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사도행전 13:21-23)|

조회 수 2453 추천 수 0 2010.06.09 00:31:49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셨습니다. 물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시대에는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지도자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속에도 회중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 시대에도 지도자의 중요성은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 시대에서의 지도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지도자는 교회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거짓복음이 교회 안에 난무하고 마치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를 지키고, 거짓진리를 분별해 내며, 그리스도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까지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참된 지도자가 많이 나오길 바라며 또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딤후 2:21, 행 9:15)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쓰는 저 또한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버린 사울(삼상 15:17-23)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실패한 왕으로 취급되는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게 초대 왕으로 등극했지만 왕이 된 이후로 비참한 세월을 보낸 자였습니다. 악한 영에 의해 심한 고생을 하고(삼상 16:14), 평생을 왕위에 대한 위협으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다윗을 경계 대상으로 삼아 살해할 뜻을 품었고, 하나님에 대한 도전 행위를 서슴치 않는 범죄를 끊임없이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울이 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낮출줄 아는 겸손한 자였습니다(삼상 9:21). 오히려 왕으로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양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사울이 왕이 되면서 무너지는데, 이는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과 후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어리석은 모습들을 봅니다. 사울을 통하여 오늘 우리 가운데 있는 문제점들을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울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22,23절).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 나서기 앞서 하나님은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 시킬 것을 명령하셨으나 아말렉 왕 아각과 살진 짐승들은 남겨두고 가치 없고 낮은 것만 진멸 시키는 불순종을 했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하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부분에서 많은 실패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외형적인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과정이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물질, 명예, 권세, 지식이 성도의 신앙 수준을 판가름하는 관행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 가령 물질에 대한 개념도 율법시대에는 십분의 일만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수 억원을 헌금했다 하더라도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차, 좋은 집, 그 외 각종 악세서리 등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는 이에 하나님의 것을 수없이 도적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많은 헌금과 봉사 활동이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삶의 전체가 하나님께 맡겨진 순종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외형적 삶의 모양보다는 내면의 성숙이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외형적 삶의 성숙을 위해 노력한다면 점점 율법의 신앙에 사로잡혀 스스로 넘어지거나 한계에 부딪쳐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지만, 내면의 성숙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외적인 결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성숙을 위해 순종을 생활화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사울은 하나님보다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는 어리석음을 보였습니다(24절).

민주주의라는 말은 백성이 주인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볼 때 백성을 두려워하는 사울 왕의 모습은 오히려 위대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통치자가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독재권력을 휘두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바로 알지 못한다면 이 시대에도 매우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친히 통치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사람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사는 동안에도 그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인간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할 때 노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셨고,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대적할 때도 언어를 혼란케 함으로 인류를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잃어갈 때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부르셔서 민족을 이루셨고, 친히 왕이 되셔서 그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들의 왕을 세우기를 열망함으로 사울 왕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가장 작고, 낮음을 주장하는(삼상 9:21) 한 청년 사울을 직접 선택함으로 통치권을 가지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을 뒤로하고 백성들의 어리석음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통치권을 유지하려는 욕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결과를 맞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사망을 낳게 된 것입니다(약 1:15).

초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인정받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바울을 존경했고, 따랐으며, 심지어 바울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롬 16:3-4). 유대인이었던 그는 당시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 문제로 어려움을 겪자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던 율법주의 사상을 뒤로하고 복음 외에는 전하지 말 것을 선포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 결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만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분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분명히 합니다.

복음시대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더욱 분명해 졌습니다. 율법시대에는 몇 명의 지도자, 선지자, 왕들에 의해 통치하셨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안에서 직접 통치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나라의 시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빌 3:20).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명령을 따라 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셋째로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버림받았습니다(26절)

사울이 말씀을 어긴 이유는 백성을 두려워하여 청종하였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24절). 그러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곧 대적의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종이 주인의 말에 불순종한다면 도전의 행위로 간주하여 처벌을 하듯이 왕 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으니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약 3:1-12).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인격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행 11:1), '육체의 마음판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 '말씀이 믿는 자 속에 역사 하느니라'(살전 2:13) 복음 시대에도 말씀은 인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10:16-18). 우리가 단순히 말씀을 지식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는 사울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 자신의 인격으로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빌 2:5), 함께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빌 2:12).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행 13:21-23)

사도 바울이 수리아의 안디옥으로부터 바나바와 함께 파송받아 1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그곳에 있는 흩어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면서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행 13:22)라고 소개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 전반을 들여다보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항상 살해의 위험 속에 평생을 보냈고, 넉넉하고 평안한 생활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언제나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시 23편). 과연 무엇이 다윗을 믿음의 사람, 곧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쓰임 받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다윗은 골리앗 앞에 담대히 선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7:45-49).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누가 보아도 결과가 뻔한 싸움이었습니다. 다윗 자신도 이 싸움에 끼어들어 싸울 생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삼상 17:26). 그는 골리앗 앞에 나아갈 때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말하면서 물 맷돌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의 칼로 목을 베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골리앗 앞에 서 있습니다. 때로는 타협을 요구하고, 때로는 행복을 요구합니다. 날과 절기를 지키게 함으로 복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갈 4:9-11),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복음을 변질시키기도 합니다(골 2:8). 그들은 거짓 복음을 가르치고 있으면서 마치 참인 것처럼 거대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작고, 힘없는 자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기를 들고나서야 합니다. 다윗의 물 맷돌과 믿음이 무기였듯이 말씀과 믿음이 우리의 무기입니다(살전 2:13). 말씀을 세상 속으로 던져 거짓 복음으로,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새로운 바벨탑을 건설하고 있는 악의 세력들을 무너뜨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의 범죄함을 뉘우칠 줄 아는 자였습니다(삼하 12:13).

그는 한 때 방심함으로 강간과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삼하 11장). 이후 나단 선지자에 의해 그의 죄를 지적 받자, 그는 평생을 침상이 마를 날이 없도록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시 6편). 회개함의 의미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후로 동일한 죄를 범치 않는 회개의 본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회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이 고백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복음 시대에 있어서 회개의 의미는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발길을 천국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발길을 생명으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뒤에는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행 2:38).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 짓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 속성이 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일한 죄를 거듭하고 잇다면 회개의 여부를 다시 한 번 진단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맺어가지 못하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고 계심(요일 5:12)이 증거되고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 시간이 바로 지금임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이 내 안에서 증거되고 있는지를 확인하십시오. 바울은 이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 인격으로 다가옴을 재차 강조합니다. 구원의 증거가 없는 삶의 모습은 열매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가 찍혀 불에 던지우듯이 죄에서 돌이켜 거룩한 삶으로 인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요나단과의 우정이 변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요건 가운데 중요한 덕목은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입니다. 인간 관계가 완만하지 못해서는 결코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살아 있을 동안에도 돈독한 우정을 과시했지만, 요나단이 죽고, 사울마저 죽은 후 왕위에 오르자 그는 요나단을 생각해서 그의 가족을 찾았고 결국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찾아서 그를 돌보는 우정을 과시했습니다(삼하 9:9-13). 오히려 절뚝발이였던 므비보셋은 자신이 죽을 줄로만 생각했으나 다윗은 오히려 후대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 속에는 절뚝발이요 신분상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므비보셋 같은 인생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다윗의 하나님이 쓰실만한 인격 중에 변치 않는 우정은 단연 돋보이는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전 생애 중단 한 번도 사람 관계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배반과 음모속에서도 끝까지 신뢰함으로 훌륭한 동지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지도자들의 향방 없는 모습에 비교한다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은 다 소중한 자들입니다. 미천한 자일지라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사람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다윗은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제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결코 변치 않는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최선의 사랑을 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원수까지 사랑할 것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마 5:44). 진정한 그리스도인, 더 나아가 진정한 지도자,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람을 대할 줄 아는 자임을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는 우리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내는 열매로 그들의 자질 내부를 볼 수는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그 자격 여부를 판단하는데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부디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열매를 맺음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쓰시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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