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비록 신분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라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에 머무는 동안 주님의 말씀에 따라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마 5:13-16). 그러나 실상은 누구의 자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주일 마다 교회에서 예배하고, 헌금하는 일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차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삶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매우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간섭을 귀찮아하며 작은 규모의 교회를 피하고, 예배 중 뒷자리를 선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만일 그들이 복음의 진수를 알았다면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복음은 절대 믿는 것으로 그치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육체적으로 힘겨운 싸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것도 주께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에게 주셨음니라"(빌 1:29)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자세가 바뀌어야 합니다. 믿기 전이나, 후의 삶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복음의 씨앗이 우리 안에 심겨졌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마 13:1-8). 성령의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갈 5:22-23).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만 하는 마음가짐을 성경을 통해 조명해 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설계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길지 않다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심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이는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림이니이다"(시 90:10)

모세는 시편을 통해 인생의 수명을 70-80세로 보고 신속히 가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반드시 한 번은 죽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히 9:27). 세상의 많은 군왕들이 수명을 연장해 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썼지만 그들은 모두 죽고 지금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장수에 대한 열망은 매우 강해서 중국, 태국 등 아시아를 여행하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빼놓지 않고 안내하는 곳이 뱀, 곰쓸개 등을 요리하는 보신관광 코스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혐오식품이라고 해서 먹지 않지만 한국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것이라고 하니 더욱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애쓸지라도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언제나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사형수가 사형이 집행 될 때까지 하루 하루를 긴장하며, 소중하게 생각하듯이 세월을 아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그것을 보전하리라"(요 12:25)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생각지 않은 때에 오셔서 영혼을 거두어 가실 것이므로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눅 12:40). 우리의 앞날은 불투명합니다. 우리는 이미 나이가 차서 노환으로 죽는 사람보다 각종 질병과 사고로 죽는 사람이 더욱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전혀 알 수 없는 인생이 길지 않음을 인식하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구원 받을 무리는 적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만으로 구원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큰 이유는 구원받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 얻을 자가 적을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갈 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구약에서도 구원 얻을 자가 많지 않음을 여러번 예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장정만 60만의 사람들이 가나안을 향해 갔지만 2명밖에 들어가지 못했고, 노아 때에는 모든 인류가운데 노아의 가족 8명만이 살아났으며,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온 성의 사람이 다 불에 타 죽고 3명만이 살아났으며, 수만의 군중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지만 마가의 다락방에는 오직 120명만이 남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을 얻었던 자와 얻지 못한 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섞여 살았던 구원받지 못한 무리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군중 심리에 자신을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도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적당히 묻혀서 지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노아 때에 사람들은 산에 배를 만드는 상식 밖의 행동에 아무도 동참치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풍요롭고, 건장하며, 힘이 있는 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함으로 광야에서의 죽음을 자초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설마 메시야가 저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복음 전도자들마저 핍박하는 잘못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일들을 끼워 맞추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육에 속해 있기 때문에 대부분 서로가 일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넓은 길은 평탄하지만 멸망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별된 삶을 살았던 구원받은 자들

상대적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구별된 삶을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노아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리석게 보이는 산에 배를 짓는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골리앗을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다는 이유로 싸워 이겼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목숨을 걸고 갈멜산에서 기도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나누어주고, 바나바 역시 자신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빈털털이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너무도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구별된 삶을 살았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상식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부자가 되고, 건강하며, 권세를 가짐으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오히려 참된 그리스도인은 가난과 질병과 핍박을 감사할 줄 아는 생활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얻은 자는 절대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 곧 영광을 추구하며,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평가받습니다. 분명히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자가 구원 얻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구제, 헌금, 봉사, 전도 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일은 실제로 우리의 육체가 주님을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다 근본적인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오늘날 우리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육체로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대답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생각과 일에 대한 것으로 답하셨습니다.

책망받은 베드로(마 16:21-28)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죽음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은 예수님에게 자신의 전 생애를 맡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죽으신다고 하는 말은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격앙된 모습으로 예수님에게 간절히 말하고 있는 것은 매우 당연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책망하십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소망하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이 복음을 퇴색시키거나 변질시키고 있다면 이는 사단의 계략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베드로를 세상에서 출세시키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 내면에 잠재해 있는 모든 죄, 즉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셔서 구원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비단 베드로에게만 적용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날 예수님 안에 사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이 돌보심으로 형통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정작 핍박과 고난 앞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문제는 항상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관심은 심판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는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너무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와 세상의 모든 삶의 기본과 시작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마 26:36-46)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첫 번째 내용은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39)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기도하실 때 "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42)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를 단순한 기도의 모형으로만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류의 모든 죄악을 담은 잔을 앞에 두고 마실 것인지를 고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피를 보시지도 못하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피를 보실 수도 없음에도 이제 온 몸이 사망의 몸이 되어야 하는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온 몸이 피로 물드는 상황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일은 곧 하나님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이 잔을 마시지 않는다면 인류의 구원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함으로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피 흘리심으로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예수님께서 알지 못하고 또한 거절하셨다면 구원의 역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 일은 결코 이 땅에서 물질과 지식만으로 할 수 없는 영적인 삶의 모양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굳게 지키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마지막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진리는 많은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바울의 서신에서만 보더라도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복음'(롬 1:23),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버림'(롬 1:25), '다른 복음은 잘 용납함'(고후 11:4), 미혹의 영, 귀신의 가르침(딤전 4:12) 등 진리를 변질시키려는 사단의 노력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참과 거짓에 관계없이 교회 환경에 적당히 적응하면서 생활해 온 것이 현실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소홀히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이는 많은 거짓 대언자들이 나와서 세상에 들어왔음이라" (요일 4:1)

사단은 지금도 우리의 육신의 눈을 속이면서 파멸로 이끕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진리의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엡 1:13). 종교의 기본 틀은 기복신앙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라는 무기로 자신의 행복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자신의 틀위에 신앙을 끼워 맞추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이라는 틀위에 자신을 맞추어갑니다. 진리의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머리를 앞선다면 그는 기형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몸은 절대로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앞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지체로서 머리되신 예수님을 앞질러 가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로 무장하고, 죄에 대하여 싸울 줄 알며(히 12:4),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요 12:25) 심정으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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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가 기도하노라(빌1:7~11) 이진천 2012-04-25
4 복음 안에서 교제(빌1:3~6) 이진천 201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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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스도인의 자세(빌 4: 8,9) 이진천 2010-06-07
»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빌립보서 1:27,28) 이진천 2010-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