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랄 지역에서의 이삭(창26:1-33)

조회 수 2906 추천 수 0 2010.06.06 22:28:22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거기서 솟아나는 우물을 얻었더니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그들이 그와 다투었으므로 이삭이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더라. 그들이 또 다른 우물을 파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다투므로 그가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가서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그것으로 인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고 이르되, 이제 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셨은즉 그 땅에서 우리가 다산하리라, 하였더라.(19-22)

 

이삭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과연 그가 믿음의 선조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가 우유부단한 성격이 바뀌어 지기를 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의 어디에도 그가 그의 성격을 바꾸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행동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성격이 변화되는 것을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능력과 실력을 겸비하여 유능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모든 부분을 걸쳐서 이삭을 바라보면 그보다 큰 복을 받고 살았던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 답은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그는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모셔 들인 사실이 분명하다면 그는 그의 자질과 능력에 상관없이 주님은 그의 생애에 큰 복을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삭은 바로 우리에게 그러한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우리는 그 가운데 중요한 구절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행하며"(3) 다시 말하면 이삭에게 주어진 복들은 사실상 그의 능력과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아버지로 인하여 얻게 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지금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번성하게 하고 이 모든 지역을 네 씨에게 주리니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4)는 약속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더욱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그에게 복을 주는 이유가 "이는 아브라함이 내 음성에 순종하고 내가 명한 것과 내 명령과 내 법규와 내 법률을 지켰기 때문이니라, 하시니라."(5)는 것입니다.

 

지금 그 어디에도 이삭의 일들을 두고 그에게 복을 주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가 복을 받는 이유는 오직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어찌 보면 이삭에게 있어서 매우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대꾸도 없고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에 대하여 변명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들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어떤 이는 이 말씀이 단순하게 부모가 잘하면 자식도 복을 받을 것이라는 주제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적용을 한다면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철저하게 개인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의 자녀가 역시 동일하게 산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확률적으로는 매우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삭이 제공받고 있는 복과는 관련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바로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미 소개한 바가 있지만 이삭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이삭과 같은 것은 바로 우리의 행위와 능력과는 관계없이 오직 믿음으로 이 구원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결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아직도 믿음만으로 부족하다고 가르치지만 주님은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통하여 이미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고, 우리는 다만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삭에게 주어진 복은 완전히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인한 것이었듯이 우리의 구원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리브가를 아내라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이삭

 

이삭은 여전히 두려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세상에 공개하기를 꺼려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리브가를 사람들 앞에 자신의 아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혹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리브가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의 경우에서 보듯이 믿는 자들에게도 두려움은 존재합니다. 그것도 사소한 경우에 발생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비겁해 지기도 하고, 때로는 옹졸하기도 해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 할 만큼 처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을 대하는 아비멜렉을 보십시오. 오히려 그는 이삭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범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10). 그리고 오히려 자기 백성들에게 이삭과 리브가를 절대로 건드리지 말도록 명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일 후에 이삭은 그 땅에서 씨를 뿌려 백 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다가와서 "네가 우리보다 더 강력한즉 우리에게서 떠나가라"(16)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삭과 아비멜렉 가운데 누가 강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삭이 강합니다. 그러나 이삭 자신이 강한 것은 그가 강한 것이 아니라 그를 보호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강하신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비록 하나님의 존재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삭의 모습들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강합니다. 다만 스스로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강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과 더불어 살아갈 때에 보다 풍성한 열매를 맺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랄에서 얻은 우물

 

이삭의 우물 사건은 가장 오해를 많이 받고 있는 장면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세상에 대하여 무능하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언제나 양보를 미덕을 삼고 살아야만 하는가? 자신의 것에 대해서도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거저 주어야 하는 것인가? 등등 많은 이야기꺼리들을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신약시대를 살아 온 그리스도인들의 행적들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가장 유능한 집단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포진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도 알며, 어떻게 하면 충분한 이익을 가져올 수 있을까?를 알고 있고, 또한 불이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각종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도 압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교회 안에서도 각자의 이익을 위해 집단 소송을 내는 경우들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은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금기시 되어 온 것들입니다.

 

교회사를 통해 본 그리스도인들은 수없이 많은 정치적인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에게 불이익이 닥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것을 반대하여 집단으로 덤벼드는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손해 보는 일들을 택했으며, 핍박을 당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순교를 하는 일에 있어서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모든 일에 순종하는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삭을 보십시오! 그는 지금 자신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이일이 거듭되고 있지만 그는 크게 짜증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또 다른 장소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그랄 사람들이 더 이상 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의 용서가 어느 때까지일까요? 그것은 더 이상 용서할 것이 없을 때까지입니다. 우리의 인내는 어디까지일까요? 역시 더 이상 인내할 것이 없을 때까지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삭이 고백한 사실과 같이 "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셨은즉 그 땅에서 우리가 다산하리라"(22)고 말한대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 주님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로서 나서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비멜렉과의 언약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다가와서 협상을 요구합니다. 지금 그는 자신을 해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오히려 사정을 하는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종전에 이삭에게 무례하게 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왜 그가 이러한 제안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삭이 매우 강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주변의 민족들에게 위협이 될 만큼 강한 민족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주고 맹세한 뒤에 돌려보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전혀 강자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친구같이, 아니면 이웃처럼 그에게 화친을 청해 온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사를 통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세력이 커져갈 때 오히려 그 힘을 과시하려 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유럽의 교회들을 보셨습니까? 그들은 교회의 힘을 이용하여 정부와 결탁하여 엉뚱하게도 복음과 상관없는 교회들을 형성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성경을 버리고 오히려 순수한 교회들을 핍박하는 도구로 쓰여 지고 있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변질을 주도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들은 지금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 그들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의 모습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가 스스로 권위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례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자신에게 매우 치욕적인 상황을 안겨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그들을 친구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렇게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이 있고, 높은 위치에 있더라도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겸손의 자리로 내려와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 역시 자신이 버림받게 될 것을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까?(고전9:27)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강한 자

 

이삭은 분명히 육신적으로는 무능하게 보이는 자입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진정으로 강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성품을 가진 자였지만 모든 것을 주님의 손의 의지하는 품성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자세보다도 매우 위대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민족의 족장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요구되는 진정으로 강한 자의 모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의 육신적인 능력과 관계없이 오직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따르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지도력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육신적인 능력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정도에 따라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의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마찬가지로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는가에 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많은 장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살아가느냐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도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지도자들은 착각을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따라와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답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지도자로 믿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의 편이 되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분명히 유능한 족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능한 것이 아니라 그가 믿는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또한 그 안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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