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창28:10-22)

조회 수 2992 추천 수 0 2010.06.06 22:39:06

삶에 있어서의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이는 부자로부터, 어떤 이는 가난으로부터, 어떤 이는 명예, 권세 있는 가정으로부터, 어떤 이는 지식 있는 가정으로부터, 어떤 이는 무식한 가정으로부터, 어떤 이는 이방 종교를 섬기는 가정으로부터, 어떤 이는 복음적인 가정으로부터...... 등 출발의 형태를 나열하려든다면 책 한 권을 가득히 채워도 부족합니다. 이러한 여러 형태의 출발점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배경이라는 토대위에 꿈을 키우며 인생의 집을 지어가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반드시 그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확신의 시작을 끝까지 확고히 붙들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 되리라."(히 3:14)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때 크게 두 가지 배경 속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는 복음이요, 다른 하나는 율법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육신의 세력을 십자가에 달리우고, 주님과 더불어 부활의 신앙아래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육신의 바탕 위에 각종 훈련과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요구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도덕과 철학을 신앙의 잣대로 삼으며, 육신의 평안이 곧 신앙의 성숙이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핍박받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것(마 5:10-12)과는 대조적으로 적당히 타협하고, 육신의 보전을 위해 세상과 짝하여 오히려 복음을 핍박하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현대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떠한 모습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를 전형적으로 육체로 살았던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브엘세바를 떠나다

 

'브엘세바'라는 말의 뜻은 '일곱 개의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물이 없어 방황했던 곳이었습니다(창21:14). 야곱은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쌓았었고, 부모 형제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지형적으로 이스라엘 영토의 남방 한계선으로(삿 20:1, 삼상 3:20)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삭에게 축복을 받은 이후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야곱이 축복을 받지 않았더라면 떠날 이유가 없었지만, 그는 이제 형 에서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으로부터 핍박받을 이유가 없지만, 예수님을 알고 믿은 이유로 핍박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은 까닭입니다.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던 중 후에 벧엘이라 이름한 광야에서 잠을 자게 되었고, 그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브엘세바를 떠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브엘세바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로 그곳은 물이 없는 곳입니다.

 

브엘세바라는 이름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 우물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곁에는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특히 한국 땅에는 어느 도시에나 교회가 존재합니다. 심지어 깊은 산골에 가도 교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복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육체의 평안과 축복이라는 기복신앙의 형태로 증거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대도시일수록 이러한 형상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물질만능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도시인들은 복음을 변질시켰습니다. 교회사를 돌아보아도 순수한 복음교회는 오히려 농촌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당은 있지만 복음이 없는(말씀이 없는)교회는 우리의 영적 삶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그곳은 영적 브엘세바 입니다. 그곳에 미련을 두고 머물러 있다면 야곱이 에서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듯이, 우리의 영적 삶이 위태로워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갈증은 심각해져 갈 것입니다. 거듭난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서 브엘세바(말씀이 없는 곳)를 떠나 성령의 인도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은혜 가운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브엘세바는 육신의 터전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부모 형제가 있었고, 인정을 쌓았으며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축복을 받는 순간 원수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은 본래 우리 육신의 터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인정을 쌓고 삶을 지탱해 왔고, 육신을 만족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부터 세상은 우리와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족도 원수가 되었고, 같은 민족 간에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 스데반 등......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권(our conversation)은 하늘이기 때문입니다(빌 3:20). 물론 우리의 육신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발을 붙이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안주하려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와 율법적인 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세상 정부와의 관계였습니다. 복음적인 교회는 정치적 배경과는 관계없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면서도(롬 13:1-7) 순수한 교회를 지켜왔고, 율법적인 교회는 그들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정치와 결탁하고, 투쟁하며, 심지어 군림하면서 보존해 왔습니다.

 

복음적인 교회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복음으로 거룩하고 순수한 삶을 지속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 로마황제, 가톨릭,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는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핍박을 당연하게 여기며, 순교를 영광으로 여기는 그들은 이 땅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대해 적당히 타협하며 만족하는 많은 종교인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이 땅은 결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머물 땅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삶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마 6:33)

 

셋째로 그곳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또한 죄의 유혹이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술은 왜 끊어야 합니까? 술로 인해 거룩한 삶에 치명적인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배는 왜 끊어야 합니까? 지나친 흡연으로 인해 성결 된 몸이 더럽혀지고(고전 3:16,17), 죽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사업은 왜 정리해야 합니까? 그 일로 인해 스스로 실족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유발시킬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은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망설이고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요소를 제거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보이는 대부분이 죄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일을 무난히 해 낼 수 있습니다.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안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떠났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축복과 은혜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죄의 자리로부터 떠나게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순종함으로 천국으로 향하여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브엘세바를 떠난 야곱은 하란으로 향하던 중 한 곳에 이르러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잘 때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주리니 ... 땅의 모든 가족이 너와 네 씨 안에서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두려워하며 '이는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하면서 베개 하였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이름하고, 서원하기를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십분 일을 드리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소개한다는데 더욱 큰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서 장차 예수님이 이루실 사역에 대한 예언을 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본격적 교제를 하고 있는 야곱의 모습을 통해 주님과의 만남을 새롭게 준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닥다리는 중보자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히10:19-20).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요14:6). 만일 예수님을 통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다고 소개한다면 거짓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동시에 다른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면 이단입니다. 여기에 사닥다리는 오직 하나입니다(a ladder. KJV)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라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고 구원이 이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한 곳에 이르렀다는 것은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머무는 장소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무 교회주의자들은 교회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신앙만 있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신앙이 모든 것에 앞서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교회의 지체가 되어야만 합니다(엡5:30).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거듭난 후에 브엘세바 즉 육체의 곳으로부터 떠나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며, 말씀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모습을 봅니다. 마땅히 머물 장소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머문 곳은 광야였습니다.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외형적인 모습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건물이 크고, 유명한 전도자에, 사람이 많이 운집한 곳을 찾다보면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찾아 헤매고 있다면 우리가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장소를 하나님이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한곳에 머물러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지심으로 확실한 보증을 얻어내시기를 바랍니다.

 

한돌을 취하여 베개를 삼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한 돌이 되셔서 우리 안에서 성전을 지어가도록 합니다. 우리는 한 돌(예수 그리스도)을 기초로 하여 집을 지어 가야합니다. 위로 지어져 가는 건물은 건축물이 올라갈수록 더욱 기초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짓지 않으면 무너져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마 7:24-27).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면 건물의 높이가 더해갈수록 그 위험성은 더해갈 것입니다. 베개 위에 머리를 기대듯이 예수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두고 의지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복된 모습입니다.

 

누워 자는 야곱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평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상황을 모두 잊고 한 돌에 의지해서 시름을 덜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많은 어려움과 곤고한 일이 있겠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모든 것을 잊고 참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쉬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예수님 안에서 쉬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짐이 되어 힘겨워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평안한 위로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위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비록 가난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면류관을 예비하시고 천국의 아름다운 것으로 상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나와 비록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었지만 약속을 받은 이후로 힘을 얻고, 소망의 사람이 되었으며, 후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넉넉한 보상과 상속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약속을 받고 확신을 갖지 못한 자는 이 세상에서조차 희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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