 있어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는 오직 한 아내와 평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결혼을 함에 있어서 비록 아버지 아브라함이 짝을 지어줄 정도로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매우 건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갈등을 경험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를 매우 사랑했고(창24:67), 종이든 다른 여자이든 누구와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이 건전하게 결혼생활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주님의 기본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삶 가운데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혼을 정당화하거나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들에 대하여는 성경의 어느 부분을 들어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반드시 한 아내에 한 남편의 원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한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오직 한 아내가 될 교회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용납한다면 그는 교회가 아닌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다원주의적인 사고를 용납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이혼을 정당화하려고 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구원하지 않고,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들은 실제로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진리로 가장한 누룩이 되어 번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한 아내에 한 남편, 혹은 한 남편에 한 아내의 원칙을 고수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삭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또는 피해를 가져다 준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매우 온유하고 겸손했으며, 화평함으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존재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가 오늘날 소위 말하는 지도력(leadership)이나, 족장으로서의 권위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180세에 죽었는데 그의 죽음에 대하여 날수가 차서 숨을 거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수명을 다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이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수명을 다하고 죽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병이 들거나, 사고로 인하여 결국 수명을 다하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늘어간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수명을 다하고 죽게 된다면 그는 필시 매우 행복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삭은 분명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죽음을 들여다보면 또한 그의 아들들에 의해 묻혀 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치도 않았던 상황을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갈등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동안 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임박하면서 그들은 화해를 하였고, 그들의 손에 의하여 묻혀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역시 이삭이 매우 행복한 사람임을 증거 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일 것입니다.

 

결론

 

라헬과 이삭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헬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이 행복하지 못했음을 고백했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모든 면에 있어서 행복한 죽음을 맛보았던 자였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상반된 결과를 가져 온 것은 그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달았기 때문입니다. 라헬은 외모가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언니와의 관계를 통하여 나타난 것과 같이 매우 욕심도 많은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집착은 결국 그의 인생을 슬픔이라는 결과를 낳도록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이삭은 그리 유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인생은 결국 기쁨으로 막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행복한 날들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인도를 따라 온전히 순종하는 생애를 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능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주님은 이러한 이삭에게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요? 만일 우리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고, 그 일에 집착하여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의 삶의 결국은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행복한 날들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장차 주님 앞에 받을 보상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보상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날들을 바라보면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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