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동역자들 (고전 3:1-9)|

조회 수 2320 추천 수 0 2010.06.09 09:14:05

오늘날 지구상에 수많은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실상 그들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는 하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마다 정통과 보수를 주장하며 다른 교회나 교파를 이단화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들이 하나가 되겠다고 '애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복음과는 관계없이 하나의 정치 세력화를 강화하려는 집단으로 커져 가는 것을 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됨의 원칙은 이러한 인간적인 노력과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미 동일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됨을 선포할만한 이유도 명분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가정의 자녀들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다'라고 떠들고 다닌다면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저들은 가족이 아니었나보다', '부모중에 누군가 서로 다른가보다'하고 의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양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나타나는 재능과 은사, 그리고 능력의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결코 '이것이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등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것을 좋아하신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할은 하나되게 하는 데 그 사역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갖힌 자 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함당하게 걸으며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주며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의 아버지시라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 속에 계시고 또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 "(엡 4:1-6)

우리 스스로가 제 아무리 다르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미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자신과 조금 다른 신학과 배경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결코 경솔해져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교단과 교회를 이단시하는 경향이 빈번함을 보면서 매우 가슴아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고립을 자초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 짓는 자

어째서 오늘날 이토록 많은 교단과 교파가 존재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결국 자신들이 가진 신학과 신앙만이 옳은 것이며, 상대방은 모두 잘못 되었다는 그릇된 생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상 기독교 교파의 탄생을 루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칼빈, 알미니안, 웨슬레 등 많은 신학자들과 전도자들에 의해 교단이 형성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시작이 순수한 복음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에서라기보다는 카톨릭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회(루터이후)는 교리만을 바꾸고 나머지 의식과 절기, 예식등은 모두 카톨릭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오늘날과 같이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성경이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보급되지도 않은 상태였고, 그들의 손에 들려진 성경은 라틴말로 번역된 변질된 성경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온전한 복음 신앙을 외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에는 다소 역부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약 1300년 가량을 카톨릭의 세력 앞에 말없이 충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루터나 칼빈을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 완벽하거나 우수해서가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복음의 핵심을 일깨워 주었고, 이 복음을 목숨을 걸고 주장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덮어두고 이들의 신학적인 교리에 매여 복음의 바른 교훈을 점차 벗어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성경이 각 가정마다 보급되고 있는 시대에 아직도 16-18세기의 지식을 가지고 서로 변론하고 있는 현실이 다소 우습게까지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제 성경이 우리 손안에 있다면 성경 안에서 진리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할 수 없을까요?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말이지만 초대 교회로부터 끊임없이 기승을 부렸던 '당 짓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는 조롱하는 자들이 있어 자기들의 경건치 아니한 정욕대로 걸으리라 하였나니 이들은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자들이며 육체적 감각대로 살며 성령이 없는 자들이니라"(유 1:18,19)

어떤 이들은 수많은 교단의 탄생이 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괘변을 늘어 놓습니다. 물론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데 공헌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대치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방법을 거부해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왜 수많은 교리와 교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얼굴을 붉히며 하나되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날 교회가 '당 짓는 자'들의 계략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오늘날의 교회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 바울, 아볼로 그리고 그리스도 파를 만들어 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 '육신에 속한 자'라고 책망하면서 그들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음을 책망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내 가정, 내 교회만을 고집하고 모든 것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요, 영적 어린아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 짓는 자'들은 우리가 언제나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장하면 우리 곁을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자녀들이 언제나 아이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성장해서 훌륭한 사람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는 더욱 더 어린 아이로 만들어 놓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진리의 넓은 세계를 포기하고 울타리 안에서 가르치려고 합니다. 진리의 세계는 결코 좁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됨

바울은 오늘날 사역자들의 처세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세웠던 교회입니다. 그리고 고생 끝에 많은 성도들이 운집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뒤 사람들은 바울을 잊었고 성도들은 베드로나 아볼로, 아니면 오직 그리스도만 따르겠다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어찌보면 바울에게는 매우 섭섭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볼로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그들은 교회에 꼭 필요한 존재이며 누가 중요하고, 큰가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심는이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어떤 모양이든 사람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 신앙은 기초부터 매우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하나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교회와 사역자의 소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오늘날 법원에 교회 재산권 소송으로 인해 서류가 쌓여가고 있다는 부끄러운 소식을 듣고 있지만, 그들은 아마도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 자들일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실수하기 쉬운 것은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사역자들을 흔히 '종'이라고 부릅니다. '종'은 누군가 그를 소유하고 있고 그에게 일을 시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선생들이 나와서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면 결코 자신이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종은 결코 자신의 공과를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역자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바르게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역자가 섬김의 위치에 있은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사역자를 추종하고 사역자는 이를 당연시 여깁니다. 성도들은 사역자가 어디에 가든지 따라가고, 사역자는 성도가 이탈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이제 일반화된 현상입니다. 그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역자가 능력의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이며, 교회 또한 규모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결코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복음이라는 범위 안에서만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생각하기에 온전치 못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고 벗어나야 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우리는 피차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대로 받을 상

"심는이와 물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니"(고전 3:8)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통하여 크게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의 종류가 각각이며, 또 하나는 일하는 대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사역을 다소 경계하는 모습을 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주로 하는 교회는 표적과 능력이 많이 나타나는 기도 중심의 교회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도를 중심하는 교회가 말씀 중심의 교회를 보면 답답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으며,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들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으며,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교회만이 온전하다고 주장한다면 기형적인 교회가 되거나 복음적인 교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장해 갈수록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교계에서 저명한 목사님이 '무리의 법칙'을 주장하며 교회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같은 은사, 같은 생각, 비슷한 환경과 추구하는 신앙의 방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이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러한 생각이 옳지 않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러한 현상은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성경적으로는 이러한 법칙을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무리들이 모여 하나의 교회를 완성해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역자가 가지지 못한 은사를 가진 성도가 있다 하더라도 내쫓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은사를 더욱 계발시켜주고, 피차 격려하며 부족함을 채워나가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역시 자신이 가진 은사가 사역자에게 없다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얕잡아보지 말고 자신의 가진 은사로 봉사의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는 결코 자랑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협력하여 일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자신의 일들을 감당해 간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보상이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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