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방언

조회 수 1518 추천 수 0 2010.06.07 18:05:53

한국교회에서 방언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워낙 그리스도인의 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성령 충만함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기 때문에 감히 부정적인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기성교회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알지 못하는 언어, 즉 방언으로 인하여 수많은 이단들이 파생되어 가고, 심지어 기존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행동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방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도록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이유는 마치 방언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통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방언을 하고 난 이후에 환상과 계시, 입신(유체이탈)과 같은 체험을 합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대다수는 마귀의 영으로부터 지배를 받아 나온 결과일 뿐입니다. 이것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허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언의 역사

일반적으로 방언은 은사주의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방언의 역사만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F. D. Bruner에 의하면 1896년에 미국 남동부 노스 캐롤라이나주에서 방언 현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01년 미국 중서부 캔사스주 토피카에 있는 베델 성경대학의 여학생 애그니스 오우즈맨이 성령 세례를 사모하다가 그것을 받고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감리교 배경을 가졌고 성결교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 후 1906년 4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성결교 설교자 윌리암 시무어에 의해 소위 아주사 거리의 집회들을 통해 방언 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고, 여기서 오순절 교파가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엽에 와서, 이 운동은 오순절 교파를 넘어서 다른 교파들 속으로 퍼져 나갔고, 1960년 말에는 심지어 천주교회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신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운동’라고 부릅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의 방언은 일명 순복음full gospel) 교회의 역사와 같이합니다. 북미 오순절 협회 소속인 그들은 그들이 정한 헌법에 따라 성령의 세례와 그것의 최초 증거로 방언을 포함한다고 주장합니다(북미 오순절 협회 헌법 제5항). 이것이 장로교회가 지배적인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처음에는 이단으로 인식되었지만 점차 그들의 세력이 확장되어가고 장로교회를 비롯한 다른 대부분의 교파 교회들이 알지 못하는 언어, 즉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방언을 이단 정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방언은 모든 기독교회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는 실정입니다.

방언은 기독교의 전유물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방언이 마치 기독교회에만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종교들은 기독교의 방언과 흡사한 기도를 합니다. 방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알지 못하는 말을 하며,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최면에 걸린 자처럼 방언을 하는 동안 취해있으며, 그 속에서 수많은 환상과 영적 체험을 합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신비스러운 존재를 인식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신을 성령이 충만한 상태가 된 것처럼 착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크게 속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에는 주문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단어를 말하고, 같은 단어를 반복하여 기도하며, 그 속에서 환상을 보고 영적인 체험을 합니다. 그들이 때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보다도 놀라운 비밀들을 보게 되고, 심지어 지난 일들과 가까운 미래를 예언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처럼 영적인 체험을 했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마귀의 영을 통하여 신비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방언은 기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모든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이라는 점입니다.

초대교회에 방언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초대교회에서 방언을 말하는 일을 기록한 것은 오순절에 예루살렘(행 2:1-13)과, 고넬료의 집(행 10:44-48), 그리고 에베소(행 19:1-7)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에 왜 방언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에 모인 사람들이 유대인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알아듣는다 할지라도 분명하게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듣는 이들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신들의 언어”로 들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방언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언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목적은 그들 자신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 즉 복음을 전하고(행2:11), 하나님을 크게 높이며(행10:46), 대언(예언)을 하였습니다(행19:6). 즉 방언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방언을 말할 때에 듣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는 점입니다. 즉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고 있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을 높이는 일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목적, 즉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방언을 말하도록 하십니다. 그 법칙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없다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를 경험하고 있는지를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의 방언이 왜 문제인가?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성경 안에서 방언에 대한 기록들이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사도행전을 통해서 본 것과 같이 초대교회의 방언은 그 목적이 오직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들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을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언어로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인 것처럼 남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통역자도 없이 말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성령의 은사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서 권면하기를 방언, 즉 여러 종류의 방언(타언어)들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통역자를 두어 그 말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고전12:10,고전14:5). 그리고 그 말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사용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고전12:28).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대부분 교회의 혼란을 가져오고, 많은 이들을 실족시키며, 교회에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방언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인 것은 분명합니다(고전12:10). 그러나 그것이 언어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거나,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영어나 일본어, 혹은 중국어를 배웁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들도 방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성령님을 통해서 주어진 것들이 아니라면 은사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에게 방언(타언어)을 말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고, 그분을 높여 드리며,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위해 사용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분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게 하심으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할 수 있는 방언(타언어)는 다른 모든 사람들, 특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방언이 기도에 사용될 수 있는가?

우리가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언을 기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방언을 기도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거나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일,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위해 사용되어졌습니다. 오히려 알아듣지 못하는 헛된 말들을 되풀이 하는 기도의 모습은 이교도들이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기도에 대하여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마 6:7)

이것이 오늘날 방언으로 기도를 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들은 바로 이교도들의 습관을 따라 흉내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동일한 말을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래 할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기도에 대하여 이교도들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 안에서 방언이 기도로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마귀의 영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는 신비주의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주문을 가지고 반복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던 자들입니다. 그것이 기독교회에 슬그머니 들어와서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맑은 정신으로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를 원하십시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

초대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말할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행2:11)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오늘날 교회 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말들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태어난 곳의 언어로 듣고 있었습니다(행 2:8). 한 마디로 그들은 알아듣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 권면합니다.

“피리나 하프같이 생명 없는 것들이 소리를 낼 때에 음의 구분을 주지 아니하면 피리나 하프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찌 알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리요?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들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한 것을 어찌 알리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리라.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소리가 있다 할지라도 그 중에 의미 없는 소리는 하나도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말하는 자에게 야만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인이 되리라.”(고전 14:7-11)

언어는 서로가 소통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서로가 소통할 수 없다는 그것은 언어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방언이 하늘로부터 온 영적 언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못 알아듣지만 하나님께서는 알아들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억지를 부린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말하는 사람들 자신도 자기가 한 말을 알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만 알아듣는다면 그것도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언어가 서로 소통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도록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만일 방언으로 기도를 하거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원하셨다면 성경의 많은 곳에서 그 증거들을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가르치거나 기도하도록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방언이 은사로 주어진 자들이 있다면 반드시 통역을 하도록 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고자 한다면 절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오늘날 수많은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앞세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것보다 은사 체험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을 쌓아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거센 바람은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수많은 교회들은 힘없이 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맑은 정신으로 깨어서 바른 믿음 위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방언(타언어)은 분명히 성령님을 통하여 은사로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묘하게 이교도들이 즐겨 쓰던 기도를 기독교회에 심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그들 자신의 신앙 체험을 더욱 의지하도록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른 믿음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실한 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헛된 것을 위해 수고하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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