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위해 죽으심(로마서 5:6-8)

조회 수 2731 추천 수 0 2010.06.07 23:52:01

"이는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때에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이라.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죽는 자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 용감히 죽고자 하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해 제시하시느니라."(로마서 5:6-8)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위해 오셨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왕이 되시면 어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하고 기대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발을 씻기시고 오히려 '인자의 온 것은 섬기려 하고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려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함으로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입니다. 그 사랑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오직 그 소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존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병든 자를 고치는 데 있지 않고, 훌륭한 교훈을 가르치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도망했고, 베드로는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로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사명을 인식한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연약하다는 말의 의미는 '전적 무능력'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어떤 능력도 가지고 있지를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에게 미련하게 보임이요 알 수도 없음이라"(고전 2;14)

이 무능에 대한 설명은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영적 이해에 있어서 전혀 무능합니다. 이는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생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무능과 무력을 깨닫는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자랑할 만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주님 안에서 누리는 것들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자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안 결과요 우리의 본성이 죄로 물들어 있기 까닭에 오염과 부패 속에서 살 수밖에 없음을 안 결과입니다. 이런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의 원래의 형상대로 우리를 바꾸어 놓으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둘째로 구원은 이미 영원에서 계획되어진 것입니다.

구원이란 한참 궁리 끝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관한 한 궁리 끝에 나온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국을 처음부터 아시며, 모든 일을 아십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그 모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모두가 '기약대로'라는 표현 속에 우리에게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차원에서 생각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에 끌리기 쉽고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고 영원합니다. 그리고 구원은 영원에서 계획되었습니다. 우연적으로 발생하거나 불시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아셨고 우리에게 관심을 두시고 우리의 이름이 그의 생명 책에 들어 있다는 것을 위대하게 나타내십니다. 그 까닭에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살기 전에 우리를 위해 죽어야 하는 계획을 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약 1400년 동안 율법을 소유해 왔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할 육체가 하나도 없음'이 입증되도록 이 기나긴 기간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툭하면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느니 조금만 더 시간과 기회가 있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려 듭니다. 자신들의 참음으로 율법을 지켜 자신들을 구원할 충분한 도덕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큰소리치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1400여 년을 하나님께 받아서 자기들의 외침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헬라철학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역시 같은 방식으로 로마 문명과 법률, 문화도 그들대로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우리 인간들의 한계만을 노출시킨 결과를 낳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예수님은 오셨고, 인류의 구원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바로 이것이 '기약한 때를 가르쳐 줍니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성경의 전체 내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을 통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주님의 생애가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도, 이적도 아닙니다. 죽으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 교훈, 모범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생애에도 불구하고 죽으심이 없었다면 어떤 사람도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죽으심은 곧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데 있습니다. 죽음보다 위대한 사랑의 표현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죽음의 모양도 수치스럽고 불명예롭고, 모욕적인 십자가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아는 데는 여기에 있습니다.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롬 8:3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준다는 것은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를 죽음에 내어주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상의 확증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 더 이상 감정이 잡히기를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느낌을 유발시키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십자가로 나아가서 그것을 쳐다보며, 명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부족함을 알고 조명과 이해를 주는 성령을 구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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