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7 (없음)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바울이 총독 벨릭스에게 이송된 지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은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내세워 바울을 총독에게 고소했습니다. 그들의 고소내용은 '성전 모독죄'였으며, 바울이 나사렛 이단을 신봉하는 자로 모든 유대인을 소요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재판정의 모습은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고, 성경을 거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총독 벨릭스는 정의를 판단하는 재판장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아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호의적인 반면 바울에 대해서는 냉정함을 보였던 자였습니다. 그의 재판 기준은 선악에 기준을 두지 않았습니다. 스스로가 곧 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재판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바울은 자신의 정의로움에 대하여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초지일관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며, 다양한 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열심은 있지만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자, 불법에 대하여 무감각한 자, 정의로운 일을 위해 희생하는 자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다양한 삶의 모습가운데 바울과 같이 진리를 위해 굽히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우리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권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기쁨은 얼마나 정의롭고 떳떳한 삶을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명예, 권세, 물질의 부요, 지식의 풍성함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삶이 의롭지 못하다면 항상 불안에 떨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도적질 당한 자는 다리를 뻗고 자도 도적질 한 자는 오그리고 잔다는 말이 있듯이 정의를 행한 자는 모든 것을 잃어도 언제나 평안함을 잃지 않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을 송사하기 위해서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내세웁니다. 그는 법에 정통한 자로서 유대인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법정에 세워서 재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벨릭스의 재판 성격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벨릭스 앞에서 아부하는 것으로부터 송사를 시작합니다. 그는 벨릭스에게 '각하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린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각하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리고 또 각하의 선견지명 덕택으로 이 민족이 매우 귀중한 일을 이루었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벨릭스에게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공연히 사람들에게 칭찬의 도를 넘어서 우상화하려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특히 우리의 이권이 개입되어 있을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추켜세웁니다.

 

우상을 만드는 일은 특히 교회 안에서 더욱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정의로우냐에 관계없이 맹목적으로 목회자를 따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모두가 지체로서의 사명감당을 위해 자신의 은사를 다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 중심으로 모이고 자기 그룹의 모임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성전 모독죄를 적용하여 심판하려 했습니다. 이는 오해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혀 근거 없는 일들을 확인도 해보지 않고 고소하고 있습니다. 성전 모독죄라고 한다면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다고 믿고 있는 것이고, 확인도 해보지 않고 바울을 고소한다는 것은 심판을 위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구습에 빠져 있는 유대인의 모습과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모습을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구습과 정죄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 매사에 신중한 자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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